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
“계속 서로 참고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골로새 3:13.
1. (ㄱ) 베드로는 다른 사람을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제안을 하면서, 왜 자신이 매우 관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까? (ㄴ) 예수께서는 무슨 의미로 우리가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까?
“주여,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입니까?” (마태 18:21) 베드로는 자신이 매우 관대한 제안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라비의 전통에 의하면, 동일한 과오에 대해 세 번 이상 용서를 베풀어서는 안 되었습니다.a 그런데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을 때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말하는데,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하십시오.” (마태 18:22) 일곱의 중복은 “무한정”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예수의 견해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횟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습니다.
2, 3. (ㄱ)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려워 보일 수 있는 어떤 상황들이 있습니까? (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점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지만 그러한 교훈을 적용하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습니다. 부당한 손상을 입고 고통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쩌면 당신이 믿었던 사람이 신뢰를 저버렸을지 모릅니다. (잠언 11:13) 가까운 벗이 생각 없이 한 말이 당신에게는 “칼로 찌름 같”았을지 모릅니다. (잠언 12:18) 당신이 사랑하거나 신뢰하던 사람에게 받은 학대가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과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를 완전히 피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우리에게 해를 입히도록 허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개심을 키우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해를 줄 뿐입니다.
3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데—“일흔일곱 번까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분명히 그분의 가르침은 결코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이며, 여호와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48:17; 요한 7:16, 17) 논리적으로 볼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지를 토의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용서가 무엇이 아닌지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을 범할 때 용서하는 우리의 역량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4.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그러나 용서는 어떻게 정의됩니까?
4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과오를 용서한다는 것이 우리가 그들이 한 일을 용인하거나 과소 평가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른 사람이 우리를 부당하게 이용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아무튼,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의 죄를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 분명히 아니며, 죄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자비를 짓밟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히브리 10:29) 「성경 통찰」(Insight on the Scriptures)에 의하면, 용서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사해 주고, 그가 지은 과오 때문에 그에 대해 품은 적개심을 그치고, 보상 요구를 모두 철회하는 행동”으로 정의됩니다. (제1권 861면)b 성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건전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
5.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무슨 중요한 이유가 에베소 5:1에 지적되어 있습니까?
5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에베소 5:1에 이렇게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떤 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그 표현을 그 앞 구절과 연결시킵니다. 앞 구절은 이러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기꺼이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 (에베소 4:32) 그렇습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똑같이 되려고 애쓰는 어린 소년처럼, 우리는 여호와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자녀들로서 즐겨 용서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이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다가 땅에 있는 자신의 자녀들이 서로 용서하는 일을 통해 자신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을 보시면, 그분은 참으로 마음이 기쁘실 것입니다!—누가 6:35, 36; 비교 마태 5:44-48.
6. 여호와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는 어떤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까?
6 우리가 결코 여호와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같은 온전한 의미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우리가 더욱더 서로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55:7-9) 우리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할 때, 흔히 우리는 조만간 그들이 우리를 용서해 줌으로 우리가 베푼 호의를 돌려받을 필요가 생길지 모른다는 점을 의식하게 됩니다. 인간과 관련해서는, 항상 죄인이 죄인을 용서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호와와 관련해서 용서는 언제나 한쪽에서만 베푸는 것이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우리는 결코 그분을 용서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는 여호와께서 그처럼 사랑이 많으시게도 온전히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죄 많은 인간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마태 6:12.
7. 우리가 자비를 베풀 근거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7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자비를 베풀 근거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용서할 것을 요구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용서할 것을 기대하기도 하십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용서하는 동기 가운데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혹은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마태 6:14; 마가 11:25; 에베소 4:32; 요한 첫째 4:11)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건전한 이유가 있는데도 용서하기를 꺼린다면, 우리는 과연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그러한 용서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마태 18:21-35.
8. 용서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치십니다. (열왕 상 8:36) 그분이 우리에게 서로 용서하라고 교훈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참으로 우리의 최상의 유익을 마음에 두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진노에 맡겨 두십시오”라고 말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 12:19) 적개심은 살면서 지고 다니기에는 무거운 짐입니다. 우리가 적개심을 품으면, 적개심은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앗아 가며, 우리의 기쁨을 가로막습니다. 질투심과 같은 오래 지속되는 분노는 우리의 신체적 건강에도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잠언 14:30, 「신세」 참조) 게다가 우리가 그 모든 일을 겪고 있는 동안, 잘못을 범한 사람은 우리가 겪는 그러한 혼란을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용서하라는 성서의 교훈은, 진실로 ‘행해야 할 선한 길’입니다.
