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repentance)
동사 “회개하다”는 “후회함으로 인해 혹은 만족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전의(혹은 이제 하려고 하는) 행동이나 행실에 관한 생각을 바꾸다” 혹은 “자기가 한 일 또는 자기가 하지 못한 일로 인해 후회하다, 뉘우치다, 가책을 느끼다”를 의미한다. 많은 구절들에서 히브리어 나함의 개념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함의 의미로는 “후회하다, 애도하는 기간을 지키다, 회개하다”(출 13:17; 창 38:12; 욥 42:6) 그리고 “자신을 위로하다”(삼둘 13:39; 겔 5:13), “(적에 대한 원한 등을) 풀다”(사 1:24) 등이 있다. 후회가 되었든 위로가 되었든 생각이나 감정이 바뀌는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어에는 회개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동사가 메타노에오와 메타멜로마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나중에”를 의미하는 메타와 “지각하다, 분별하다, 정신으로 간파하다, 혹은 의식하다”를 의미하는 노에오(정신, 성향 혹은 도덕 의식을 가리키는 누스와 관련된 단어)로 구성된 말이다. 따라서 메타노에오는 문자적으로는 (사전에 아는 것과 대조되는 말로서) 나중에 아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며, 생각, 태도 혹은 목적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한편 메타멜로마이의 어근인 멜로는 “돌보다 혹은 관심을 쏟다”를 의미한다. 접두사 메타(나중에)가 붙으면서 그 동사는 ‘뉘우치다, 후회하다’(마 21:29; 고둘 7:8), 혹은 ‘회개하다’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메타노에오는 견해 혹은 성향이 바뀌는 것, 이전의 혹은 이제 시작하려는 행로나 행동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배척한다는 것이 주 사상이고(계 2:5; 3:3), 메타멜로마이는 당사자의 후회하는 감정에 역점을 둔 말이다. (마 21:29) 「신약 성서 신학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 키텔 편, 4권, 629면)에서는 이렇게 해설한다. “그러므로 신약에는 [이 용어들]의 의미가 구분되어 있어서 두 가지 개념의 바뀔 수 없는 본질을 명확히 의식하였음이 나타나 있다. 그와는 달리 그리스어 문화권에서 사용된 용례에 따르면 두 단어가 경계 구별 없이 혼용된 사례가 흔하다.”—G. 브로밀리 역, 1969년.
물론 견해가 바뀌면서 감정도 바뀌는 경우도 흔히 있고 후회하는 감정이 먼저 생기고 뒤이어 견해나 생각이 확정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삼첫 24:5-7) 그러므로 두 용어는 각기 독특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죄에 대한 인간의 회개 회개할 필요가 생기는 것은 죄, 즉 하느님의 의로운 요구 조건에 달하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요첫 5:17) 모든 인류가 아담에 의해 죄에 팔렸기 때문에 그의 후손은 누구나 회개할 필요가 있다. (시 51:5; 로 3:23; 5:12) 화해 항목에서 알려 주듯이, 회개(그리고 그에 뒤이은 전환)는 사람이 하느님과 화해하는 데 있어서 선결 조건이다.
회개는 자신의 전체 인생 행로—하느님의 목적과 뜻에 반대되고 오히려 하느님의 적대자가 지배하는 세상에 부합되었던 행로—에 관한 것일 수 있다. (베첫 4:3; 요첫 2:15-17; 5:19) 또 회개는 생활의 특정한 부면에 관한 것, 즉 특정한 그릇된 행습이 없었더라면 용납할 만한 행로가 그 행습으로 더럽혀지거나 얼룩진 것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단 한 번의 그릇된 행동 또는 심지어 그릇된 경향이나 성향이나 태도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시 141:3, 4; 잠 6:16-19; 야 2:9; 4:13-17; 요첫 2:1) 그러므로 허물의 범위가 매우 넓을 수도 있고 상당히 구체적일 수도 있다.
그와 비슷하게, 의에서 벗어난 정도가 심할 수도 있고 경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뉘우침의 정도도 벗어난 정도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 “심하게 거역”하였고 그들의 범법으로 인해 “썩어 없어지고” 있었다. (사 31:6; 64:5, 6; 겔 33:10) 반면에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잘못 내디딜” 수 있음을 말하면서 영적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사람을 온화한 영으로 바로잡으려고” 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갈 6:1)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종들의 육적인 약함을 참작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므로, 그들은 유전받은 불완전성으로 인한 잘못들로 인해 끊임없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시 103:8-14; 130:3) 하느님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면 기쁨을 누릴 수 있다.—빌 4:4-6; 요첫 3:19-22.
