임재
(presence)
“임재(臨在)”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파루시아인데, 파라(곁에)와 우시아(있음. “있다”를 의미하는 에이미에서 파생됨)가 합해진 낱말이다. 따라서 파루시아는 문자적으로 “곁에 있음” 즉 “임재”를 의미한다. 이 낱말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24회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메시아 왕국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임재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마 24:3. NW 부록, 5B 참조.
많은 번역판들은 이 낱말을 다양하게 번역한다. 어떤 성구에서는 파루시아를 “임재”로 번역하는 때도 있지만 “오심”으로 번역하는 때가 더 많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하여 “두 번째 오심” 즉 “재림”(라틴어 「불가타」 마 24:3에서 파루시아의 역어인 아드벤투스[“강림” 혹은 “오심”])이라는 표현의 기초가 되었다. 예수의 임재에는 당연히 그분이 임재하는 곳에 도착하시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파루시아를 “오심”으로 번역하는 것은 도착에만 역점을 둠으로 도착에 뒤이은 임재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한다. 물론 사전 편집자들은 대개 파루시아를 “도착”과 “임재” 양쪽으로 다 번역하는 것을 허용하면서도 이 단어가 전달하는 주요 사상이 개인의 임재라는 점을 인정한다.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Old and New Testament Words, 1981년, 1권, 208, 209면)은 이렇게 말한다. “파루시아는 ··· 도착과 그 결과로 있게 되는 임재라는 두 가지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로 쓰여진] 한 파피루스 편지에서 어떤 부인은 자기 재산에 관한 일을 돌보기 위하여 재산이 있는 그곳에 자기가 파루시아할 필요성에 관하여 말한다. ··· 교회의 홀연한 승천의 때인 그리스도의 돌아오심과 관련하여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그분이 자신의 성도들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오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이후로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시고 보이실 때까지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 즉 임재하는 것도 의미한다.” 리델과 스콧 공편 「희영 사전」(Greek-English Lexicon, H. 존스 개정, 옥스퍼드, 1968년, 1343면)은 파루시아가 세속 그리스 문학에서 때때로 “왕실이나 정부의 주요 인사의 방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고 알려 준다.
물론 이 그리스어 용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세속 그리스어 문헌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성서 자체에서 사용된 용법이 한층 더 효과적인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빌립보 2:12에서 바울은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함께 있을[파루시아] 때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아푸시아] 때에도 더욱더 기꺼이” 순종한 것에 대해 말한다. 또한 고린도 둘째 10:10, 11에서도 바울은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함께 있어[파루시아] 보면 약하고, 그의 연설은 멸시할 만하다”고 말한 자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고려하십시오. 곧 떠나 있을[아폰테스] 때에 편지의 말에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지 나타나 있는 대로, 그곳에 있을[파론테스] 때에도 우리가 그대로 행동하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빌 1:24-27 비교) 그러므로 대조점은 그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즉 임재냐 부재냐이지 도착(혹은 도래)이냐 출발이냐가 아니다.
