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하늘에 떠 있는 위성으로부터 내려다보면, 한국은 동북 아시아에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반도이다. 한국은 일본 열도 서쪽에 자리 잡고 있고 북쪽으로는 중국 및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남부와 서부 연안에 있는 3,000여 개의 섬이 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중 약 2,600개의 섬은 무인도이다. 한국의 면적은? 거의 영국 본토 크기만하다.
좀더 가까이 보면, 한국은 세계에서도 가장 산이 많은 경관을 가진 나라 중의 하나로 변한다. 전 국토의 약 20퍼센트만이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며, 주된 농작물은 쌀이다. 평야는 서부와 북동부 그리고 남부 연안으로 뻗쳐 있다. 이 나라에서는 춥고 건조한 겨울과 덥고 습한 여름에 계절풍이 여러 방향으로 분다.
이제 한국인들을 대면해 보면 그들 대부분은 다른 아시아인들의 신체적 특징과 비슷한 넓은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 황갈색 피부 그리고 검은 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 언어, 의상 그리고 식생활에 있어서 독특하며, 그들의 역사는 4,000여 년으로 소급한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는 알타이 어족(語族)에 속하며, 오늘날에는 6,0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언어를 사용한다.
분단국
한국은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중국 및 일본과 같은 강국들이 그 국민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국방을 위하여 한국인들은 쇄국(鎖國) 정책을 고수하여 고립해 있었다. 1910년에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고, 그 통치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 반도는 38도선을 중심으로 남쪽은 미국 군대에 의하여 북쪽은 소련 군대에 의하여 분단되었다. 1948년에 국제 연합의 결의에 따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북쪽에는 또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으로 인하여 3년간에 걸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수도 서울에서 북쪽으로 5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동서를 횡단하는 비무장 지대가 설치되어 분단 상태는 더욱 영구적인 것이 되었다. 북한 당국자들은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므로, 북한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다.
동양에 대한 관심
워치 타워 협회 초대 회장인 찰스 테이즈 러셀을 단장으로 하는 만국 성경 연구회의 일곱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1912년 초에 “이교국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처음으로 동양을 방문하였음을 「파수대」(영문) 1912년 12월 15일호는 보고하였다. 그 보고 내용은 이러하다. “그 조사의 결과로 이교국의 형편은 그곳에서 왕국 복음을 선포하는 데 얼마의 협회 자금을 사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여섯 가지 주요 언어로 무료 서적을 인쇄하게 되었다.” 이 언어 가운데는 한국어도 포함되었다.
이 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로버트 R. 홀리스터 형제가 한국을 포함한 이 동양 나라들에서 이 연구회를 대표하게 되었다. 그는 「The Divine Plan of the Ages」(「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한국어로 번역 인쇄할 계획을 세웠다. 이 책은 마침내 1914년 3월 18일자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되었다. 판권 면에는 발행소가 만국 성경 연구회로, 그 대표자는 R. R. 홀리스터로 되어 있다. W. J. 홀리스터 부부가 또한 한국에서 왕국 진리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상당한 기간 머물러 있었다.
처음으로 헌신한 한국인
「파수대」(영문) 1914년 8월 15일호에는 러셀 형제가 받은 매혹적인 한 편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이러하였다. “저는 형님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낯선 사람이지만, 22개월 전에 형님의 저서를 통하여 현재의 진리를 알게 되었읍니다. 벌써부터 이 진리에 대한 저의 특별한 감사를 말씀드리기 위하여 글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지금까지 환경이 허락하지 않았읍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시면 흥미를 느끼실 줄 압니다. 이곳 한국에 처음으로 선교사들이 도착하였을 때 (1885년) 이 나라는 문이 단단히 잠겨져 있는 은자의 나라였읍니다. 그때부터 얼마의 한국인들은 그리스도교인이 되었읍니다.
“약 8년간 저는 이제 알고 보니 영매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단의 가르침의 위험한 조류에 휩쓸려 들어갔읍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R. R. 홀리스터 형제를 보내 주셔서 복음으로써 미지의 흑암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는 저를 구출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저는 지성을 거의 잃다시피 하였읍니다. 저의 이해의 눈과 귀가 열리는 데 약 6개월이 걸렸읍니다. 그때부터 저는 주께 헌신하였으며 계속 주를 찬양하고 있읍니다.”—강 범식 (서명.)
강 범식이라는 사람은 누구였으며, 그는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되었는가?
1915년에 샌프란시스코(미국)에서 열린 만국 성경 연구회 대회에 R. R. 홀리스터 형제는 강 범식 씨를 만나게 된 경위를 이렇게 보고하였다. “한국에서 주께서는 저를 강 범식이라는 사람에게로 인도해 주셨읍니다. 처음에는 번역하는 일을 위하여 순전히 사업적인 목적으로 고용 관계에 있었읍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그가 번역하던 기사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읍니다. 몇달 동안 우리 사무실에서 일한 후에 주께 온전히 헌신을 하게 되었읍니다. 그 후부터 그는 번역하고 통역하고 반을 인도하고 한국 지부를 관리하는 일에 많이 사용되어 왔읍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총회에서 여러분에게 그를 ‘은자의 나라’의 대표로 소개하게 될 기쁨을 기대합니다.”
외국으로부터의 또 다른 도움
1915년에 콜포처(전 시간 전파자)인 패니 L. 매켄지 자매가 자비로 영국으로부터 주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매켄지 자매는 만국 성경 연구회의 공식 편지지를 사용하여 증거를 했다. 어떻게? 앞면에는 영어로 왕국에 관한 소식을 인쇄하고 뒷면에는 대부분의 동양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문 번역문을 인쇄하였다.
이 편지에는 시험삼아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제공하는 소개의 말이 들어 있었다. 지부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에 의하면, 매켄지 자매는 그 책을 281부나 전했음을 알려 준다. 이 자매는 부지런히 이 서적을 배부하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강 범식 형제의 사비를 위하여 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였다. 매켄지 자매는 1949년에 그의 나이 91세 때 현재 한국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인 돈 스틸 형제가 한국으로 파견되기 직전에 그 기록들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
최초의 인쇄 시설
한국에서의 일을 책임 맡고 있는 총무 강 범식 형제와 그의 보조자들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매우 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1921년에 전국을 ‘순례’하면서 공개 강연을 열었고,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그 당시 책명은 「금생 억만인은 영생 불사하리라」)를 한국어로 발행 배부하였다. 이제 한국은 협회의 미국 외 18개 지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외국에서 한국어로 소식을 인쇄하는 데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1922년에 러더퍼드 형제는 강 범식 형제에게 2,000 달러를 보내서 일곱대의 인쇄기를 갖춘 조그만 인쇄 시설을 갖게 하였다. 이 인쇄 시설로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일본어 서적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별로 증가를 보지는 못했다.