이미 하느님과 은혜로운 관계를 누리던 사람이 그만 곁길로 벗어나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잃게 되어서 회개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베첫 2:25)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었다. (신 7:6; 출 19:5, 6)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께서 중개하신 새 계약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갖게 된 사람들이었다. (고첫 11:25; 베첫 2:9, 10) 그런 사람 중에 곁길로 벗어났다가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그 관계로 말미암은 유익과 축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렘 15:19-21; 야 4:8-10) 이전에는 하느님과 그런 관계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 이를테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이 시행되던 시대에 비이스라엘 나라에 속한 이교 백성들(엡 2:11, 12), 그리고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인 회중 밖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올바른 신분을 갖도록 받아들여져서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갖게 되는 데에는 회개가 첫째가는 필수적인 단계이다.—행 11:18; 17:30; 20:21.
회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할 수도 있지만 집단적인 차원에서 할 수도 있다. 일례로, 요나가 전파 활동을 하자 니네베 온 도시가 왕으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회개하였다. 하느님이 보실 때 그들 모두가 악행에 참여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욘 3:5-9. 렘 18:7, 8 비교) 귀환한 이스라엘인들의 총회중은 에스라가 상기시켜 주는 바에 자극을 받아 하느님 앞에서 공동체로서 죄를 지었음을 시인하면서 대표자들인 방백들을 통해 회개를 나타냈다. (라 10:7-14. 대둘 29:1, 10; 30:1-15; 31:1, 2 비교) 고린도 회중은 자기들 가운데 심한 악행을 범하는 자를 내버려 둔 것에 대해 회개한다는 것을 나타냈다. (고둘 7:8-11; 고첫 5:1-5 비교) 심지어 예레미야와 다니엘 같은 예언자들도 유다를 패망으로 몰고 간 유다의 악행을 고백할 때 자신들을 그 죄에서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았다.—애 3:40-42; 단 9:4, 5.
어떻게 해야 참다운 회개인가 회개에는 정신과 마음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 행로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느님의 표준과 뜻이 의로운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회개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분의 뜻과 표준을 모르거나 잊는 것이다. (왕둘 22:10, 11, 18, 19; 욘 1:1, 2; 4:11; 로 10:2, 3) 그렇기 때문에 자비로우신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들과 전파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셨다. (렘 7:13; 25:4-6; 막 1:14, 15; 6:12; 누 24:27) 그리스도인 회중을 통해 좋은 소식을 공포하심으로써, 그리고 특히 고넬료가 전환한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모두 어디서나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행 17:22, 23, 29-31; 13:38, 39) 하느님의 말씀은—기록된 말씀이든 구두로 하시는 말씀이든—그들을 ‘설득하여’ 하느님의 길이 옳고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납득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누 16:30, 31; 고첫 14:24, 25; 히 4:12, 13 비교) 하느님의 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회복”시켜 준다.—시 19:7.
다윗 왕은 ‘범법자들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그분에게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하였는데(시 51:13), 이들 죄인들이란 동족인 이스라엘인들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디모데는 회중에서 자기가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싸우지 말고 “호의적인 성향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교훈해야” 한다는 교훈을 들었는데,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주셔서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게 하실지도 모르고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디둘 2:23-26)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촉구는 하느님의 백성의 회중 내에서 행해지기도 하고 회중 밖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당사자는 자기가 하느님에게 죄를 지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시 51:3, 4; 렘 3:25) 노골적이거나 직접적인 신성모독, 소리 내어 하느님의 이름을 오용하는 것, 혹은 우상 등을 사용하여 다른 신을 숭배하는 것이 관련될 경우에는 그 점이 매우 자명할 것이다. (출 20:2-7) 그러나 당사자가 “사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것일 경우나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의 일이라고 여길 경우에도 저지른 잘못이 실은 하느님에 대해 죄를 지은 것으로 여호와를 업신여긴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삼둘 12:7-14; 시 51:4; 누 15:21 비교) 무지해서 혹은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로 인해 주권을 가진 통치자 여호와 하느님 앞에 죄과가 있게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레 5:17-19; 시 51:5, 6; 119:67; 디첫 1:13-16 비교.
예언자들의 일은 주로 이스라엘에게 죄가 있음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는데(사 58:1, 2; 미 3:8-11), 그 죄가 우상 숭배이든(겔 14:6), 불공정 행위나 이웃 사람을 압제한 일이든(렘 34:14-16; 사 1:16, 17), 부도덕이든(렘 5:7-9), 여호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고 그 대신 인간과 나라들의 군대의 힘에 의지한 죄이든(삼첫 12:19-21; 렘 2:35-37; 호 12:6; 14:1-3) 예언자들은 그 일을 하였다. 침례자 요한의 소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마 3:1, 2, 7, 8; 4:17) 요한과 예수는 백성들과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독선이라는 겉옷을, 인간이 세운 전통을 준수하는 데 매여서 위선으로 가득한 겉옷을 벗겨 냄으로 그 나라의 죄 많은 상태가 드러나게 하였다.—누 3:7, 8; 마 15:1-9; 23:1-39; 요 8:31-47; 9:40, 41.
