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서로 세워 주시오
“여러분의 입에서 부패한 말이 아니라 무엇이든 ··· 세워 주는 선한 말이 나오게 하[십시오.]”—에베소 4:29, 「신세」.
1, 2. (ㄱ) 언어 능력이 경이로운 것이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의 혀를 사용하는 방법에 관해 조심하게 하는 무슨 말이 적절합니까?
“언어 능력은 벗과 가족과 사회를 결속시키는 불가사의한 실이다 ··· 인간의 정신 그리고 [혀의] 일련의 근육 수축 협동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 시기, 존경을—사실상 어떤 인간 감정이든—불러일으키는 음을 낸다.”—「청각, 미각, 후각」(Hearing, Taste and Smell).
2 우리의 혀는 삼키거나 맛을 보는 기관 이상의 훨씬 더 중요한 기관입니다. 혀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에 참여하는 우리의 능력의 일부입니다. ‘혀는 작은 지체’라고 하면서 야고보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여호와”, 「신세」]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느니라.]” (야고보 3:5, 9) 그렇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방법으로, 이를테면 여호와를 찬양하는 데 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해를 입히는 말이나 부정적인 말을 하는 데 혀를 사용하기가 쉽습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썼습니다.—야고보 3:10.
3. 우리의 말의 무슨 두 가지 부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3 혀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확실히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부패한 말이 아니라 무엇이든 필요에 따라 세워 주는 선한 말이 나오게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것을 나누어 주십시오.” (에베소 4:29, 「신세」) 이 명령에는 두 가지 부면이 있음에 유의하십시오. 즉 우리가 피하려고 노력해야 할 말이 있고 애써 하려고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부면을 모두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부패한 말을 피함
4, 5. (ㄱ) 그리스도인들은 상스러운 말과 관련하여 무슨 싸움을 합니까? (ㄴ) 무슨 모습이 “부패한 말”이라는 표현에 적절할 수 있습니까?
4 에베소서 4:29은 먼저 ‘여러분의 입에서 부패한 말이 나오지 않게 하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그것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모독적인 말이 우리 주위 세상에 너무나 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청소년은 매일 욕설을 듣습니다. 급우들은 그것이 말에 강조를 더하거나 자기들을 더 강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상스러운 말을 듣는 일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합니다. 그러한 말은 우리의 정신이나 입에 담을 여지가 없습니다.
5 바울의 경고를 실감나게 하는 것은 썩은 생선이나 과일과 관련이 있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참을성이 없고 화를 있는 대로 다 내는 사람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마침내 그 사람이 폭발적으로 화를 낼 때, 그의 입에서 썩은 생선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악취가 나는 썩은 과일이 쏟아져 나와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의 입에서 부패한 말이 나오게 한’다면 그러한 모습에 꼭 맞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6. 에베소서 4:29이 어떻게 비평적이고 부정적인 말에 적용됩니까?
6 에베소서 4:29의 또 다른 적용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평적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견해와 기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급된 모든 사람이나 장소나 사물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하는 (혹은 여러 가지 비평을 하는) 것 같은 사람 주위에 있어 본 적이 있습니까? (비교 로마 12:9; 히브리 1:9) 그런 사람의 말은 헐뜯는 것이거나 낙담케 하거나 파괴적입니다. (시 10:7; 64:2-4; 잠언 16:27; 야고보 4:11, 12) 그런 사람은 자신이 말라기가 묘사한 비평적인 사람들과 매우 닮았음을 깨닫지 못할지 모릅니다. (말라기 3:13-15) 곁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썩은 생선이나 과일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매우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7. 우리 각자는 무슨 자기 검토를 해보아야 합니까?