새로운 관리하에
협회는 1926년 가을에 일본에 지부를 설치하고 일본인 미국 교포인 아카시 준소(明石順三)를 임명하여 일본과 중국 및 한국을 대표하게 하였다. 한편, 한국에서의 업무를 책임져 왔던 강 범식 형제는 협회 인쇄 시설을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고 세상 책들을 인쇄하고 있었다. 그는 무엄하게도 허락도 받지 않고 인쇄 시설을 팔기까지 하였다. 1927년에 박 민준 형제가 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콜포처인 박 민준 형제는 충실한 형제로서 도보로 한반도 전역을 오르내리며, 공개 집회를 열고 서적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로부터 특별히 반대를 받았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인 지방 경찰관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일이 흔히 있었다.
1931년에는 더 큰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어 서울 계동 147번지의 박 민준 형제 집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박 민준 형제는 영어를 잘 알았고, 그리하여 「Reconciliation」(화목)과 「Government」(정부)와 그외 여러 가지 서적들을 번역하였다. 그는 영어가 유창하였으므로 뉴욕에 있는 협회와 직접 통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 민준 형제는 아카시가 원하는 만큼 일본어에 익숙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935년에 학교 교사였던 문 태순 형제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제 전 시간 야외 봉사자로서의 문 태순 형제의 근면성은 앞으로 시험을 받게 되어 있었다.
콜포처 활동
이 시종 형제는 22세 때인 1930년에 여호와께 헌신하고 콜포처 봉사에 전념하였다. “도시에서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은 나는 자전거를 구입하고 시골 지방으로 가서 전도하기로 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이 시종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짐과 서적을 자전거에 가득 싣고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경기도에 있는 어느 군청이었읍니다. 처음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였으나, 나는 왕국 대사로서의 내 사명을 생각하게 되었읍니다. 왕국 대사란 말은 내가 지부 책임자 형제로부터 자주 듣던 술어였읍니다. 그 결과로 나는 군청 서기들에게 여러 부의 서적을 전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용기와 자신을 갖게 되었읍니다.”
현재 서울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는 이 시종 형제는 지금의 북한을 포함하여 전국을 샅샅이 누볐고 심지어 만주까지도 전도 여행을 하였다. 그는 서울 사무실로 서적을 주문해서 앞으로 도착할 마을이나 읍으로 우송하게 하였다. 이것이 증거 활동이 어렵게 된 1933년까지 3년간의 그의 생활이었다.
1931년 보고에 의하면, 그 해는 왕국 선포자들이 매우 바쁜 해였다. 그들은 모두 30,920 집을 방문하였고 야외에서 11,853시간을 사용하였으며, 2,753부의 서적, 13,136부의 소책자 및 3,940부의 「황금 시대」 잡지를 배부하였다. 1932년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회가 열렸으며, 서울에서 6월 11-13일에 열린 이 대회에 45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그 해에 「천국, 세계의 희망」 소책자 50,000부가 한국어로 발행되어 무료로 배부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서의 봉사가 확장하고 있었다.
경찰의 수색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는 이렇게 여호와의 백성의 활동이 증가하는 것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지부 감독자는 일본과 한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나는 1933년 5월 10일에 도쿄를 떠나 여행중에 있었는데, 5월 15일에 만주 봉천에서 항공편으로 편지를 받았읍니다. 그 편지로 (도쿄에 있는) 지부에서 일하는 다섯명의 형제로 이루어진 사무실 직원 전원이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지부의 일은 자매들에 의하여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5월 16일과 17일자 신문들은 거의 전면을 여호와의 증인의 체포에 관한 보도로 채웠읍니다.
‘경찰은 도쿄와 서울에 있는 협회 사무실을 수색하였읍니다. 그들은 우리의 출판물 재고품을 모두 압수하였읍니다. 일본과 한국에 있는 형제들은 이 심한 시험의 기간에도 여호와와 그분의 기름부음받은 왕에게 그들의 충실성과 충절을 지켰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뻐하실 줄 압니다.’
1933년 6월 17일에 협회의 서울 사무소에서 경찰이 압수한 서적만도 50,000부나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책들을 손수레 18대에 실어 서울에 있는 한강변으로 가져가 공개적으로 소각하였음을 「동아 일보」는 보도하였다. 또한 1933년 8월 15일자 「동아 일보」는 현재 북한에 있는 평양 근처의 형제들의 집에서 근 3,000부의 서적을 압수하여 태웠음을 보도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경찰의 수색은 증거하는 일을 잠잠하게 하였는가?
계속된 봉사
구속 사태로 인하여 서울로 소환된 콜포처 이 시종 형제는 이렇게 회상한다. “형제들은 즉시 용기를 되찾고 금지당하지 않은 유일한 출판물인 「황금 시대」를 가지고 전도하는 일을 재개하였읍니다. 물론, 집회도 계속 열었읍니다.”
한국에서는 「황금 시대」를 신문으로 등록하여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야외에서 사용하였다. 그 당시 배부가는 2전이었다. 주종을 이루던 공급품은 없어졌지만 많은 형제들은 얼마의 서적과 소책자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 책들을 빌려 주거나 형제들 사이에 서로 교환해 봄으로써 참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소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집회는 매주 일요일에 열렸다. 집회를 사회하는 형제는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하고, 얼마의 새로운 사람들이 참석하게 되면 그들을 위하여 기본 교리를 설명해 주곤 하였다. 사회자는 또한 「파수대」 기사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다른 형제들은 따라 볼 수 있는 잡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수대」는 소책자 형태로 일본어로 인쇄된 것이다. 일본 통치 기간에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으므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이러한 집회를 사회할 자격을 가진 형제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지부 감독자는 가능한 대로 많은 형제들이 콜포처 봉사를 하게 하여 그들을 멀리 떨어진 구역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있는 형제들은 전국적으로 흩어져 봉사하였으며, 함께 교제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집회를 사회하는 방법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언젠가 워치 타워 선교인이 내한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벨론”에서 나온 영향력 있는 한 가족
「황금 시대」를 제외한 워치 타워 협회의 모든 서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제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제들은 모든 일에 조심성있고 분별력있게 행동해야 하였다. 정기적으로 조직된 모임은 없었지만,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옥씨 가족은 탁월한 예이다. 이 가족은 모두 제칠일 안식일 교인들이었으며,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그 지역 사회에서 매우 평판이 좋은 집안이었다. 옥 지준 씨의 부친은 교회 장로였고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학교 교장이었다. 그리고 부인 김 복녀 씨는 그 지방 학교의 서무과 직원이었다.