이를 고려하여, J. B. 로더럼의 「강조된 성서」(Emphasised Bible)는 부록(271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판에서는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한결같이 ‘임재’로 번역하였다(이 단어의 또 하나의 대체어인 ‘도래’를 제쳐 두고). ··· ‘임재’라는 말의 의미는 ‘부재’라는 말과 대조해 볼 때 아주 분명히 [드러나므로] ··· 자연히 질문이 생긴다. 즉 언제나 이렇게 번역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의 파루시아가 단지 일시적으로 왔다가 급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기간을 망라하는 임재라는 사실은 마태 24:37-39과 누가 17:26-30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말씀에서도 알려 준다. 이 구절들에서 “노아의 날”이 “‘사람의 아들’의 임재”(누가의 기록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와 비교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의 “임재” 혹은 “날”에도 유사한 절정이 있을 것임을 알려 주기는 하셨지만, 노아의 날의 최절정을 이룬 대홍수가 닥친 일만 비교하신 것은 아니다. 사실상 “노아의 날”은 여러 해에 걸친 기간이었으므로, 예언된 “‘사람의 아들’의 임재[혹은 “날”]”도 구출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청종하지 않는 자들의 멸망으로 절정을 이룰 여러 해에 걸친 기간일 것이라고 믿는 데에는 근거가 있다.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성격 파루시아 즉 임재는 물론 보이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 단어가 나오는 곳 중에 여섯 군데에서는 스데바나, 보르두나도, 아가이고, 디도, 바울 같은 사람들의 보이는 임재, 인간으로서의 임재를 언급한다. (고첫 16:17; 고둘 7:6, 7; 10:10; 빌 1:26; 2:12) 파루시아가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바울이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말을 하면서 그 단어와 관련된 동사형(파레이미)을 사용한 일에서 알 수 있다. (고첫 5:3) 또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리스어로 기록하면서 시나이 산에서 있었던 하느님의 파루시아 즉 천둥과 번개라는 보이는 증거를 수반한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언급한다.—「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 III, 80 (v, 2).
보이지 않는 임재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여호와 하느님이 장막의 지성소에 있는 계약의 궤에 관하여 모세에게 ‘내가 거기에서 너에게 임하여, 덮개 위에서 너와 말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으로도 증명된다. (출 25:22) 하느님의 임재는 보이는 형태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경이 분명히 밝히듯이, 모세도,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도,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요 1:18; 출 33:20)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 낙성식을 할 때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그 집에 가득하였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거하신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솔로몬 자신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진실로 땅에 사시겠습니까? 보십시오! 하늘들, 아니,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당신을 모실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제가 지은 이 집이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 집을 향하여 계속 눈을 뜨고 계시면서 거기서 올리는 기도를 “[그분]이 사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실 것이었다.—왕첫 8:10-13, 27-30. 행 7:45-50 비교.
이러한 기록들은 하느님이 하늘에 계시면서도 영적으로 (따라서 보이지 않게) 땅에 ‘임재’하실 수 있는 능력을 예시한다. 하느님의 임재는 하느님을 대신해서 행동하고 말하는 대리자인 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한 천사는 심지어 불타는 덤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한 천사처럼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출 3:2-8. 비교 출 23:20; 32:34)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시나이 산으로 모세에게 “가겠다”고, 그리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출 19:9, 11, 18, 20), 사도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상 하느님이 자신의 천사들을 통하여 그곳에 임재하셔서 모세에게 자신의 계약을 전달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갈 3:19; 히 2:2. 얼굴 참조.
여호와의 부활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받았고, 또 “하느님의 존재 자체의 정확한 표상”이므로, 아들도 의당 비슷한 방식으로 보이지 않게 임재하실 수 있을 것이다. (마 28:18; 히 1:2, 3) 이와 관련하여 유의할 만한 것으로 지상에 계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서도 마치 몸소 함께 있기라도 한 듯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하실 수 있었다.—마 8:5-13; 요 4:46-53.
또한 여호와 하느님은 자신의 영광스럽게 된 아들의 명령에 천사들이 복종하게 하셨음이 분명하다. (베첫 3:22) 예수의 임재에 관한 성구들은 으레 그분이 천사 무리와 “함께” 오거나 ‘천사들을 보내는 것’을 묘사한다. (마 13:37-41, 47-49; 16:27; 24:31; 막 8:38; 데둘 1:7, 8)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국 권능과 영광 중에 있게 되는 그분의 예언된 임재가 지상의 임무를 위해 전적으로 천사나 대리자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일은 사도들과 여타 사람들과 관련하여 기원 1세기에도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행 5:19; 8:26; 10:3, 7, 22; 12:7-11, 23; 27:23) 예수의 비유와 다른 성구들이 알려 주듯이, 예수의 임재는 자기 집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주인의 임재와 같고, 또 왕권을 받고 자기 영역을 다스리기 위해 돌아오는 사람의 임재와 같다. 또한 예수의 임재는 개인적인 검사와 심판에 이어 그 심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거나 집행하는 일과 승인받은 자들에게 상을 주는 일이 따름을 의미한다. (마 24:43-51; 25:14-45; 누 19:11-27. 마 19:28, 29 비교) 예수의 왕권에는 온 땅이 포함되므로 그분의 임재도 세계적인 규모이다. (마 24:23-27, 30 비교) 고린도 첫째 15:24-28의 영감받은 바울의 말과 계시록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한 성구들은(5:8-10; 7:17; 19:11-16; 20:1-6; 21:1-4, 9, 10, 22-27)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분이 온 땅과 그 주민에게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땅과 그 거주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왕권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때임을 알려 준다.—마 6:9, 10 비교.