7 다른 사람이 끊임없이 부정적이거나 비평적인 말을 할 때 그것을 알아보기는 쉽지만, ‘나는 그와 같이 되는 경향이 있는가? 참으로 나는 그런 경향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십시오. 이따금 우리의 말의 영을 숙고해 보는 것은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주로 부정적이고 비평적입니까? 우리는 욥의 세 거짓 위안자와 같은 식의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욥 2:11; 13:4, 5; 16:2; 19:2) 언급할 긍정적인 부면을 찾는 것이 어떻습니까? 대화가 주로 비평적이라면, 대화의 방향을 세워 주는 일들로 돌려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8. 말라기 3:16은 말과 관련하여 무슨 교훈을 알려 주며, 우리는 그 교훈을 적용하고 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8 말라기는 이러한 대조가 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하나님께서 세워 주는 말에 참으로 반응을 보이신다는 데 유의하였습니까? 그러한 대화는 동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겠습니까? 우리는 일상적인 말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대화가 ‘하나님께 대한 찬미의 제사’를 반영한다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히브리 13:15.
다른 사람을 세워 주려고 노력하라
9. 그리스도인 집회는 왜 다른 사람을 세워 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입니까?
9 회중 집회는 “무엇이든 필요에 따라 세워 주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것을 나누어” 줄 훌륭한 기회입니다. (에베소 4:29, 「신세」) 우리는 성서 지식에 관한 연설을 하거나 실연에 참여하거나 문답식 프로중에 해설할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잠언 20:15의 “지혜로운 입술이 더욱 귀한 보배”라는 말씀이 참됨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세워 줄지 누가 압니까?
10. 우리가 보통 누구와 대화해 왔는지를 숙고해 본 후에, 무슨 조정이 필요할지 모릅니까? (고린도 후 6:12, 13)
10 집회 전후의 시간은 듣는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대화로 다른 사람을 세워 주기 좋은 때입니다. 우리가 편안함을 느끼는 친척이나 소수의 벗들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그런 시간을 보내기는 쉬울 것입니다. (요한 13:23; 19:26) 그러나 에베소서 4:29과 일치하게, 함께 이야기를 나눌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어떻습니까? (비교 누가 14:12-14) 우리는 어떤 새로운 사람들이나 나이 든 분들 혹은 어린 사람들에게 단지 형식적이거나 지나가는 인사말 이상의 말을 하기로 사전에 결심할 수 있으며, 심지어 좀더 어린이들과 같은 수준이 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관심을 보이고 세워 주는 말을 하는 시간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시편 122:1에 나오는 다윗의 심정을 더욱더 공감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11. (ㄱ) 많은 사람들은 앉는 자리와 관련하여 무슨 습관을 발전시켜 왔습니까? (ㄴ) 일부 사람들은 왜 앉는 자리를 의도적으로 다양하게 합니까?
11 세워 주는 대화에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것은 집회에서 앉는 자리를 다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젖먹이가 있는 어머니는 휴게실에서 가까운 곳에, 혹은 병약한 사람은 통로 쪽 좌석에 앉을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단순히 습관적으로 우리는 특정한 좌석이나 장소로 갈지 모르며, 심지어 새가 본능적으로 둥지로 돌아가듯 그렇게 할지 모릅니다. (이사야 1:3; 마태 8:20)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어디에나 앉을 수 있으므로, 앉는 자리를—우측, 좌측, 앞쪽 가까이 등으로—다양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 잘 친숙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 어떤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앉는 자리를 다양하게 하는 장로들과 그 외 장성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의 친밀한 벗들에게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로운 것을 나누어주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방법으로 세워 주라
12. 무슨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이 전 역사에 걸쳐 분명히 나타났습니까?
12 다른 사람을 세워 주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욕망은,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들려는 인간적 경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점에서 하나님을 본받도록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a 불완전한 인간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스리려는 경향을 오랫동안 나타내 왔으며, 하나님의 일부 종들까지도 이러한 경향에 굴복하였습니다. (창세 3:16; 전도 8:9) 예수 시대에 유대 지도자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에게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 23:4) 그들은 무해한 관습을 강제성을 띤 전통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규칙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하나님께서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들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들이 많은 비성경적 규칙을 만든 것은 아무도 세워 주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방법은 결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마태 23:23, 24; 마가 7:1-13.