옥 지준 형제는 그때 일을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1937년 어느 날 나는 쓰레기통에서 「황금 시대」라는 잡지를 보게 되었읍니다. 나는 원래 종교심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잡지에 나온 종교 기사에 흥미를 느꼈고 그 기사들을 철저히 읽었읍니다. 며칠 후에 두 사람이 찾아와서 ‘등대사’ 발행 서적을 더 권했읍니다. [‘등대사’는 일본 지부 감독자가 ‘워치 타워’를 잘못 번역 사용한 말로서 한국에서도 ‘등대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들은 나에게 카드를 내어주며 거기 들어있는 내용을 읽게 하였는데, 그것이 증거 카드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읍니다. 나는 그들에게 있는 책들을 기꺼이 모두 받았읍니다. 나중에 그 책들을 읽으면서 많은 점이 안식교 교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나는 책 뒷면에 나오는 도쿄 주소로 질문 편지를 보냈으며, 우편을 통한 이러한 교리 토론이 몇달 동안 계속되었읍니다. 도쿄 지부에서는 내 질문에 대답하면서, 「파수대」지의 특정 기사에 붉은 줄로 밑줄을 친 것을 동봉해 보내 주곤 하였읍니다.
“지금은 북한에 있는 황해도 사리원의 안식교회에서는 나에게 고통을 주었읍니다. 내가 새로 알게 된 진리에 대하여 계속 질문을 하곤 하였기 때문이었읍니다. 교역자는 대답을 회피하면서 특히 부친의 절친한 친구인 교역자에게 그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라고 질책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친분 관계가 성서 토론을 막을 수 없으며, 또 그는 나에게 대답해 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내 동생도 진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와 동조하였으며, 형도 그러했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중단하였읍니다.
“부친은 우리를 반대하였읍니다. 형과 내가 한창 번창하는 농기구 공장을 닫고 전도 봉사를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게 되자, 노발 대발한 부친은 우리를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념하지 않고 「파수대」의 내용으로 부친을 설복하려고 노력하였읍니다.”
옥 지준 형제의 형인 옥 례준 형제에게서 이제 어떻게 그들의 부친이 마침내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하루는 우리 안식교 교역자가 우리 집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경찰국 고등계에서 교인들에게 일본 신들을 숭배하는 신사 참배를 할 것과, 교회에 일본 국기를 달고, 그것에 경배하고, 예배를 보기 전에 언제나 일본 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의 견해는 안식교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식교회는 없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역자는 그 문제를 교회 본부에 문의하였으며, 우리에게 그 대답을 알려 주기 위하여 우리를 방문한 것이었읍니다. 그들의 교회 본부의 대답은 그것이 큰 시련이기는 하지만 경찰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읍니다. 이러한 결정을 들은 우리 부친은 매우 실망하였읍니다.”
그들의 부친은 이 문제에 대한 워치 타워 협회의 견해를 알기 원하였다. 대답을 알고 나서, 그는 아들들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참으로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전 가족 곧 양친과 네 형제 그리고 두 며느리 모두가 교회 나가는 것을 중단하였다.
옥 례준 형제는 계속 이렇게 설명한다. “1938년에 안식교회에서는 미국인 선교인 한 사람을 보내서 일본 정부의 탄압 때문에 그들의 선교인들이 모두 한국을 떠나기로 하였다는 것을 알려 주었읍니다. 또한 그는 기 경배 문제와 신사 참배 문제로 우리 가족이 교회를 탈퇴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한국의 모든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바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튼튼한 믿음을 갖도록 격려해 주었읍니다.”
일본에서 지부 감독자가 방문하였을 때, 이 가족 전체가 1937년 11월 19일에 침례를 받았다. 네 형제 중 세 형제는 지금도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다른 한 형제인 옥 응련 형제는 그의 중립 문제로 인하여 1939년에 일본에서 투옥된 후 충실을 지키다가 사망하였다.
때에 맞는 경고
1938년 12월에 아카시 준소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서울에 있는 문 태순 형제 집에서 약 30명의 형제와 만나 그들이 체포될 날이 가까왔음을 경고하였다. 그러한 일이 있을 때, 결코 국기나 천황에게 불경을 나타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또한 그는 결코 타협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때 재고로 있던 「보호」와 「경고」 그리고 「사실을 보라」라는 세 가지 소책자를 사용하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전도할 것을 권하였다.
「사실을 보라」라는 새로운 소책자에서, 아카시는 한국 형제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치게 한 한 가지 점을 강조하였다. 이 소책자는 젊은이들에게 결혼하기 전에 아마겟돈이 지나기까지 미확정적인 얼마의 기간[a “few years”]을 기다릴 것을 격려하였다. 그는 이 표현을 번역하는 데 미확정적인 기간이 아니라 두서너 해로 이해할 수 있는 “수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형제들은 전도할 기회는 몇달밖에 남지 않았고 그 다음 모두 체포되어서 투옥되어 있는 동안 아마겟돈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몇 주일이 지난 후에 신문들은 조직을 공격하고 협회장 러더퍼드 형제를 “광적인 평화론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아카시 준소의 아들과 다른 일본 형제가 1939년 1월에 군사 훈련을 거절하였을 때, 아카시 자신이 도쿄에 있는 일본 육군 본부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도록 소환되었다. 형제들을 체포하는 일이 뒤따랐다. 1939년 6월 21일에는 일본에서, 6월 22일에는 대만에서, 그리고 한국에서는 6월 29일에 체포 선풍이 불고 지나갔다. 많은 증인들은 1945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는 나날을 보냈다.
초기 충절 고수자들
「황금 시대」를 읽고 진리를 알게 된 이전 가톨릭 신자였던 장 순옥 자매는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아카시 준소와 모임을 가진 후에 사태가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많은 책을 가지고 임명지로 떠났읍니다. 나는 부산으로 가서 전도하였읍니다. 1939년 6월 29일 새벽에 경찰에 체포되었읍니다. 9명의 우리 자매는 일반 죄수들과 함께 한방에 갇혔읍니다. 유치장은 무덥고 더럽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읍니다. 우리는 일년 동안이나 이러한 유치장에서 구류 생활을 한 후에야 비로소 재판을 받기 시작하였읍니다.