마음으로 깨달음 그러므로 회개를 위해서는 우선,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로 이해력을 가지고 듣고 보는 일이 있어야 한다. (사 6:9, 10; 마 13:13-15; 행 28:26, 27 비교) 회개하는 사람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을 정신으로 감지하여 파악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으로, “마음으로 깨닫”는다. (마 13:15; 요 12:40; 행 28:27) 그러므로 자기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이성적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마음으로도 인식해야 한다. 이미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그분과 그분의 계명에 대한 그런 지식을 ‘마음에 되새기게’ 되어(신 4:39. 잠 24:32; 사 44:18-20 비교) “정신을 차리”면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첫 8:47) 올바른 마음의 동기가 있을 때 그들은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하느님의 선하고 받아들이실 만하고 완전한 뜻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로 12:2.
마음으로부터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릇된 행로에 대해 진실하게 뉘우치고 슬퍼할 것이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올바로 인식하게 된 범법자라면 그분의 이름에 모욕을 돌린 것에 대해 깊이 참회하게 될 것이다. (욥 42:1-6 비교)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것, 나쁜 본을 세운 것, 아마도 외부인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백성의 평판을 더럽힌 것에 대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제 하느님의 이름을 영예롭게 하고 이웃의 복지를 위해 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용서를 구하게 된다. (왕첫 8:33, 34; 시 25:7-11; 51:11-15; 단 9:18, 19) 그들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꺾”여 “영이 억눌리고 겸손”한 사람들이 되었으며(시 34:18; 51:17; 사 57:15), “영으로 통회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떨’고 있다. (사 66:2) 실제로 그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선하심 앞으로 떨면서 나”온다. (호 3:5) 다윗이 인구 조사 문제에 있어서 어리석게 행동하였을 때 그의 “마음이 그를 치기 시작하였다.”—삼둘 24:10.
그러므로 나쁜 행로를 확실하게 거부하고 그것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며 혐오해야 한다. (시 97:10; 101:3; 119:104; 로 12:9. 히 1:9; 유 23 비교) 왜냐하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이 악에는 자기를 높이는 일과 교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이 포함된다. (잠 8:13; 4:24) 그와 더불어 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제부터 의로운 행로에 고착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악을 미워하는 마음과 의를 사랑하는 마음 두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회개를 하고 뒤이어 참된 전환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생길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여호와께서 분노를 표현하시자 르호보암 왕은 자신을 낮추었지만, 나중에 르호보암은 “여호와를 찾기로 마음을 굳히지 않았으므로, 악한 일을 행하였다.”—대둘 12:12-14. 호 6:4-6 비교.
세상의 슬픔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그가 첫째 편지에서 그들을 책망한 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을 나타낸 것에 관하여 말한다. (고둘 7:8-13) 바울은 그가 그들에게 그토록 엄한 내용의 글을 써야 했던 것과 그로 인해 그들이 고통스러워한 것으로 인해 “후회하였”(메타멜로마이)었지만 그들이 그의 꾸짖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슬퍼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이 그릇된 태도와 행로에 대해 진실한 회개(메타노이아)에 이른 것을 보고는 더는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기로 인해 그들이 느낀 고통이 그들에게 유익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이 “손상을 입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회개에 이르게 하는 슬픔에 대해 후회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로 구원의 길에 머무르게 하여 악습으로 돌아가거나 배교하지 않도록 구해 주고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슬픔을 ‘죽음을 낳는 세상의 슬픔’과 대조한다. 세상의 슬픔은 믿음 때문에 혹은 하느님과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슬픔이 아니다. 세상의 슬픔은 실패, 상심, 상실, 범행에 대한 처벌 및 치욕 때문에 생기는 슬픔으로서(잠 5:3-14, 22, 23; 25:8-10 비교), 흔히 그 결과로 비통함, 분개심, 질투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며, 그로 인해 항구적인 유익이나 발전이나 진정한 희망에 이르는 일은 없다. (잠 1:24-32; 데첫 4:13, 14 비교) 세상의 슬픔은 죄로 인한 괴로운 결과에 대해 애통해하지만 죄 자체나 그로 인해 하느님의 이름에 모욕이 돌아간 것에 대해서는 애통해하지 않는 슬픔이다.—사 65:13-15; 렘 6:13-15, 22-26; 계 18:9-11, 15, 17-19. 겔 9:4 대조.
