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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잔치에서 균형잡힌 즐거움을 발견함파수대—1984 |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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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잔치에서 균형잡힌 즐거움을 발견함
1, 2. (ㄱ) 왜 우리는 오늘날 결혼 피로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ㄴ) 피로연은 어느 정도나 필요한 일입니까?
아마 당신은 이미 “마지막 날”에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할 것이라는 예언이 적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풍부한 증거들을 목격해 왔을 것입니다. (디모데 후 3:1-4, 새번역) 이러한 증거는 많은 사람들이 결혼 잔치 즉 피로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그들이 그런 모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읍니다.a 이런 모임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결혼 잔치를 열거나 그런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함정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요점입니까?
2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 있은 직후에 사교 모임을 여는 것이 아무리 지방적으로 보편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그런 모임을 해야 할 어떤 성경적 의무 아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신혼 부부들은 그보다는 바로 그들의 직계 가족이나 몇몇 아주 가까운 벗들과 모이는 것을 더 좋아하여, 그들과 사적인 식사를 즐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혼 잔치를 열거나 그런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곧 ‘쾌락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읍니다.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도 ‘가나’에서 그런 잔치에 참석하셨기 때문입니다.
3. 성서 시대에 결혼 잔치는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었읍니까?
3 결혼식은 신랑 신부에게 그리고 그들의 친척과 벗들에게 즐거운 때입니다. 즐거운 결혼 잔치는 오랫동안 보편화되어 왔읍니다. (창세 29:21, 22; 사사 14:3, 10, 17) ‘유대’인들이 결혼 잔치에 익숙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에서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었읍니다. (마태 22:2-14; 25:1-13; 누가 14:7-11) 성서의 마지막 책까지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계시 19:9.
4. 이제까지 많은 결혼 잔치들이 어떠하였읍니까?
4 과거의 하나님의 종들은—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을 포함하여—결혼 잔치에서 균형잡힌 즐거움을 발견하였읍니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해왔읍니다. 남‘아프리카’에서 혼인 잔치에 참석한 믿지 않는 한 친척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나는 ‘증인’들이 그토록 훌륭한 결혼식을 갖는지를 몰랐읍니다. 우리는 요즘 결혼식에 수반되는 그 모든 음주와 시끄러운 음악에 아주 지쳤읍니다.” 많은, 아주 많은 그리스도인의 피로연들이 그와 비슷한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5. 어떤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해 왔읍니까?
5 그러나, ‘쾌락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세상으로부터의 압력은 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많은 사람이 [결혼 잔치를] 긴장을 푸는 데 이용합니다. 그들은 그런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추리하며, 그래서 그들은 뻗치는 힘을 발산하는 데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고 평소에는 삼가하던 욕망에 내맡기고 싶어합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유럽’.
“결혼 축하는 잡담과 먹는 일이 있은 다음 매우 이른 아침 시간이 되기까지 춤을 추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피로연에서 그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마셔도 된다고 생각하며, 종종 그들은 과음을 합니다.”—‘라틴 아메리카’.
“결혼 잔치에 ‘새벽까지 춤추는 일’이 포함될 수 있읍니다. 이러한 일들 중 일부는 참으로 세상적이어서—과음 및 세상적인 춤으로 떠들썩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값비싼 의복과 수많은 맥주 상자로 허영에 들뜬 과시를 하려고 노력합니다.”—‘아프리카’.
절도가 필요하였다
6. 우리는 ‘가나’에서 있었던 한 사람의 말로부터 ‘유대’인 잔치에 관해 무엇을 알 수 있읍니까?
6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실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다음의 내용이 시사하는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 [그가]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 하니라.” (요한 2:9, 10) 그는 이 특별한 잔치에서 하객들이 “취”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읍니다.b 사실, 예수께서 술취하는 일을 묵인하시고 더 많은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그 상태를 가중시키셨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과음이 ‘유대’인 결혼 잔치에서 보편적인 일임을 알았읍니다.
7. 그리스도인은 ‘알코올’을 대접하는 일에 관해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합니까?