“형무소에서 수감자들은 매일 아침 일본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당했읍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절하였고, 그로 인하여 한 손은 뒤로 다른 한 손은 어깨 너머로 넘겨서 함께 수갑을 차게 되었읍니다. 때로는 쌍수갑을 차기도 하고 때로는 두 사람을 등 뒤로 함께 수갑을 채우기도 하였읍니다. 그런 경우에는 식사 때마다 수갑을 앞으로 바꿔 채워야 하였읍니다. 이런 일이 7개월이나 계속된 후에 마침내 그들은 단념하고 수갑을 풀어 주었읍니다.
“원래 언도받은 형기를 마친 후에, 우리 네 자매는 교정 불능자로 분류되어 청주에 있는 예방 구금소에 수용되었읍니다. 한 간수는 이 자매들에게 여기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며칠 내로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읍니다. 그러나 갑자기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마침내 1945년 8월 16일에 석방되었읍니다. 나는 지금도 감옥 생활을 한 그 모든 기간을 생각하면 감정이 복받쳐 오름을 금하지 못합니다.”
체포된 형제 자매들 중에는 옥 형제 가족도 있었다. 장남인 옥 례준 형제의 아내인 이 정상 자매는 그들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때 침례받은 지 2년도 안 되는 영적 아기에 불과하였읍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형사가 와서 남편과 시동생 옥 지준 형제를 체포해 갔읍니다. 그때 한국 형제 자매들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마침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읍니다. 경찰은 다시 협회 출판물을 모두 압수해 갔읍니다. 적어도 그들은 모두 압수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우리가 아직 체포되기 전에, 나의 동서 김 복녀 자매와 또 다른 자매인 김 경희 자매와 함께 나는 협회 서적 창고로 가서 우리가 운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서적을 가지고 나왔읍니다. 우리는 체포되기 전에 가능한 대로 많은 서적을 전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북으로 평양으로 가서 봉사하다가 1939년 11월에 치안 유지법 위반과 금지된 서적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읍니다. 우리는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나중에 다른 자매들이 수감되어 있는 서대문 형무소로 옮겼읍니다. 그때 수감되어 있던 형제 자매는 모두 38명이었읍니다.”
죽기까지 충실을 지킴
투옥당한 충실한 사람들 가운데는 현재 86세로 아직도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박 옥희(경숙) 자매가 있는데 그는 그 어려웠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한국 남쪽 경상도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온 겨울을 보낸 다음에, 우리는 1939년 2월에 서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읍니다. 돌아오자마자 남편 최 성규 형제는 서울 동대문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었읍니다. 경찰은 그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한 것입니다. 남편은 20일간 유치장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으로 이송되었읍니다. 40일 후에 퇴원하면서 풀려 났으나 1939년 6월에 다른 형제들과 함께 또다시 체포되었읍니다.
“시누이 남편이 일본 정부의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는 남편의 석방을 돕기 위하여 변호사를 보냈읍니다. 변호사는 남편에게 신사 참배를 하는 것만이 자기가 석방을 주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였읍니다. 남편은 그의 권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시는 자기를 면회하러 오지 말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남편은 나에게 편지를 써서 ‘누가 변호사를 보냈느냐?’고 물었읍니다. 그리고 ‘계속 깨어 있으시오. 로마서 8:35-39을 읽어 보시오’하고 격려하였읍니다. 이 편지는 밖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큰 격려가 되었으며, 새로운 형제들에게 계속 여호와를 찬양하려는 결의를 갖게 하였읍니다.
“1941년 9월에 나는 다시 체포되었으나 이번에는 단지 15일간만 수감되었읍니다. 남편이 형무소에서 석방될 것이므로 500원을 준비해 가지고 오라는 말을 들었읍니다. 나는 그 돈을 장만해 가지고 형무소로 갔읍니다. 쓸쓸하고 캄캄한 밤이었읍니다. 남편은 홑이불에 덮여서 바닥에 누워 있었읍니다. 살았다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상태였읍니다. 2년 이상이나 남편을 감금하여 이 지경이 되게 하고서 이제 보석금으로 500원을 요구하다니! 남편은 형무소를 나온 지 여덟 시간 만에 42세로 사망하였읍니다.
“1942년 9월에 나는 네번째로 체포되어 다른 자매들이 있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읍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뎠읍니다.”
여간수는 이 자매들이 일본 천황을 숭배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매우 노하였다. 그로 인하여 이 여간수는 가외의 일을 해야 하였다. 식사 때마다 그들의 수갑과 쇠사슬을 풀어 주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간수는 우리의 사랑하는 자매들의 충실성에 감명을 받았음이 분명하였다. 놀랍게도, 20여 년 후에 성서 연구를 시작한 이 이전 여간수는 어느 지역 대회에서 이 자매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그는 1970년에 침례를 받았다.
검찰관은 형제들을 기소할 근거를 찾기 위하여 심문을 계속하였다. 그들의 심문은 이런 것이었다. “모든 나라들이 마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거기에는 우리 대일본 제국도 포함된다는 말인가? 그대는 미국의 스파이인가? 아마겟돈은 언제 올 것인가?” 형제들은 “전파하는 일이 끝나면 올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검찰관은 이렇게 추궁하였다. “그대들의 전도 활동은 결국 아마겟돈을 재촉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대들이 우리 일본 제국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들은 치안 유지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많은 형제들은 2년 내지 4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투옥된 형제 자매 38명 중 5명이 충실하게 형무소에서 사망하였고, 그 중에는 일본 지부 감독 아래 한국에서의 책임을 맡고 있던 문 태순 형제도 들어 있었다.
제 2차 세계 대전 후, 미몽에서 깨어남
아카시 준소는 한국이 일본 지부 아래 있게 된 1926년부터 한국에서의 일을 책임 지고 있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1945년에 자유롭게 된 후에, 아카시가 부도덕한 생활을 하였고 압력하에 진리를 타협하고 하나님의 조직으로부터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 형제들은 아마겟돈이 오기까지 “수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아카시의 부정확한 설명을 믿었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형제들의 이 조그만 집단은 분열되었다. 믿음이 강한 얼마의 형제 자매들은 계속 전파해야 한다고 믿은 반면, 또 다른 얼마는 열심이 식었다.
1939년 이후로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조직과의 접촉이 전혀 없었다. 형제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많은 형제들은 그들이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세계 어디서나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워치 타워 협회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다른 나라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이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충절을 고수하였다는 것이나 증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아무도 인도하는 사람이 없었고 조직과 접촉이 전혀 없었으므로 한국에서의 참 숭배는 거의 중단 상태로 침체되어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이 다시 살아났다”
참 숭배의 문이 어떻게 다시 활짝 열리게 되었는가? 박 옥희 자매는 이렇게 설명한다.