이에 대한 실례로 카인의 경우가 있는데, 카인은 하느님이 회개하라고 촉구하신 최초의 사람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죄가 그를 이기지 못하도록 돌아서서 “선을 행하려고” 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그는 살인적인 미움을 회개하기는커녕 그 미움에 굴복하여 자기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하느님이 물으시자 그는 비뚤어진 대답을 하였고 형이 선고되자 비로소 유감의 뜻을 표현했는데, 그나마도 처벌이 무거운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한 것이지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 유감스러워한 것이 아니었다. (창 4:5-14) 그렇게 해서 그는 자기가 “악한 자에게서 나”왔음을 드러냈다.—요첫 3:12.
세상의 슬픔을 나타낸 또 다른 예로 에서가 있는데, 그는 자기 동생 야곱이 맏아들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권리는 자기가 야곱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팔아넘긴 것인데도) 그런 슬픔을 나타냈다. (창 25:29-34) 에서는 “극히 큰 소리로 비통하게” 부르짖으며 눈물로 “회개”(메타노이아)를 구하였는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을 바꾸어 주기”를 구한 것이다. (창 27:34; 히 12:17, Int) 그는 자기가 물질주의적 태도 때문에 ‘맏아들의 권리를 업신여겼던’ 것을 후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실한 것을 애석해한 것이다.—창 25:34.
유다는 예수를 배반한 다음에 ‘뉘우치고[메타멜로마이의 변화형]’,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받은 검은돈을 돌려주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목매어 자살하였다. (마 27:3-5) 그는 필시 자기가 저지른 범죄의 극악함과 아마도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공포감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히 10:26, 27, 31; 야 2:19 비교) 그는 죄책감과 절망감을 느끼며 심지어 자괴를 느끼기까지 하였지만 회개(메타노이아)로 이끄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슬픔을 나타냈다고 볼 만한 흔적은 전혀 없다. 그는 하느님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돈을 돌려주었는데, 필시 그렇게 하면 자기 범죄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 돌려주었을 것이다. (야 5:3, 4; 겔 7:19 비교) 그는 배신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데 협조한 범죄에 더해 자살이라는 범죄까지 저질렀다. 베드로의 행로는 그의 행로와 대조된다. 베드로가 주를 부인한 후에 몹시 운 것은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였기 때문이었고, 그는 그렇게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회복되었다.—마 26:75. 누 22:31, 32 비교.
그러므로 후회, 죄책감, 눈물이 반드시 진정한 회개의 척도라고 할 수 없다. 결정적인 것은 마음의 동기이다.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질책하시는 말씀을 전달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 중에 “침대에서 늘 울부짖지만, 마음으로 [그분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곡식과 단포도주 때문에 늘 빈둥거렸고 ··· 그들은 돌아오기 시작하였지만 더 높은 것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이 재앙을 겪을 때 구제해 달라고 탄식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이었으며, 그들은 구제를 받더라도 그 기회를 활용하여 하느님의 높은 표준에 더 밀접히 고착함으로 그분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하지 않았다. (사 55:8-11 비교) 그들은 과녁을 결코 맞추지 못하는 “느슨한 활”과도 같았다. (호 7:14-16. 시 78:57; 야 4:3 비교) 단식하고 울고 통곡하는 것이 적합한 일이긴 하였지만 회개하는 사람들이 그저 옷만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야 적합하다 할 수 있었다.—욜 2:12, 13. 단식; 애통, 애도 참조.
범행 고백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면서(대둘 7:13, 14; 33:10-13; 야 4:6-10), 그분의 용서를 간청한다. (마 6:12) 그런 사람은 예수의 예에 나오는 독선적인 바리새인과 같지 않고 세금 징수원과 같다. 예수께서는 세금 징수원이 가슴을 치면서 “오, 하느님, 죄인인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누 18:9-14)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분은 충실하고 의로우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요첫 1:8, 9) “자기의 범법을 덮어 가리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받는다.”—잠 28:13. 시 32:3-5; 수 7:19-26; 디첫 5:24 비교.
다니엘 9:15-19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는 진실한 고백의 모범이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에 우선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우리의 의로운 행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의 많은 자비에 따라서” 간청을 드린 것이다. 또한 비교·검토해 볼 만한 것으로 탕자의 겸손한 표현도 있다. (누 15:17-21)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손바닥과 함께 들어 올리’면서 자기 범법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다.—애 3:40-42.
죄를 서로 고백함 제자 야고보는 이렇게 교훈한다. “여러분의 죄를 서로 숨김없이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낫게 될 것입니다.” (야 5:16) 그처럼 서로 고백하라고 한 것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위해 “돕는 이[“대언자”, 「개역」]”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자신이 바친 화목 희생에 의거하여 그 역할을 담당하시고 계시다. (요첫 2:1, 2) 사실상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하느님에 대해 잘못한 것을 바로잡을 수가 없으며 필요한 속죄를 베풀 수도 없다. (시 49:7, 8)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도울 수 있다. 그리고 형제들을 위한 기도는, (죄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뿐이므로) 하느님이 공의를 시행하시는 것에 영향을 줄 수는 없어도, 죄를 지었지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과 힘을 주실 것을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 매우 가치 있는 기도이다.—기도 (기도에 대한 응답) 참조.