‘계속 서로 참으십시오’
9, 10. (ㄱ) 어떤 경우에 반드시 격식을 갖춘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ㄴ) ‘계속 서로 참으십시오’라는 표현은 무엇을 암시합니까?
9 신체적인 손상에는 사소한 상처에서부터 깊은 상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모든 상처에 동일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손상을 입은 감정도 그와 비슷한데, 어떤 상처는 다른 상처보다 더 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겪는 사소한 잘못들을 일일이 다 문제삼을 필요가 과연 있습니까? 살다 보면 화가 나거나 무시당하거나 짜증이 나는 사소한 일들을 겪게 마련이며, 그런 사소한 일들에 반드시 격식을 갖춘 용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소한 일로 실망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그들이 사과를 해야만 비로소 그들을 예의 바르게 대해 주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도록 혹은 우리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도록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0 그보다는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빌립보 4:5, 「필립스역」) 어깨를 맞대고 함께 섬기는 불완전한 피조물들로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형제들이 말하자면, 우리와 어깨를 부딪쳐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으며 우리 역시 그들에게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골로새 3:13은 우리에게 ‘계속 서로 참으십시오’라고 권합니다. 이 표현은 다른 사람에게 참을성을 나타낼 것과 우리를 불쾌하게 하는 행동이나 우리를 화나게 할지 모르는 특성들을 관용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한 참을성과 관용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면서 겪는 사소한 상처나 손상에—회중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일 없이—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고린도 첫째 16:14.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11.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 그들을 용서하는 데 무엇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1 하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지어서 적지 않은 상처를 준다면 어떠합니까? 그 죄가 너무 심각한 것이 아니라면, ‘기꺼이 서로 용서’하라는 성서의 교훈을 적용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에베소 4:32) 그처럼 기꺼이 용서하는 것은 베드로의 이러한 영감받은 말씀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첫째 4:8) 우리 역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너그럽게 봐 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용서할 때, 우리는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적개심을 풀게 됩니다. 그 결과 잘못을 범한 사람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지속적인 해도 받지 않을 것이며, 또한 우리는 회중의 귀중한 평화를 보존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로마 14:19) 때가 되면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한 기억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12. (ㄱ)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솔선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을지 모릅니까? (ㄴ) 에베소 4:26의 말씀은 우리가 신속하게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어떻게 지적합니까?
12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좀더 심각한 죄를 지어서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면 어떠합니까? 예를 들어, 신뢰하던 친구가 당신이 그에게 털어놓았던 극히 사적인 어떤 문제를 누설하였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감정이 몹시 상하고 당혹감과 배신감을 느낍니다. 당신은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그 문제가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당신은 어느 정도의 솔선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며, 아마 잘못을 범한 사람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기 전에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격분하더라도 [분노를 품거나 분노에 따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죄를 짓지 마십시오. 성난 상태로 해가 지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에베소 4:26)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몰이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표였다는 사실은, 바울의 말에 의미를 더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권고는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마태 5:23, 24.
13.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접근할 때, 무엇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무슨 제안들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까?
13 당신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합니까? “평화를 찾아 그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베드로 첫째 3:11은 말합니다. 따라서 당신의 목적은 분노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형제와 평화를 이루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친 말이나 몸짓을 피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한 말이나 몸짓은 상대방에게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잠언 15:18; 29:11) 그에 더하여, “항상 ··· 했어!” 혹은 “한 번도 ··· 없어!”와 같은 과장된 표현은 피하십시오. 그러한 과장된 표현은 그 사람을 방어적이 되게 만들 뿐입니다. 그보다는, 목소리의 음색과 얼굴 표정으로 당신이 깊은 상처를 받은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는 것을 전달하도록 하십시오. 있었던 일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십시오. 상대방에게 자신이 한 행동을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야고보 1:19) 그렇게 할 때 무슨 유익이 있을 것입니까? 잠언 19:11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상대방의 감정과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러한 상황에 접근하고 또 그러한 태도를 유지할 때, 필시 어떤 오해도 깨끗이 풀려서 적절한 사과를 받고 용서를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14.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어떤 의미에서 잊어야 합니까?