“1945년에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몇몇 자매들은 ‘밀실’에서 아마겟돈을 기다릴 때라고 고집하였지만 우리는 우리 집에서 얼마의 모임을 계속 열었읍니다. 이 모임은 조직적인 집회는 아니었읍니다. 사회하는 형제는 그때 가지고 있던 옛 출판물 내용으로부터 연설을 했읍니다. 이것이 몇해 동안 우리가 활동한 일의 전부였읍니다. 이 집회 참석자 중에는 15세 소년인 나의 조카 박 종일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한국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이 되었읍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1948년 8월 어느 날 최 용원 형제가 미군 신문인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의 한 기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읍니다. 그 내용은 미국과 그외 나라들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매우 활동적이라는 것이었읍니다. 그 소식은 우리를 매우 기쁘게 하였읍니다. 우리는 모두 최 용원 형제에게 미국에 있는 협회로 편지를 하도록 권했읍니다. 그는 편지를 보냈고, 협회에서는 즉시 회신과 함께 소포로 서적을 보내 주었읍니다. 우리는 기쁘게 이 소책자들을 가방에 가득 넣고 서울에서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하였읍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뻤읍니다. 한 부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읍니다.”
1949년 6월 24일에 12명으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증인의 전후 첫 회중이 조직되었다.
“환영, 희망을 위한 워치 타워 공사”
협회 본부와 진정한 의미의 튼튼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충실한 선교인들이 내한하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그 선교인들의 수는 결국 총 52명에 달하게 된다.
협회는 서울 회중을 임명한 후에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들을 한국으로 보낼 마련을 하였다. 원래 일본으로 임명되었던 길르앗 학교 제 11기생 8명의 임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었다. 돈 스틸과 그의 아내 얼린a이 제일 먼저 가도록 선택되었다. 수속을 밟기 시작한 후 대한민국 정부의 사증(查証)을 발급받아 1949년 8월 9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김포 공항의 보안상의 이유로 다만 두명의 형제만 스틸 형제 부부를 마중할 수 있었다. 활주로 근처에 있는 담에는 “환영, 희망을 위한 워치 타워 공사(公使)”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형제들은 둘 다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으나, 스틸 부부에게는 그들의 따듯한 미소와 우정적인 악수로 충분했다.
스틸 형제 부부가 조그만 호텔에 여장을 푼 후에 영어를 할 줄 아는 회중의 종 최 용원 형제와 함께 약 10명의 형제가 모였다. 이것은 실로 10년 만에 처음으로 조직의 대표자와 함께 갖는 만남이었다. 이제 형제들은 앞으로 할 일에 대한, 하고 싶었던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날 저녁에 집회가 마련되었다. 1949년 8월 12일자로 된 협회로 보낸 최초의 편지에서, 스틸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놀랍게도, 40명의 형제와 선의자들이 참석하였읍니다. 우리는 미국에 있는 형제들의 인사를 전했고 이 시대의 하나님의 조직에 관하여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 그들의 많은 질문을 받고 대답하였읍니다. 형제들은 여러 가지 면으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열정적입니다. 다만 두세명만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들은 「사실을 보라」 소책자에 언급된 아마겟돈까지 ‘수년’이라는 세월이 아직도 계속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입니다.”
서울 인구는 제 2차 세계 대전 전보다도 2배나 되는 1,500,000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서 선교인들을 위한 집을 찾는다는 것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8월 말에 가서 도시 중심부 근처에 있는 훌륭한 건물을 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붉은 벽돌로 잘 지은 서양식 건물이었다. 그것은 원래 일본 정부에서 관리하던 집이었는데 이제 한국 정부에서 관리하는 재산이다. 이 집에는 침실이 네개, 큰 거실, 식당 그리고 주방이 있었다. 이제 협회는 나머지 여섯명의 선교인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집은 선교부와 한국 회중의 집회 장소로 사용될 뿐 아니라, 앞으로 때가 되면 지부 사무소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었다.
조직적인 봉사 활동이 시작되다
서적을 우편으로 몇 상자씩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재고 서적이 얼마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얼마 동안은 두명의 선교인과 28명의 전도인이 호별 방문 봉사에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소책자를 빌려 주고 다시 가서 그 소책자를 찾아다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 주곤 하였다.
1950년 1월 1일부터, 전 시간 봉사의 열의를 가진 네명의 전도인이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2월에는 회중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전도인 7명이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되었으며, 나머지 전도인들의 월 평균 봉사 시간은 33시간이었다. 재방문과 가정 성서 연구 봉사는 그들을 참으로 기쁘게 하였다. 그들은 이 봉사에 대하여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인들이 온전히 한달 동안 활동한 첫째달의 성서 연구 보고는 16건이었다. 연구생들은 자기의 초라한 집에서 연구를 하기보다는 선교부로 오는 것을 더 좋아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연구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영어를 배우거나 외국인과 교제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왕국 소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선교인들이 야외에서 한국어 서적을 사용하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협회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가 번역 발행되도록 지시하였다. 최 용원 형제만이 번역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형제였다. 그러나 직장 관계로 인하여 주간 연구를 위하여 「파수대」를 계속 번역하는 일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하여 선교인들이 사회하는 두명의 성서 연구생에게 번역하는 일을 부탁하였다. 한 사람은 영어 교수였고 또 다른 사람은 은행 간부였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제한된 지식을 고려할 때 놀랍게도 그들의 번역은 훌륭한 것이었다.
형제들을 고무한 조직적인 집회
조직적인 「파수대」 연구 집회가 시작된 것은 선교인들이 도착한 후였다. 최 용원 형제가 연구 기사를 번역하면, 박 종일 형제는 미농지 아홉장에 묵지를 사이 사이에 끼고 손으로 베껴 썼다. 1949년 8월 14일에 처음으로 시작한 「파수대」 연구에 47명이 참석하여 미농지에 베껴 쓴 잡지를 앞에 놓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함께 집회를 보았다. 다음에는 한국에서 봉사회가 처음으로 열릴 차례였다.