전환—돌아섬 회개를 특징짓는 것은 그릇된 행로를 중지하고 그 그릇된 길을 내버리며 올바른 행로를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한 경우라면 뒤이어 “개종” 혹은 전환을 하게 될 것이다. (행 15:3) 히브리어로나 그리스어로나 전환 혹은 개종과 관련된 동사들(히브리어로는 슈브, 그리스어로는 스트레포, 에피스트레포)은 단순히 “돌이키다, 돌아오다, 혹은 돌아가다”를 의미한다. (창 18:10; 잠 15:1; 렘 18:4; 요 12:40; 21:20; 행 15:36) 영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이 말은 하느님에게서 돌아서는 것(그래서 죄의 행로로 돌이켜 가는 것[민 14:43; 신 30:17])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릇된 길에서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왕첫 8:33.
전환 혹은 개종에는 단순한 태도나 구두 표현 이상의 것이 함축되어 있다. 거기에는 “회개에 알맞은 일”이 포함된다. (행 26:20; 마 3:8) 그것은 자기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여호와를 적극적으로 ‘찾는 것’이다. (신 4:29; 왕첫 8:48; 렘 29:12-14) 필연적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에 표현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신 4:30; 30:2, 8), 그분의 길과 뜻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가지고 ‘그분의 진실함에 대하여 통찰력을 보이는’ 것(단 9:13),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는’ 것(느 1:9; 신 30:10; 왕둘 23:24, 25), “사랑의 친절과 공의를 지키고” ‘하느님에게 한결같이 희망을 두는’ 것(호 12:6), 더는 종교적 형상을 사용하거나 피조물을 우상화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변함 없이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분만 섬기”는 것(삼첫 7:3; 행 14:11-15; 데첫 1:9, 10), 나라들의 길로도 걷지 않고(레 20:23) 자기 나름의 길로도 걷지 않고(사 55:6-8) 다만 그분의 길로 걷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일과 공의를 행하고 압제와 폭력을 제거하고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한, 아무리 기도하고 희생을 바치고 단식하고 신성한 축제들을 지켜도 무의미하며 하느님께 아무런 가치도 없다.—사 1:10-19; 58:3-7; 렘 18:11.
그렇게 되는 데에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필요하다. (겔 18:31) 생각과 동기와 삶의 목표가 바뀌어야 새로운 사고방식과 새로운 성향과 새로운 도덕적 힘이 생긴다. 인생 행로를 변화시키면 “참된 의와 충성 가운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성”을 입게 되는데(엡 4:17-24), 그것은 부도덕이나 탐심, 난폭한 언행 등에서 탈피한 것이다. (골 3:5-10. 호 5:4-6 대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의 영이 “샘솟게” 해 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잠 1:23. 디둘 2:25 비교.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실질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힘을 산출하고 사람으로 “돌이켜” 걷도록 고무한다. (행 3:19)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열심을 내고 회개하여라”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계 3:19. 계 2:5; 3:2, 3 비교) 진정한 회개에는 ‘매우 진지하고, 자기의 깨끗함을 밝히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두려워하고, 열망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고둘 7:10, 11) 잘못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겔 33:14, 15; 누 19:8 비교.
“새로 개종[혹은 전환]한 사람”,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공동」)이라고 표현된 그리스어(네오피토스)의 문자적 의미는 “새로 심어진” 혹은 “새로 자라난”이라는 뜻이다. (디첫 3:6) 그런 사람에게 회중에서 봉사하는 직무를 맡기는 일이 없어야 하였는데, 이것은 “교만으로 우쭐해져서, 마귀에게 내려진 심판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해야 할 “죽은 행실”이란 어떤 것들인가?
히브리 6:1, 2을 보면, “초보적인 교리”에는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포함되고, 또 뒤이어 침례들에 대한 가르침과 손을 얹는 일,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포함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은 행실”(그 외로는 히 9:14에만 나오는 표현)이란 필시 악행 등의 죄가 되는 행실들, 죽음으로 몰고 가는 타락한 육체의 행실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로 8:6; 갈 6:8) 그 자체가 영적으로 죽어서 헛되고 무가치한 모든 행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또 여기에 포함되는 행실로는 자기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힘쓰는 일,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및 그분의 대속 희생은 도외시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는 노력도 있다. 그러므로 유대교 지도자들과 기타 사람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킨 것은 “죽은 행실”이었는데, 거기에는 믿음이라는 필수적인 요소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 9:30-33; 10:2-4)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하느님이 세우신 “으뜸 행위자” 그리스도 예수에 걸려 넘어졌다. (행 5:31-33; 10:43; 20: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다음에는 율법이 마치 여전히 시행되는 것인 양 율법을 지키는 것도 “죽은 행실”이 되었다. (갈 2:16) 그와 유사하게, 가치 있는 일이 될 만한 일이라도 그 동기가 사랑의 동기 곧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면 “죽은 행실”이 된다. (고첫 13:1-3) 한편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밝혀진 하느님의 뜻 및 방식과 일치하게, “행동과 진실함으로” 표현되는 것이어야 한다. (요첫 3:18; 5:2, 3; 마 7:21-23; 15:6-9; 히 4:12)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죽은 행실”로 올바르게 분류된 모든 일에서 떠나 회개하고 그 후로는 그러한 행실을 피한다. 그리하여 그의 양심은 깨끗해진다.—히 9:14.