7 어떤 피로연에서 주인들은 지나친 방종이 그 지역에서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음주 문제가 있었던 어떤 하객을 유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알코올’을 전혀 대접하지 않았읍니다. 어떤 ‘아프리카’ 형제들은 “순수한 그리스도인 결혼식”에서는 ‘알코올’을 전혀 대접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까지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술을 마시는 일에 대한 지역 사회의 감정이 완고한 곳에서는 ‘알코올’ 음료가 없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로마 14:20, 21) 그러나, 균형잡힌 평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문해 보십시오. 포도주를 대접한 것 때문에 예수께서 참석하신 잔치가 ‘불순’하였는가? 성서는 술취하는 일을 정죄하는 것이지, ‘알코올’ 음료를 절도있게 마시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잠언 23:20, 21; 베드로 전 4:3.
8, 9. (ㄱ) ‘알코올’ 음료를 대접할 경우, 어떻게 절도가 유지될 수 있읍니까? (ㄴ) 한 장로는 문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8 어떤 신혼 부부가 그들의 피로연에 ‘알코올’ 음료를 내놓기 원한다면, 절도가 있도록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지혜롭고 사려깊은 일입니다. (디모데 전 3:2; 마태 23:25) 예를 들어, ‘가나’의 잔치에서 누가 하객들에게 술을 따라 주었읍니까? “하인들”이 그렇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요한 2:5, 9) 그러므로 신혼 부부는 술을 따라줄 (그리고 아마 양을 제한할) 사람들을 선정할 수 있읍니다. 물론, 어떤 그리스도인 피로연에서든지 술을 마시지 않는, 혹은 술이 아닌 다른 음료수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음료를 준비해야 합니다.
9 중앙 ‘아메리카’의 한 장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읍니다. “피로연이 너무 커서 참석한 모두를 통제할 길이 전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읍니다. 때때로 세상적인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와 물의를 일으킴으로 ‘파아티’를 망쳐버렸읍니다.” 그러면 누가 통제 즉 감독을 할 것입니까? 몇 사람이나 참석하게 할 것입니까? 그런 잔치에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누가 감독할 것인가?
10. 어떤 성서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 피로연을 더 잘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10 ‘가나’의 잔치에서는, “연회장”이 있었읍니다. (요한 2:9) 그와 비슷하게 오늘날 피로연에서도, 유능하고 책임감있는 형제가 세부점들을 감독할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읍니다. 신혼 부부가 바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악사, ‘웨이터’ 및 기타 사람들을 감독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신혼 부부와 상의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따를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안내인들을 감독하는 일도 포함될 수 있읍니다. 그들은 함께 하객들의 시중을 들고 ‘‘파아티’를 망치는 자들’은 누구든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제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예수의 비유에서 결혼 잔치에 뻔뻔스러운 무례를 나타낸 하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유의하십시오.—마태 22:11-13.
11. 신혼 부부를 도와 일을 감독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서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합니까?
11 세상의 많은 피로연에서는 ‘호올’의 지배인이나 악단 지휘자가 연회의 장(長)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일상적인 진행 과정을 잘 알고 있을지 모르며 아마 숙련된 연설이나 암시적인 농담을 얼마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원칙들과 일치한 피로연을 원한다면, 당신은—영적인 형제도 가족 성원도 아닌—어떤 세상적인 남자가 당신의 하객들에게 연설하게 하거나 관심의 초점이 되게 할 것입니까? 그것이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너의]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한 교훈에 어울리는 것이겠읍니까?—갈라디아 6:10.
12. 주로 누구에게 피로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에 대해 성서는 무엇을 시사합니까?
12 때때로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가 결혼 피로연의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신혼 부부를 돕는 일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누구를 초대할 것인지, 어떤 음식과 음료를 대접할 것인지 혹은 어떤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자기들에게 주된 발언권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성서는 누가 ‘가나’의 잔치 비용을 부담하였는지 알려 주지 않지만,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연회장이 신랑을 불”렀다고 알려 줍니다. (요한 2:9) 결혼 피로연에서 신랑은 새로 이루어진 가정의 성경적 머리입니다. (에베소 5:22, 23) 그러므로, 신랑은 이 특별한 날에 신부가 바라는 것과 양가 가족들이 바라는 것들을 사랑을 가지고 고려해야 하지만, 일어날 일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주된 책임을 그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읍니다.