13.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많은 규칙을 고안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고착하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하지만 심지어 우리도 여러 가지 짐스러운 규칙들을 만드는 경향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이유는 취향이나 기호가 다르기 때문이며,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고 감정적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적 장성을 향한 진보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규칙을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이 장성을 향해 발전하도록 돕는 경건한 방법입니까? (빌립보 3:15; 디모데 전 1:19; 히브리 5:14) 어떤 사람이 극단적이거나 위험해 보이는 행로를 실제로 추구하고 있을 때라도, 금지하는 규칙이 최상의 해결책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잘못을 범한 사람과 온유하게 추리함으로써 그 사람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갈라디아 6:1.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법들은 무슨 목적에 기여하였습니까?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사용하시는 동안 성전 숭배, 희생, 심지어 위생에 관해 수백 가지 법을 정하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별된 민족을 위해 적절한 일이었으며, 많은 법에는 예언적 의미가 있었고 그러한 법은 유대인들을 메시야에게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라디아 3:19, 23-25) 율법이 형주에서 파기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생활의 대부분의 부면에 대한 광범위한 목록의 규칙을, 마치 그러한 규칙이 그들을 믿음 안에서 계속 세워 주는 방법인 것처럼 주시지 않았습니다.
15.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숭배자들을 위해 무슨 인도를 베풀어 오셨습니까?
15 물론, 우리에게 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 음행과 간음, 그리고 피의 오용을 멀리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분은 살인, 거짓말, 영매술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죄들을 구체적으로 금하십니다. (사도 15:28, 29; 고린도 전 6:9, 10; 계시 21:8)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베푸십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크게 우리는 성서 원칙들을 배우고 적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장로들은 다른 사람들이 단지 규칙을 찾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칙들을 발견하여 고려하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을 세워 줄 수 있습니다.
세워 주는 장로들
16, 17. 사도들은 동료 숭배자들을 위한 규칙을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무슨 훌륭한 본을 세웠습니까?
16 바울은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편지하였습니다. (빌립보 3:16) 그러한 경건한 견해와 일치하게,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 주는 방법으로 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우상 신전에서 나온 것일지 모를 고기를 먹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 장로는 아마도 일관성이나 단일성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초기 회중들을 위한 어떤 규칙을 정하였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성을 향한 지식과 발전의 다양성이 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훌륭한 본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로마 14:1-4; 고린도 전 8:4-13.
17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은 사도들이 옷차림과 몸단장과 같은 일부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해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였지만 각 경우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규칙들에 의존하지 않았음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오늘날, 양 떼를 세워 주는 데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 훌륭한 본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따르셨던,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방법의 연장입니다.
18. 여호와께서는 의복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에게 무슨 규칙을 주셨습니까?
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옷차림에 관한 세밀한 법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여성의 옷이 수를 놓거나 더 다채로운 것이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남녀는 비슷한 외투 혹은 겉옷을 사용하였습니다. 남녀 모두는 또한 사딘 즉 속옷을 입었습니다. (사사 14:12, 「신세」 참조; 잠언 31:24, 「신세」 참조; 이사야 3:23, 「신세」 참조) 옷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슨 법을 주셨습니까? 남자도 여자도 동성애 목적임이 분명한, 이성으로 보이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 22:5) 주변 나라들과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이스라엘인들은 옷단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단의 술에 더해야 하였으며, 외투 네 귀에는 아마도 장식 술을 달았을 것입니다. (민수 15:38-41) 기본적으로 이것이 옷 입는 방식에 관해 율법에서 지시한 것 전부입니다.
19, 20. (ㄱ)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옷차림과 몸단장에 관해 무슨 지시를 합니까? (ㄴ) 장로들은 개인 외모에 관한 규칙을 만드는 일에 관해 무슨 견해를 가져야 합니까?
19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옷차림이나 몸단장에 관해, 성서에 나오는 다른 세부적인 규칙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원칙들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겸허와 건전한 정신으로”, 「신세」]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라.]” (디모데 전 2:9) 그리스도인 여자들은 몸단장에 주의를 집중할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마음에 숨은 사람’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베드로는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베드로 전 3:3, 4) 그러한 교훈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1세기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옷차림과 몸단장에서 좀더 겸허하고 절제할 필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어떤 스타일을 요구하지—혹은 금하지—않고, 단지 세워 주는 조언을 하였습니다.