14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가 있었던 일을 실제로 잊어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앞 기사에서 토의한 바와 같이, 이 점과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보이신 모범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서에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잊으신다고 말할 경우,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생각해 낼 수 없으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 43:25)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은 일단 용서하시고 나면 나중에 언젠가 우리에게 그 죄를 다시 추궁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에서 잊으십니다. (에스겔 33:14-16) 그와 마찬가지로, 동료 인간들을 용서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그들이 한 일을 생각해 낼 수 없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나중에 그 일을 다시 추궁하거나 들추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우리도 잊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잘못을 범한 사람을 완전히 피하면서 마치 제명된 사람처럼 대하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잠언 17:9) 사실, 그 사람과 우리의 관계가 치유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이전과 같은 친밀함은 누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사랑하며,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비교 누가 17:3.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때
15, 16. (ㄱ)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용서할 것이 요구됩니까? (ㄴ) 우리는 시편 37:8에 나오는 성서의 충고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15 그런데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짓고 너무나 큰 상처를 주고 난 후에, 잘못을 범한 사람 쪽에서 여전히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며 사과하지도 않는 경우라면 어떠합니까? (잠언 28:13) 성경은 여호와께서 회개하지 않는 완고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으심을 명백히 알려 줍니다. (히브리 6:4-6; 10:26, 27)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성경 통찰」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거듭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할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한 자들은 하느님의 적이 된다.” (제1권 862면) 극도로 불공정하거나 혐오스럽거나 악독한 취급을 받은 피해자가 된 그리스도인이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억지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즉 억지로 그의 잘못을 사해 주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시 139:21, 22.
16 이해할 만하게도, 잔인한 학대의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고통과 분노를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노와 적개심을 품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해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결코 얻어내지 못할 시인이나 사과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점점 더 감정이 상할 뿐입니다. 그러한 불공정한 일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리 속에서 그러한 분노가 계속 끓어오르게 되어 우리의 영적, 감정적, 신체적 건강에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우리에게 해를 입힌 그 사람이 계속 우리에게 해를 입히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현명하게도 성서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충고합니다. (시 37:8) 그러므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때가 되자—자신들에게 있었던 일을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음으로—적개심을 품기를 그친다는 의미에서 용서하기로 결정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의의 하느님의 손에 문제를 온전히 맡김으로, 그들은 깊은 안도감을 경험하였으며 원만하게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시 37:28.
17. 계시 21:4에 기록되어 있는 여호와의 약속은 위로가 되는 무슨 보증을 해줍니까?
17 상처가 매우 깊을 경우,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서 그 상처를 완전히 지우지 못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현 사물의 제도에서는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신세계를 약속하시는데, 신세계의 상태는 이러할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계시 21:4) 우리가 그 때 무엇을 기억할 수 있든지 간에 그러한 기억이 현재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를지 모르는 깊은 상처나 고통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이사야 65:17, 18.
18. (ㄱ)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대하면서 용서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용서하고 또 잊을 수 있습니까? (ㄷ)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18 그 때가 도래할 때까지, 우리는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들인 형제 자매들로서 함께 생활하고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지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 실망하고 서로에게 해를 입히기까지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임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태 18:22) 우리가 여호와께서 용서하시는 것만큼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이 우리에게 죄를 짓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적개심을 극복한다는 의미에서 용서할 수 있으며 앞으로 영원히 그들에게 그 문제를 다시 추궁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용서하고 또 잊을 때, 우리는 회중의 평화를 보존하는 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신과 마음의 평화도 보존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하느님 여호와께서만 베푸실 수 있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빌립보 4:7.
[각주]
a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의하면, 한 라비 전통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할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용서를 받으나 네 번째는 용서받지 못한다.” (요마 86b) 이러한 견해는 부분적으로는 아모스 1:3; 2:6과 욥기 33:29과 같은 성구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b 뉴욕 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복습 질문
◻ 우리는 왜 기꺼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까?
◻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계속 서로 참”을 필요가 있습니까?
◻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는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어떤 의미에서 잊어야 합니까?
[16면 삽화]
우리가 적개심을 품고 있는 동안, 잘못을 범한 사람은 우리가 겪는 혼란을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다
[17면 삽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접근할 때, 쉽게 오해가 풀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