회중과 다시 연합하기 시작한 신 완 형제는 등사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어서 왕국의 유익을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파수대」 연구 기사가 번역되면 등사 원지에 필경을 한 다음 손으로 롤러를 돌려 한장 한장 등사를 해서 이제 집회 참석자 모두에게 개인용 「파수대」를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었다. 더는 손으로 베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다른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회중 성원은 모두 나머지 선교인들이 도착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1950년 3월 12일에 윈필드(스콧) 카운츠와 그의 아내 앨리스, 그레이스 그레고리와 글래디스 그레고리 친자매, 노린 밀러(현재는 톰슨) 그리고 플로렌스 맨소(현재는 쟁친)가 한국의 잔치와 전통적인 따듯한 후대로 새로운 임지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 새로운 선교인들은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5월에는 여덟명의 선교인이 각각 평균 2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그들이 회중에서 연설할 때는 통역자들을 사용해야 했고, 통역자들은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관계로 때때로 정확하지 못한 통역을 하는 일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한 선교인이 형제들에게 “봉사”(service)를 격려하는 연설을 하는데 통역자는 “봉사”라는 단어를 “군 복무”(military service)라는 뜻으로 통역하는 일도 있었다.
처음으로 신권 전도 학교가 조직된 후에, 1950년 봄에 공개 집회가 또한 시작되었다. 참석수가 증가하여 이제 162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재동 국민 학교 강당에서 일련의 공개 강연을 할 마련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 “지구의 운명”이라는 제목의 첫 강연이 평화스럽게 개최되었다. 그날은 바로 한국 전쟁이 시작된 불행한 날이었다.
후에 스틸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다. “6월 25일에 서울에 있는 한 학교 강당에서 공개 강연을 마치고 나자, 경찰관이 와서 38선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통행 금지가 실시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읍니다. 신권 소식에 대한 관심은 놀랍게 증가하여 이 마지막 공개 강연에 336명이 참석하였읍니다! 다음날 밤에 남한의 방위력은 붕괴되어 서울은 포위되었읍니다.”
한국 전쟁
1949년 7월까지 미국과 소련의 점령군은 소수의 고문관들만 남겨 놓고 모두 철수하였다. 한반도는 이제 현대에 있어서 가장 파괴적인 하나의 전쟁을 경험할 운명에 있게 된 것이다. 1950년 6월에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남한의 육군은 100,000명도 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장비는 매우 빈약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탱크 여단을 포함한 135,000명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훈련과 장비 면에서 유리하였으며, 반대로 남한은 전혀 침공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6월 28일에 수도 서울은 남한 군대를 압도한 북한 군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전투는 38선을 중심으로 서로 일진 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조인되었다.
선교인들의 철수
전쟁이 발발한 지 2일 후에 한국 주둔 미군 방송은 모든 미국인에게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이제 선교인들은 진퇴 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남아서 이들 충실한 한국 형제들과 함께 봉사할 것인가 아니면 떠나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덟명의 선교인은 함께 모여 여호와의 지도를 구하고 이 긴박한 상황에 대해 토의하였다. 남아 있는 것은 북으로 납치되어 가서 투옥될 것을 각오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은 모두 떠날 것에 합의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그들이 올바로 결정을 하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후에 선교인들이 보고한 내용은 이러하였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호송차를 타려면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었읍니다. 개인 물건들은 회중의 종에게 맡겼읍니다. 그 순간 서울은 포격을 당하고 있었고, 김포 공항으로 달리던 우리가 탄 버스는 기총 소사를 당했읍니다. 일본으로 비행한 우리 여덟 사람은 모두 고베에서 일하고 있읍니다.”
서울의 회중의 종인 이 시종 형제는 남아 있던 몇명의 외국인들이 모두 “죽음의 행진”으로 끌려갔음을 편지로 알렸다.
이렇게 하여 여덟명의 선교인은 모두 너무나 갑작스럽게 임명지인 한국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스틸 형제 부부는 10개월밖에 안 되었고 다른 여섯명은 3개월밖에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에도 그들은 열정적인 한국 형제들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또다시 한국 조직은 협회와 직접적인 접촉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이 새로운 국면은 한국 증인 각자에게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문제를 직면하게 하였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충실을 지킴
한국의 산업 시설의 43퍼센트가 파괴되고 가옥의 33퍼센트가 파괴되어 형제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피난민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집들은 황폐되었고 가산은 없어졌다. 살기 위하여는 경계심을 풀어서는 안 되었다. 양쪽 중 어느 한쪽의 공습시 기총 소사로 몇명의 형제들이 사망하였다. 협회의 소유 건물에 피해 있던 몇명의 사람도 군인들의 냉혹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 남은 형제들은 세상의 희망으로서 왕국을 전파해야 할 그들의 사명을 결코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지 처음 며칠 동안에는 서울 시민 대부분은 시내에 갇혀 있었다. 형제들은 남쪽으로 도망하지 않는다면 북한 인민 의용군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박 종일 형제와 옥 응석 형제는 7월 5일까지 시내에 숨어 있다가 한강을 건너서 남쪽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은 길에 즐비한 많은 시체와 파괴된 탱크 그리고 무너진 집들을 지나면서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 가까와질수록 공산군을 피하기가 더욱 어려워짐을 알게 되었다.
1950년 9월 15일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은 공산군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그동안 시골에 숨어 있던 박 종일 형제는 1950년 10월 1일에 서울로 돌아와 시민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하여 호별 방문 봉사를 해보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매우 긴장해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노 병일 형제는 그때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는데도 전쟁으로 인하여 문제를 당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의 지배 아래 형무소에서 충실을 지킨 김 주옥 자매의 사위였다. 그는 공산군이 처음으로 서울을 점령한 때에,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산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밥을 짓다가 그만 연기 때문에 공산군에게 발각되어 붙들리고 말았다. 그는 교외로 끌려가서 잡혀 온 다른 청년들 가운데 끼게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들은 심문을 받았다.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를 따로 세워 총살하였다. 노 병일 형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기 전에 증거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왜 인민 의용군에 입대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노 형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만을 섬길 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겟돈에서 양대 진영의 정치적 투쟁을 모두 멸망시키실 것이며,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어떠한 인간의 법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범할 수는 없읍니다. 나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를 심문한 군인은 처음으로 정직한 사람을 만났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노 병일 형제는 옆으로 세워졌다. 군인들은 소총을 들어 조준을 하고 사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였다. 노 병일 형제는 기절하였다가 얼마 후 깨어나서 살아 있는 것을 알고 놀랐다. 노 병일 형제의 첫 마디는 “진리의 힘은 과연 강하구나”라는 것이었다.