누가 참석할 것인가?
13. 성서 시대의 결혼 잔치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읍니까?
13 우리는 성서 시대의 결혼 잔치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모릅니다. ‘삼손’의 잔치에는 그의 부모와 30명의 신부 친지들 그리고 아마 다른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사사 14:5, 10, 11, 18) ‘유대’인 결혼식에서 하객들은 그 마을의 동료 숭배자들과 방문객들이었읍니다. ‘갈릴리’의 다른 곳에서 온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도 ‘가나’의 잔치에 갔읍니다. 생산된 포도주의 양은 꽤 큰 무리였음을 암시합니다.—요한 2:1, 2, 6.
14, 15. 일부 사람들은 “집을 개방”하는 피로연을 하기 위해 어떤 마련을 하였으며, 하지만 무슨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읍니까?
14 오늘날, 피로연의 형태와 규모는 풍습과 기호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집을 개방하여, 신혼 부부의 친구들인 동료 그리스도인 모두를 환영하는 것이 풍습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식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하고 따뜻한 교제를 즐기게 할 목적으로 베푼 가벼운 다과를 대접받을지 모릅니다. 모든 친구들에게 개방되는 다른 곳에서의 모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의 음식—요리된 음식, 음료 혹은 ‘디저트’를 가져옵니다. 그런 식으로 자원한 모두는 참여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누구나 그 신혼 부부나 다른 아무에게도 부담을 지우는 일 없이 다양한 식사를 즐길 수 있읍니다.—사도 20:35.
15 예수의 비유에서 읽어볼 수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종종 ‘유대’인의 결혼식에서는 대규모 식사가 마련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 22:2; 누가 14:8) 물론, 오늘날 피로연에서 모든 하객들에게 정식 식사를 대접하려면 많은 계획을 할 필요가 있읍니다. 북미의 한 어머니는 이러한 유감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였읍니다.
‘결혼식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광범위한 지역에서 온 젊은이들이 무료 음식과 춤을 즐기기 위해 얼굴을 내밀었읍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왕국회관에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연회장으로 가서 앉을 수 있는 모든 식탁을 차지하였읍니다. 그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외마디를 지를 뻔하였읍니다. 빈자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결혼식을 망치고 주인이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을 위해 내놓은 음식물을 먹어치움으로써 사랑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몹시 상심하였읍니다.’
16. 결혼식 하객들에 관해 우리는 성서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16 ‘마리아’와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가나’의 잔치를 망치지 않았읍니다. 그들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었읍니다. (요한 2:1, 2) 예수께서는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누가 14:8, 9, 16, 17) 예수께서는 또한 왕의 아들의 결혼에 관한 비유에서, “청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셨읍니다. (마태 22:3, 9, 10) 더우기, 청함을 받은 사람이 무례함을 나타낼 때, 사환들은 그를 쫓아내라는 지시를 받았읍니다. 또 다른 비유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다섯명의 처녀는 사실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당하였읍니다. (마태 22:11-13; 25:10-12) 그러므로 피로연이 초대된 하객들에게만 제한되고 이들이 그에 알맞는 차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관대하다고 해서 음식물과 쾌락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빌립보 3:18, 19; 전도 5:11.
17. 결혼 잔치의 크기에 있어서 어떤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 일이 있읍니까?
17 어떤 신혼 부부나 그들의 친척이 많은 하객들을 위한 충분한 식사를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비용이 관련될 수 있읍니다. (비교 마가 6:35-37) 태평양으로부터 이러한 보고가 들어왔읍니다.
“피로연을 무리해서 하려는 경향이 있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잔치를 차리기 위해 빚을 지며, 그리하여 빚을 진 상태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합니다. 종종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는 것 같으며,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피로연을 차립니다.”
젊은 부부가 그들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할 수 있는 빚을 안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혹은 그들의 부모가 성대한 피로연의 대부분의 비용을 지불하는 일로 문제를 겪었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의 느낌은 어떠할 것입니까? 물론,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는 혹은 지역 사회 내에서 체면을 세우려는 자랑하고 싶은 욕망에서 결혼식의 엄청난 빚을 감당할지 모릅니다. (잠언 15:25; 갈라디아 6:3) 그러나 우리가 누가 복음 12:29-31에서 읽어 볼 수 있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야 하겠읍니까?