20 여호와의 증인은 겸허한 외모로 존경받아야 하며 또 일반적으로 그런 존경을 받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스타일은 나라마다 다양하며 심지어 같은 지역이나 한 회중 내에서도 다양합니다. 물론, 옷차림과 몸단장에 대한 강한 견해나 특정한 취향이 있는 장로는 그에 따라 자신과 가족을 위해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 떼와 관련해서, 그는 바울이 지적한 이러한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고린도 후 1:24) 그렇습니다. 회중을 위한 규칙을 세우려는 어떤 충동도 물리치는 장로들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세워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21. 옷차림이 극단으로 흐르는 사람이 있을 경우 장로들은 어떻게 세워 주는 도움을 베풀 수 있습니까?
21 제1세기처럼, 때때로 새로운 혹은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 옷차림에서 혹은 화장이나 보석류의 사용에서 의심스럽거나 현명하지 못한 행로를 따를지 모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다시, 갈라디아서 6:1은 진심으로 돕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장로들에게 지침을 제시합니다. 장로는 교훈을 베풀기로 결정하기 전에, 동료 장로와 지혜롭게 상의할 수 있으며, 가급적이면 취향이나 사고 방식이 자신과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장로에게 가지 않아야 합니다. 옷차림이나 몸단장의 세상적 추세가 회중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을 경우, 장로의 회는 도움을 베푸는 최상의 방법을, 이를테면 집회에서 친절하고 세워 주는 프로로 할 것인지 혹은 개인적 도움을 베풀 것인지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언 24:6; 27:17) 장로들의 목표는 고린도 후서 6:3에 반영된 이러한 견해를 갖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직책[“봉사의 직무”, 「신세」]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려 하노라.]”
22. (ㄱ) 사소한 견해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왜 기분 나빠해서는 안 됩니까? (ㄴ) 바울은 무슨 훌륭한 본을 보여 주었습니까?
22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베드로가 약술한 대로 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즉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 전 5:2, 3) 장로들이 사랑의 봉사를 하는 중에, 기호가 다를 수 있는 문제들에 관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파수대」 연구중에 일어서서 항을 낭독하는 것이 지방적 관습일지 모릅니다. 야외 봉사를 위한 집단 마련과 봉사의 직무 자체에 관한 그 외 여러 가지 세부점들은 그 지방 관습에 따라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다소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재난이 될 것입니까? 인자한 감독자들은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기적의 선물에 관해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문맥을 보면 바울의 주된 관심이 “교회[“회중”, 「신세」]의 덕 세우”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 14:12, 40) 바울은 마치 절대적인 획일성이나 완벽한 능률이 그의 주된 목표인 것처럼, 끝없이 많은 규칙을 만들려는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고린도 후 10:8.
23.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데 있어서 바울을 본받을 수 있는 면들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23 의심할 바 없이 바울은 적극적이고 격려적인 말로 다른 사람을 세워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적은 범위의 벗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형제 자매들,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과 특별히 세워 줄 필요가 있는 사람들 모두를 방문하기 위해 가외의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규칙들이 아니라—사랑을 강조하였는데,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 8:1.
[각주]
a 가정 내의 여러 가지 규칙은 상황에 따라 바람직해 보일 수 있다. 성서는 부모에게 미성년 자녀를 위한 문제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한다.—출애굽 20:12; 잠언 6:20; 에베소 6:1-3.
복습을 위한 요점
◻ 우리가 부정적인 혹은 비평적인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면 왜 바꾸는 것이 적절합니까?
◻ 우리는 회중에서 세워 주는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규칙을 만드는 것에 대한 경건한 본은 무엇입니까?
◻ 장로들이 양 떼를 위한 인간 규칙을 만들지 않도록 무엇이 도움이 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