또다시 피난을 가다
서울이 탈환된 지 2개월 반이 지난 후인 1950년 12월 24일에 한국 정부는 소집 연령의 남자들을 제외한 모든 서울 시민에게 다시 서울에서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꼭 11일 후인 1951년 1월 4일에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 날이 오기 전에 형제들은 얼마의 짐을 싸가지고 걸어서 또는 손수레에 싣고 또다시 피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또한 선교부에 남아 있던 소책자 「만민의 환희」를 몇 상자이든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지고 떠났다. 이 두번째 피난 기간에 진리의 씨를 뿌리는 데 바로 이 소책자가 사용되었다.
물론, 젊은 형제들은 피난을 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 중립이 때때로 문제가 되기는 하였지만, 박 종일 형제가 경험하게 된 바와 같이 흔히 생명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공산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했을 때 그는 고등 학교 교사이고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리교인인 조 영하 씨와 함께 3개월 반 동안 한 자매 댁에서 숨어 지냈다.
북한의 비밀 경찰이 그들이 숨어 있는 방의 문을 열고 그들을 덮친 것은 불과 며칠 후의 일이었다. 그 경찰은 이들이 간첩이거나 남한 군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이들의 손에 총자국이 있는지 살피기 위하여 그들의 손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전쟁에 참여할 수 없어서 피난을 갈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그에게 설명하였다. 경찰은 내일 자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결코 이 집에서 떠나지 말라고 명하면서 돌아갔다. 경찰이 돌아가자, 이들 두 사람은 즉시 증인들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사진들을 없애고 다음날 경찰이 오면 그에게 증거하기로 단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납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 경찰관은 다른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박 종일 형제는 그들에게 거의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마치 공개 강연을 하는 것처럼 증거를 하였다. 그들은 중단시키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들었으며 매우 흥미를 느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그들이 들은 소식을 만족해 하면서 돌아갔다. 이틀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또 증거할 기회를 가졌다. 그 후에는 아무도 그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조 영하 씨는 믿음에 큰 힘을 얻었으며 바로 진리 안으로 들어왔다.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1951년 3월 31일에 UN군이 38선을 넘어 다시 북진을 하게 되었다. 서울은 다시 UN군 사령부 아래 있게 되었다. 박 종일 형제는 이제 지금까지 숨어 있던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선교부를 살펴보기 위해 도심지를 통과하는 도중 UN군에게 정지를 당하였다. UN군의 일원인 한국군이 그를 수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럴 만도 하였다! 그는 3개월 이상이나 방 안에서 숨어 있어서 얼굴은 창백했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아는 박 형제는 미군에게로 가서 자기는 여호와의 증인이고 워치 타워 미국 선교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으며, 지금 그 선교인들의 집을 살피기 위하여 가는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군인들은 그의 말을 믿고 그를 가게 하였다.
피난 생활 가운데서도 일이 계속 전진하다
피난한 형제들은 이제 주로 다섯개의 주요 도시 곧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및 군산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도시들의 인구는 보통 때보다 여러 배로 불어났으며,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기댈 곳이 있으면 그것이 길가에 있는 의지간이든지 산기슭이든지 동굴이든지 어디나 살 집으로 삼았다.
현재 87세로서 아직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는 김 치덕 자매는 처음으로 대구에 도착한 증인들 중에 끼어 있었다. 이 자매의 아들들 중에서 두 아들이 전쟁중에 사망하였다. 다른 두 자녀와 함께 이 자매는 즉시 증거를 시작하였다. 가져온 서적을 순식간에 모두 다 전하고 둘째 주일에는 재방문을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였다.
대구로 피난한 이 인원 형제는 김 자매를 포함하여 다른 10여 명과 함께 집회를 가졌다. 집회와 야외 봉사에서 이들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와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의 각 장을 등사한 것을 사용하였다. 피난 상태에서 처음으로 회중이 조직된 곳은 대구시였다.
북한에서 월남한 옥 례준 형제와 그의 아내 이 정상 자매는 전주에 정착하였다. 이 자매는 그 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중앙 장로 교회에 있는 네명의 여 집사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읍니다. 그들은 성서만 사용하고 협회의 출판물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았읍니다. 교직자들은 우리를 피난민이라고 얕보고 우리의 전도 봉사를 중단시키려고 하였읍니다. 깡패를 보내 우리에게 폭행을 하게까지 하였읍니다. 네 집사는 우리를 도와주어 깡패를 피하게 하였고, 교직자의 악착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네 집사는 성서 연구를 계속하였읍니다. 그 결과로, 마침내 20명이 그 교회에서 나와 진리 안으로 들어왔읍니다.”
다시 선교인의 도움을 받게 되다
계속적인 전시 상태 아래 선교인이 한국에 입국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절차상의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돈 스틸 형제는 마침내 1951년 11월 11일에 혼자서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방침은 한 선교 단체에 한 사람씩만 그리고 여자는 입국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스틸 형제의 아내 얼린 스틸 자매는 1년 후에야 입국해서 그와 합류할 수 있었다.
1951년 11월 17일에 스틸 형제는 미군 본부로부터 서울을 방문할 허락을 받았다. 스틸 형제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본 것에 대해 이렇게 보고한다.
“그날 오후에 우리는 서울시를 가로질러 선교부로 걸어갔읍니다. 큰 건물들도 거의 모두 비어 있었읍니다. 그 도시는 시골처럼 고요하였읍니다. 차량이라고는 군용뿐이었읍니다. 먼 거리에서 나는 선교부 건물을 볼 수 있었읍니다. 그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었으나 선교부 건물은 그대로 서 있었읍니다. 그렇지만 한 모퉁이는 포탄을 맞아 벽돌 벽에 6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려 있었읍니다. 유리 창문들은 모두 떨어졌고 천정은 내려 앉았으며, 대부분의 문들은 떨어져 나갔으며, 철조망은 제거되어 있었읍니다.”
그날 저녁에 대부분이 자매들인 35명의 증인이 모여서 스틸 형제의 봉사 강연을 들었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야외 봉사를 위한 마련을 하였다. 그 아침에 집단 증거를 위하여 18명이 나왔다. 그의 방문 주간이 끝나기 전에, 24명의 전도인이 야외 봉사 시간을 보고하였다. 전쟁 기간 전체를 통하여 서울에 남아 있던 용감한 자매들은 이제 그들의 노고에 대한 열매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전도인들은 침례를 받기 원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이제 UN군 전용 목욕탕이 된 공중 목욕탕 시설뿐이었다. 그날 UN군 군인들이 목욕하러 오기 전에 그 목욕탕에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 마련을 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12월 29일 토요일 오전 8시가 되기 전에 27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다. 그 중에는 이전 왕비의 여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였기 때문에 그곳은 전국의 형제들을 섬기는 데 매우 실용적인 곳이었다. 새로운 등사기를 미국으로 주문하여 미군 군사 우편을 통하여 수취하였다. 놀랍게도 형제들은 처음으로 나온 한글 타자기를 구할 수 있었다. 한국 증인에게는 또 하나의 도약이었다!