예수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구름에 싸여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성구들을 근거로(막 13:26; 계 1:7) 그분의 임재가 틀림없이 보이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표제 구름 (예시적 용법) 아래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여느 현시와 관련하여 구름이 사용되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본다’는 말도 비유적으로 보는 것 즉 정신과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사 44:18; 렘 5:21; 겔 12:2, 3; 마 13:13-16; 엡 1:17, 18) 이런 뜻을 부정하는 것은 ‘본다’의 반대인 ‘눈이 멀다’는 개념이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영적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예수는 분명히 ‘본다’와 ‘눈이 멀다’는 개념 모두를 그처럼 비유적 의미나 영적 의미로 사용하셨다. (요 9:39-41; 계 3:14-18. 또한 고둘 4:4; 베둘 1:9 비교) (필시 구름을 수반한) “폭풍 속에서”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후에 욥은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당신에 대해 풍문으로만 들었으나,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분명히 봅니다.” (욥 38:1; 42:5)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으로 볼 때 틀림없이 욥의 말도 육안으로가 아니라 정신과 마음으로 깨달았다는 말일 것이다.—요 1:18; 5:37; 6:46; 요첫 4:12.
예수의 임재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의 형태로 예수가 나타난다는 의미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예수 자신의 말씀 즉 자신이 죽음으로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살을 바친다는 말씀에서 볼 수 있고(요 6:51) 또한 부활된 예수는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고,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분”이라는 사도 바울의 선언에서도 볼 수 있다. (디첫 6:14-16)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조금 더 있으면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물론 제자들은 그분을 볼 것이었는데, 그분이 부활되신 뒤에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들도 부활되어 하늘에서 그분과 결합하여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영광을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요 14:19; 17:24) 그러나 예수께서 영적 피조물의 생명으로 부활되신 뒤에는(베첫 3:18)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기 때문에 일반 세상은 그분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승천하실 때도 세상은 보지 못하고 제자들만 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돌아오심도 “같은 방식으로”(그리스어, 트로포스. “모습”을 의미하는 모르페가 아님), 따라서 대중에게 보이는 일 없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충실한 추종자들만 그 일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였다.—행 1:1-11.
비웃는 자들은 필시 마음 상태가 나쁜 데다가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해 그릇된 기대를 하였기 때문에 비웃는 태도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런 자들은 비웃으면서 “이 약속된 그분의 임재가 어디 있소? 우리의 조상들이 죽어 잠들었을 때부터, 모든 것이 창조물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소”라고 말할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베둘 3:2-4. 베둘 1:16 비교.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강력한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타오르는 불 가운데 나타나”실(그리스어, 아포칼립시스) 때 사람들은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에 그분은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우리 주 예수에 관한 좋은 소식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데둘 1:7-9) 하지만 그렇게 나타나는 일이 있기 전에 보이지 않는 임재가 있는데, 이는 충실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분별하지 못한다. 기억해 볼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의 임재를 “노아의 날”에 비하면서 노아 시대에 물에 의한 멸망이 닥칠 때까지 사람들이 “유의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의 임재도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24:37-39.