예수의 경우 외에는, 침례(물에 잠기는 일)는 회개와 관련하여 상징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느님이 정하신 마련인데, 두 부류 모두에게 즉 (하느님의 계약이 시행되는 동안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한) 유대 민족에 속한 사람들과 하느님께 신성한 봉사를 드리려고 ‘돌아선’ 이방 사람들 모두에게 그런 역할을 한다.—마 3:11; 행 2:38; 10:45-48; 13:23, 24; 19:4. 침례 참조.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는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은 두 번 멸망당하였으며 마침내 하느님에게 완전히 버림받는 나라가 되었다. 책망을 받았을 때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에게 돌아가기는커녕 “전투로 뛰어드는 말처럼, 각 사람이 인기 있는 행로로 돌아가고” 있었다. (렘 8:4-6; 왕둘 17:12-23; 대둘 36:11-21; 누 19:41-44; 마 21:33-43; 23:37, 38) 그들은 마음속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듣고 보는 것으로 이해나 지식을 얻지 못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는 “베일”이 덮여 있었다. (사 6:9, 10; 고둘 3:12-18; 4:3, 4) 그렇게 된 데에는 불충실한 종교 지도자들과 예언자들 및 거짓 여예언자들의 책임도 있었다. 그들은 백성이 악행을 저지르는 데 강해지게 하였다. (렘 23:14; 겔 13:17, 22, 23; 마 23:13, 15) 그리스도교의 예언들에서도 장차 사람들을 책망하고 그들로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하느님의 조처를 그와 유사하게 많은 사람이 배척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그 예언들에 따르면, 그들은 고통을 당하는 일들로 인해 완고해지고 격한 감정을 품게 될 뿐이어서, 사실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재앙의 근본 원인 혹은 발생 원인은 그들 자신이 하느님의 의로운 길을 버렸기 때문인데도, 하느님을 모독할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계 9:20, 21; 16:9, 11)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그들 자신에게 닥칠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로 2:5.
회개가 불가능한 자들 진리의 정확한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거듭 죄를 짓는” 자들은 회개가 불가능한 정도에 이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의 죽음이 목적한 바를 배척한 것이고 따라서 그분에게 사형을 선고한 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자기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기둥에 못박아 공개적 수치를 당하게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히 6:4-8; 10:26-29) 그러므로 이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막 3:28, 29) 그런 사람들은 “의의 길을 정확히 안 후에 자기들에게 전해진 거룩한 계명에서 돌아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 편이 나았을 것”이다.—베둘 2:20-22.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피조물이었으므로, 그리고 하느님의 명령은 명백한 것으로서 두 사람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죄는 고의적인 것이었고 어떤 인간적 약함이나 불완전함으로 인한 것이라고 핑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에 하느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는 회개하라는 권고가 들어 있지 않다. (창 3:16-24) 또한 그들을 반역으로 유도한 영적 피조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종말과 그에게 가담한 천사 피조물들의 종말은 영원한 멸망이다. (창 3:14, 15; 마 25:41) 유다는 불완전한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하느님의 아들과 친밀한 교제를 즐기며 살았으면서도 배반자가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요 17:12) 배교한 “불법의 사람”도 “멸망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데둘 2:3. 배교; 불법의 사람; 적그리스도 참조) 예수께서 왕으로서 인류를 심판하실 때 상징적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은 모두 그와 비슷하게 “영원한 끊어짐에 들어”가는데, 그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권고가 베풀어지지 않는다.—마 25:33, 41-46.
부활은 회개할 기회를 준다 그와는 달리, 예수께서는 1세기의 특정 유대인 도시들을 두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미래에 있을 심판 날에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셨다. (마 10:14, 15; 11:20-24) 이 말씀에는 그런 도시들에 살던 적어도 얼마의 사람들이 부활될 것이며, 이전에 회개하지 않던 태도 때문에 회개하기는 매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들이 겸손하게 회개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와’ 전향할 기회를 갖게 될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계 20:11-15 비교. 심판 날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나타난 것에 대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거슬러 싸운 다수의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로를 따르는 자들은 부활되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이 그들은 “게헨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마 23:13, 33; 막 3:22-30.