18, 19. (ㄱ) 일부 사람들은 왜 성대한 피로연을 갖기로 결정할지 모릅니까? (ㄴ) 친구의 피로연에 초대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누가 14:12)
18 일부 아주 성대한 잔치의 이면의 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혹은 그들을 능가하려는 욕망이었읍니다. 서‘아프리카’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읍니다.
“일부 사람들은 다과회에 과도한 비용을 들입니다. 가장 많은 비용이 든 결혼 잔치를 차린 사람이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 남과 다를 만큼 담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켰읍니다. 살림살이를 자랑스럽게 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실족시킬 수 있으며,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요한 1서 2:15-17 참조.
19 또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상하게 할 것이 두려워서 거창한 피로연을 차리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읍니다. 그들은 특정한 친지가 초대되지 않는다면, 이들이 상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이 초대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중 우리의 벗들이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 두려워서 빚을 지고 아마 전 시간 봉사의 직무를 놓쳐버리게 되기를 원할 사람이 누구이겠읍니까? 우리가 초대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재정을 포함한 모든 요인들을 장성되게 신중히 고려했을 것으로 믿는 것이 훨씬 더 낫읍니다. 그들이 우리를 초대하지 않은 것은 심지어 우리가 장성되어서 쉽게 감정을 상하지 않을 것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읍니다. (전도 7:9; 고린도 전 13:4-7) 우리는 보다 중요한 부분인 성서에 기초한 결혼식 연설에 참석함으로써 그들의 행복에 동참할 수 있읍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피로연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디모데 후 3:4, 새번역.
20. 자신의 피로연의 규모를 제한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풍습을 피할 수 있읍니까?
20 피로연의 규모와 비용에 대해 이치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풍습을 피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욕심에 끌린 소수의 사람들은 결혼 예복용 특별 옷감을 산 다음 결혼식 들러리들에게서 그것을 더 고가로 구입하도록 요청하였읍니다. 어떤 피로연에서 하객들은 ‘케이크’ 조각들을 “사”거나 새 신부와의 춤을 “매입”하여 신부의 옷에 돈을 꽂아 주어야 하였읍니다. 그러한 돈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하객들이 악사들에게 돈을 “뿌리”거나 (던지거나) 신혼 부부에 가까운 특별한 좌석을 얻기 위해 많은 선물을 함으로써 그들의 돈을 과시하도록 유도하게 될 수 있읍니다.—누가 14:8-11.
모두가 즐거움을 발견하도록 도우라
21. 음악은 결혼 잔치에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21 ‘마카베’ 전쟁 중에 한 ‘유대’인 결혼 행렬이 “악사들과 가수들”로 된 집단과 마주쳤읍니다. (마카베오 상 9:39, 공동번역 외경; 시 45:8 비교) 오늘날에도, 종종 음악이 결혼식 피로연에 포함됩니다. 음악은 그 행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을 배가할 수도 있고—그 즐거움을 빼앗아 갈 수도 있읍니다. 왜 그런 후자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읍니까? 많은 경우에 음악이 매우 시끄럽고 무절제해졌기 때문입니다. 일부 연주자들은 ‘디스코’형의 음악을 좋아하며, 혹은 그들의 재능을 격렬하게 과시하는 일에 빠져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피로연은 그런 일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만일 음악이 식탁을 마주보고 하는 대화도 불가능할 정도로 시끄럽다면, 젊은 혹은 나이든 하객들이 그리스도인 우정을 즐길 수 있겠읍니까?
22. 음악에 관한 문제들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읍니까?