예수의 임재를 특징짓는 사건들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며(마 18:20), 또한 추종자들이 제자를 삼는 일을 하는 데 ‘사물의 제도의 종결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확언하셨다. (마 28:19, 20) 물론 마태 24:3과 그 외의 관련 성구들에 나오는 파루시아는 틀림없이 그런 것 이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특별한 임재 즉 땅의 모든 주민과 관련되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예수가 하느님에게 기름부음받은 왕으로서 온전한 권위를 표현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임재를 가리킨다.
왕국 권능 중에 있는 예수의 임재를 특징짓는 사건들 가운데는 그분의 추종자들 중 이미 죽어 있는 자들이 부활되어 하늘 왕국에서 그분과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일(고첫 15:23; 로 8:17), 그분의 임재 때에 살고 있는 다른 추종자들을 함께 모아 그분과 결합하게 하는 일(마 24:31; 데둘 2:1), “자기[예수]의 임재를 나타내심[에피파네이아]으로” 행해질, 배교한 “불법의 사람”을 ‘없애는 일’(데둘 2:3-8. 불법의 사람 참조), 구출받을 기회에 유의하지 않는 모든 자들의 멸망(마 24:37-39), 그리고 필연적인 일로서 그분의 천년 통치의 도래(계 20:1-6)가 있다. 또한 왕국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의 변형 환상을 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임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할 수 있었던 경위에 대한 내용은 변형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베둘 1:16-18.
예수의 임재에 수반되는 상황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나타냄 혹은 나타남에 관한 정보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많이 알려 준다. 계시록 6:1, 2에 그려져 있는, 면류관을 쓰고 흰말을 탄 자에 대한 상징적 묘사는 계시록 19:11-16에 나오는 말 탄 자의 묘사와 일치한데, 그분은 “‘왕들의 왕’, ‘주들의 주’”인 그리스도 예수이다. 계시록 6장에서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정복하는 왕으로서 말을 타고 나아갈 때 땅에서 악을 즉각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이 말을 타고 가시는 일에는 “땅에서 평화를 제거하는” 전쟁과 더불어 식량 부족과 치사적인 역병이 수반된다. (계 6:3-8) 한편 이 내용은 마태 24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예언에서 볼 수 있는 특징들과 병행을 이룬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예언 즉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기원 70년에 발생)과 분명히 관련 있는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임재 때에도 적용점이 있으며, 따라서 예수께서 언제 메시아 왕으로 임재하여 하늘에서 다스리시는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표징”을 제시한다.—마 24:3, 32, 33; 누 21:29-31.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그 밖의 성구들은 대개 그때까지 그리고 그 기간 중에도 충실함과 인내를 나타내도록 격려한다.—데첫 2:19; 3:12, 13; 5:23; 야 5:7, 8; 요첫 2:28.
여호와의 날의 임재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에서 형제들에게 “여호와의 날의 임재를 기다리며 그것을 가깝게 생각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권고한다. (베둘 3:11, 12) 그들은 여호와의 심판 날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인정하면서 주의를 기울여 그날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 “여호와의 날”에 이 악한 세상의 정부인 “하늘”은 불에 의한 것처럼 멸망되고, 그것과 함께하는 “요소들”도 심한 열기로 인해 분해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녹아 버릴 것이다. 사탄의 통제 아래 있는 현 제도는 끝나고 말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은 자신의 아들이자 임명된 왕인 그리스도 예수에 의하여,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행동하시므로(요 3:35. 고첫 15:23, 24 비교), 의당 약속된 여호와의 이 “임재”와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는 연관되어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하나의 선포를 비웃는 자들은 나머지 하나의 선포도 비웃을 것이다. 이 경우도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의 태도가 상응하는 예로 사용되었다.—베둘 3:5-7. 마 24:37-39 비교.
불법한 자의 임재 데살로니가 둘째 2:9-12에서 사도는 “불법한 자의 임재”를 ‘사탄의 활동에 따른 것으로서, 온갖 강력한 일과 거짓 표징들과 전조들과 온갖 불의의 속임수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것 역시 파루시아가 일시적인 도래나 도착 이상을 의미함을 예시한다. 이 모든 일과 표징과 전조와 이런 속임수가 행해지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