기둥에 달렸던 행악자 예수와 나란히 기둥에 못 박혀 있으면서 예수에게 상당한 믿음을 나타낸 행악자는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누 23:39-43. 낙원 참조) 이 약속을 통해 그 행악자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 부분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서 고려한 많은 성구들에 나타난 증거는 그런 해석과 상반된다. 그 행악자는 예수께서 무고하신 것과는 달리 자신의 범행이 그릇된 것임을 시인하기는 하였지만(누 23:41), 그가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죽어 가는 마당에 ‘돌아서서’ “회개에 알맞은 일”을 산출할 수 없었음도 명백하다. 그리고 침례도 받지 못하였다. (행 3:19; 26:20) 그러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될 때 그는 그런 행로를 따를 기회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계 20:12, 13 비교.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후회하듯이 ‘한탄하’실 수 있는가?
히브리어 나함이 후회하듯이 ‘한탄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대다수의 경우, 그것은 여호와 하느님과 관련해서 사용된 말이다. 창세기 6:6, 7에서는 “여호와께서 땅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 아파하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악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세계적인 대홍수를 통해 그들을 지면에서 쓸어 내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는 일을 하시면서 실수하셨다는 뜻으로 한탄하거나 후회하셨다는 의미일 리 없다. “그분의 활동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신 32:4, 5) 후회 혹은 한탄이란 흐뭇해하며 만족하거나 기뻐하는 것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한탄하신 것은 틀림없이, 그분이 인류를 창조해 놓으셨는데 그들의 행실이 너무나 악해져서 이제는 노아와 그의 가족만 제외하고 전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그것도 타당한 이유로 그렇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탄하신 것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 분이시다.—겔 33:11.
매클린턱과 스트롱 공편 「백과사전」(Cyclopædia)에서는 이렇게 해설한다. “하느님 자신이 회개하시는[나함, 한탄하시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분이 선을 베풀거나 재앙을 내림으로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바꾸셨다는 의미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하느님의 행동의 그런 변화는 피조물의 행동 변화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하느님이 회개하신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1894년, 8권, 1042면) 하느님의 의로운 표준은 시종일관 한결같고 안정되어 있으며 변하거나 동요되는 일이 없다. (말 3:6; 야 1:17) 상황 때문에 그 표준들에 대한 그분의 생각이 바뀌어 그 표준들에서 돌이키시거나 그것들을 버리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완전한 표준과 하느님이 그 표준을 적용하시는 것에 대한 지성 있는 피조물들의 태도와 반응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좋을 경우에는 하느님이 기뻐하시고 나쁠 경우에는 한탄하시게 된다. 더욱이 피조물은 태도가 좋다가도 나쁜 태도로 바뀔 수 있고 나쁘다가도 좋은 태도로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표준을 바꾸시는 일은 없으므로, 그들의 태도에 따라서 그분의 기쁨이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축복들이) 한탄으로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징계나 형벌로) 바뀌기도 하고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판결과 결정은 변덕스럽거나 이랬다저랬다 하여 믿음직하지 못한 일이나 오류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분에게서는 행동이 앞뒤가 다르거나 기준이 없는 경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겔 18:21-30; 33:7-20.
도공은 한 가지 유형의 그릇을 빚다가도 그 그릇이 “자기 손에 의해 망가지”면 다른 유형의 그릇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 (렘 18:3, 4) 이 예를 통해 여호와께서 설명하시는 점은 자신이 ‘자기 손으로 망가뜨릴’ 수도 있는 인간 도공과 같으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류에 대해 하느님으로서의 권한을, 사람들이 그분의 의와 자비에 대해 반응을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따라 그들을 달리 대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사 45:9; 로 9:19-21 비교) 따라서 그분은 어떤 나라 “위에 집행하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을 두고 한탄”하시거나 “그것을 위하여 베풀기로 [그분] 자신에게 말한 선에 대하여 한탄”하실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분이 그 나라를 그때까지 대하신 방식에 그 나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 (렘 18:5-10) 그러므로 위대한 도공이신 여호와께서 실수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진흙”의 마음 상태가 “변형”(형태나 구성이 변화)되어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 한탄하시게 즉 감정이 바뀌시게 되는 것이다.
그 점은 나라들의 경우만 아니라 개개인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여호와 하느님께서 사울 왕같이 의에서 돌아선 자신의 종들 몇 사람에 대해 ‘한탄한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 자체는 하느님이 그런 개개인의 미래를 예정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지, 예정 참조) 사울이 빗나간 것에 대해 하느님이 한탄하셨다고 해서 하느님이 그를 왕으로 택하신 것이 잘못된 것이었거나 그런 선택으로 인해 후회해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울이 도덕적 자유 행위자로서 하느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특권과 기회를 훌륭하게 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사울이 태도를 바꿈에 따라 하느님이 그를 대하시는 방식도 바뀌게 된 것 때문에 하느님이 한탄하신 것임에 틀림없다.—삼첫 15:10, 11, 26.