22 분명히, 결혼 잔치에서의 음악은 특히 생 음악일 경우 주의 깊은 계획과 감독이 필요합니다. 세상 연주자들을 고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보수를 받은 연주자들이 있다면, 신랑이나 선택된 형제가 연주자들에게 무슨 음악이 연주될 수 있고 무슨 음악은 연주될 수 없는지를 확고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출애굽 32:6, 17, 18) 하객들로부터의 어떤 신청곡도 신랑이나 그 피로연의 “책임자”로부터의 승인 없이는 연주될 수 없음을 밝혀 두어야 합니다. 생 음악의 성격과 요란한 소리로 인한 일반적인 문제들 때문에, 많은 신혼 부부들은 그들이 원하는 곡들만 정선한 전축 음반이나 ‘테이프’를 사용하기로 하였읍니다. 그들은 장성하지 못한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있는 곡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성인이 그 곡들을 틀게 하였읍니다.—고린도 전 13:11; 히브리 5:14.
23-25. 그 외에도, 신혼 부부는 반드시 유쾌한 그리스도인 모임이 되도록 어떤 실질적 조처들을 취할 수 있읍니까?
23 그리스도인 신혼 부부들은 그들의 하객들이 그 피로연을 행복하게 회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음악과 춤, 혹은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 원칙들과 일치한 것들이어야 합니다. 몇 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선정된 사람들과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24 열 처녀의 비유에서 잔치는 결혼식 행렬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밤중에” 시작되었읍니다. (마태 25:5, 6) 예수께서 왕이 잔치를 준비하고 종들이 길에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에 관해 말씀하신 또 다른 비유에서는, 잔치가 낮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마태 22:4, 9) 현대의 일부 피로연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으며,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치적인 밤의 수면을 취하기 위해 떠남으로 인해 더욱 무절제하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균형잡힌 많은 신혼 부부들은 그들의 피로연을 시작하는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미리 계획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여 모두는 즐거운 피로연 다음 날의 적절한 그리스도인 활동을 위한 계획들을 포함한 그들의 계획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25 결혼 피로연은 합당하고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즐거움을 맛보는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따르는 것, 즉 참 그리스도인들로서의 결혼 생활과 관련된 그것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각주]
a 어떤 나라에서는, 예식 후에 모든 하객들이 가벼운 음료나 ‘코오피’ 그리고 다과를 대접하는 피로연에 참석할 수 있다. 그 후에 신혼 부부와 그들의 가족과 몇몇 친구들은 가정이나 ‘레스토랑’에서 결혼 만찬을 함께 나눈다. 다른 곳에서의 피로연은 결혼식 날 이후에 ‘스낵’으로나 진수 성찬으로 갖는 모임이다.
b “음주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희랍어 ‘메두스코’에서 나온 것임. 일부 해설가들은 그 단어가 미각을 무디게 하거나 유쾌한 기분이 될 정도로만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귀절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마태 24:49; 누가 12:45; 사도 2:15; 에베소 5:18; 데살로니가 전 5:7.
앞의 내용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들을 기억하십니까?
◻ 왜 그리스도인들은 피로연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 결혼 잔치에서의 ‘알코올’ 음료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 피로연에서 하는 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읍니까?
[13면 삽화]
연회장은 포도주에 관해 신랑과 상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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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끝난 다음을 생각해 봄파수대—1984 |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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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끝난 다음을 생각해 봄
1, 2. 일본에서는 교훈적인 대조를 이루는 어떤 결혼식들이 행해집니까?
「타임」지(1982년 12월 6일자)는 일본에서 결혼식은 ‘17,000,000,000‘달러’에 달하는 사업’으로서, 그것은 “깜짝 놀랄 만하게도 부부당 22,000‘달러’”에 해당한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혼율은 사상 최고[에 달하고 있]으며, 열 쌍의 부부 중 세 쌍은 파탄될 것”입니다.
2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쿠우 심분」지는 ‘노시로’의 두 ‘여호와의 증인’의 결혼식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두 사람 다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며, 그 가르침에 근거하여 그들은 ‘결혼식은 검소하면서도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비용과 정성을 들이는 보편적인 결혼식과 비교해 볼 때, 이러한 검소한 결혼식은 ‘뉴우스’ 거리가 될 만합니다. “그런데도, 그 결혼식은 그 부부의 장래가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즐거움으로 가득찼었다”고 그 일간지는 지적하였읍니다.
3. 우리의 결혼식이 우리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읍니까?
3 결혼식에 대한 부부의 태도와 요구 사항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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