예언자 사무엘은 하느님이 사울에 대해 불리한 결정을 내리셨음을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존귀한 분께서는 거짓되지 않으실 것이며, 후회하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땅의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삼첫 15:28, 29) 땅의 사람은 자기 말대로 못 하거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일, 또 자기가 동의한 바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판을 하고 그로 인해 후회하는 일도 흔하다. 하느님께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시 132:11; 사 45:23, 24; 55:10, 11.
일례로, 대홍수 후에 하느님과 “모든 육체” 사이에 맺어진 하느님의 계약은 하느님이 온 땅을 뒤덮을 홍수를 일으키시는 일이 결코 다시는 없을 것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였다. (창 9:8-17) 그러므로 하느님이 그 계약을 변경시키거나 그 계약에 대해 ‘후회’하실 가능성은 없다. 그와 비슷하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면서 “법적 보증”이 되도록 “서약으로 개입”하셨는데, 이것은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기의 의도가 변할 수 없음을 더욱 풍부히 실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의 약속과 서약은 “하느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실증이 되었다. (히 6:13-18) 멜기세덱의 제사직과 같은 제사직을 위해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과 서약으로 맺으신 계약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었다.—히 7:20, 21; 시 110:4. 로 11:29 비교.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하시거나 계약을 맺으실 때 그분과 약속하거나 계약을 맺는 자들이 달해야 할 요구 조건들을 제시하기도 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그분의 “특별한 재산” 및 “제사장 왕국과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단 그들이 엄밀하게 그분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분과의 계약을 지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출 19:5, 6) 하느님께서는 계약의 한쪽 당사자로서 성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 계약을 반복적으로 어겼다. (말 3:6, 7. 느 9:16-19, 26-31 비교) 그러므로 하느님이 마침내 그 계약을 폐기하셨을 때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온전히 정당한 일이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책임은 전적으로 계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마 21:43; 히 8:7-9.
그와 마찬가지로, 계약을 위반한 자들이 그런 행동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를 듣고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면 그분은 “한탄”하고 “돌이키셔서” 어떤 형벌을 집행하지 않으시기도 한다. (신 13:17; 시 90:13) 그들이 그분에게 돌아왔다면 그분도 그들에게로 “돌아가”신다. (슥 8:3; 말 3:7) 이제 그분은 ‘고통’스러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신다. 그분은 죄인들을 처형하는 일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누 15:10; 겔 18:32)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운 표준에서 결코 벗어나는 일 없이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돌아오도록 도움을 베푸시며,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격려하신다. 그분은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친절하게 권하시면서 ‘그분의 손을 벌리고’ 자신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제발, ··· 돌아서서 ···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여라”, “제발,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신다. (사 65:1, 2; 렘 25:5, 6; 44:4, 5) 그분은 변화할 시간을 충분히 주시고(느 9:30. 계 2:20-23 비교) 참을성을 크게 나타내면서 감내하신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베둘 3:8, 9; 로 2:4, 5) 때때로 그분은, 친절하시게도, 자신의 소식에 강력한 일 곧 기적이 수반되게 하심으로 그 사자가 하느님께 사명을 받았음이 확증되고 듣는 사람의 믿음이 강화될 수 있게 해 주셨다. (행 9:32-35) 그분의 소식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그분은 징계를 베푸신다. 은혜와 보호를 거두시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수난과 기근에 시달리고 적들에게 압제를 받게 버려두신다. 그러면 그들은 정신을 차려 다시금 하느님을 합당하게 두려워하게 되거나, 자기들의 행로가 미련한 것이었고 자기들의 가치관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대둘 33:10-13; 느 9:28, 29; 암 4:6-11.
그러나 그분이 참으시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 달하게 되면 그분은 ‘한탄하기에도 지치’시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형벌을 내리시려는 결정을 번복하실 수가 없다. (렘 15:6, 7; 23:19, 20; 레 26:14-33) 그분은 이제 더는 그들에 대하여 단지 재앙을 “생각”하거나 “마련”하시는 정도가 아니라(렘 18:11; 26:3-6) 결정을 철회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신 것이다.—왕둘 23:24-27; 사 43:13; 렘 4:28; 습 3:8; 계 11:17, 18.
하느님께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시고, 반복적으로 잘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자비롭게 그런 용서를 베풀 길을 열어 두시는 것을 그분의 종이라면 누구나 본받아야 한다.—마 18:21, 22; 막 3:28; 누 17:3, 4; 요첫 1:9. 용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