1951년 12월과 1952년 1월에 스틸 형제는 회중과 집단이 있는 모든 곳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라. 전쟁 전에는 서울에 총 61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한 회중만 있었을 뿐이다. 1952 봉사년도 말에는 다섯개 회중에 192명의 최고 전도인이 있게 되었다. 아직 전시인데도 그리고 형제들의 상당수가 피난 생활을 하는 중인데도 그러하였다.
이 때에 협회는 구호 의류 보내기 운동을 벌여, 미국으로부터 2톤의 의류와 구두를 보내 주었다.
마침내 「파수대」를 인쇄하게 되다
1952년 9월은 증인들에게 특별한 달이었다. 그 달에 「파수대」가 정부에 등록되어 공식적으로 발행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원지에 손으로 써서 등사하였으나, 1953년 2월부터는 원지에 타자를 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만 16면으로 약 700부를 발행하였다.
1954년 1월 1일호부터 「파수대」는 드디어 인쇄 잡지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첫 인쇄는 2,000부였고, 1955년 1월호부터 20면으로 증면하여 5,000부씩 인쇄하였다. 서울에서 외부 인쇄소에서 인쇄하는 월 1회 발행 잡지였다. 그러나 1961년에 월 2회간이 되었고 1967년 1월호부터 24면으로 증면되었다.
한국에서 법적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기 위하여는 증인도 법인을 조직해야 하였다. 그래서 1952년 10월 30일에 사단 법인 왙취 타워(현재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설립되어 문교부에 등록되었다. 여섯명의 임원과 9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1969년 2월 25일에 정부 규정에 의하여 이 등록이 문화 공보부로 옮겨졌으며, 현재까지 법적 기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제 전쟁 전에 선교인들이 사용하던 부동산을 법인체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지부가 설립되다
한국 형제들에게 보낸 1952년 10월 18일자 협회 편지에는 “한국에서 일이 훌륭하게 수행되고 있어서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였다. 그 후 1953년 7월 27일에 불안한 휴전 협정이 조인되었고 남북한 사이에 비무장 지대가 설정되었다. 현재까지도 남북한 사이나 이산 가족들 사이에 전혀 통신을 교환할 수 없다.
그 다음 달 말에 스틸 형제 부부는 뉴욕 대회를 참석한 후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한국에서 7개 회중에 417명의 전도인으로 1953 봉사년도를 끝맺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협회는 한국 조직이 더는 미국 지부 아래 있지 않고 1953년 9월 1일부터 한국 지부가 되게 하였다. 돈 스틸 형제가 지부의 종이 되었다. 그는 지금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한국 지부는 전쟁 전에 선교부로 사용하던 서울에 있는 건물로 이사하였다. 꼭 필요한 수리만 하고 들어갔다. 물은 아직도 길어다 써야 하였고 전기는 언제나 부족하였다. 선교인들은 2층을 차지하였고, 1층은 지방 회중에서 집회를 위하여 사용하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으로부터 받은 도움
지금까지 여러 해에 걸쳐 한국에서 복무해 온 수만명의 미군 가운데는 진리에 관심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영적으로 발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생활에 필요한 변화를 한 다음 활동적인 증인이 되었다.
미군 일등 중사 노버트 매츠는 그중 두드러진 예이다. 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원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 복무중에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한국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그는 사실상 한국인과의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또한 신권 전도 학교에서 형제들을 도왔다. 어떻게? 그 당시에는 한국어로 된 신권 전도 학교 교재가 없었다. 그러므로 통역을 통하여 그는 학교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왔다. 그는 또한 1953년 6월 30일에 일단의 침례 지원자들이 침례를 받도록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군 차량을 이용하여 그들을 침례장으로 수송하는 것을 도와 그날 52명이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선교인들이 서울에 주재할 수 없었던 기간에 그는 특히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 매츠 형제는 미국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노버트 매츠의 성서 연구생 중에는 한국군의 젊은 의무병인 전 영순이 있었다. 그는 1953년에 침례를 받고 얼마 후에 천직으로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길르앗 졸업생으로서 그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으며, 현재 벧엘 감독자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바로 그해인 1953년에 박 종일 형제는 두번째로 군복무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또다시 이 형제들과 또 다른 형제들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인 중립의 본을 세웠다.
최초의 큰 대회
1953년 가을에 마침내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에서도 1954년 8월 6-8일에 지역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재동 국민 학교 강당이 대회 장소였다. 처음으로 형제들은 전국에서 모였다. 예상 참석자 수는 대략 7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첫날에 1,043명이 참석하였으며, 일요일 공개 강연에는 그 수가 1,245명으로 증가하였다. 제 2차 대전의 어두운 날과 그 후에 있었던 한국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는 형제들의 두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글썽였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편으로 모여들 날이 있을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회에서 두드러졌던 일은 처음으로 있었던 대거 침례였다. 소방서장인 한 자매의 남편은 우리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쓰레기로 가득 찬 학교 수영장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물을 가득히 채우도록 마련해 주었다. 그날 284명 즉 총 참석자 수의 23퍼센트가 침례를 받음으로 참석자 모두를 기쁘게 하였다. 이제 지부에는 이 새로운 사람들이 모두 영적으로 진보하도록 도와야 할 큰 일이 놓여 있음이 분명하였다.
길르앗이 보낸 더 많은 도움
1955년 3월에 두번째 선교인의 물결이 한국에 도착하였다. 밀튼 해밀튼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키드 케네디와 그의 아내 에블린, 칼 에머슨, 노리스 피터스, 엘레인 쉐이트(현재는 네스), 드루질라(드루) 크레이그(현재는 영버그)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여의도 비행장으로 나가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 당시에는 지금은 도시 속의 도시가 된 여의도 한강 모래 사장 위에 비행장이 있었다. 이 새로운 선교인들 중에는 한국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미소와 기쁨의 눈물 그리고 손짓으로 의사 소통이 충분하였다. 이제 지부 사무소는 다시 일꾼들로 들끓게 되었다. 지부 사무소와 선교부가 함께 한 건물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인들이 도착한 지 한달 후인 1955년 4월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순회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형제들에게 참으로 새로운 경험과 흥분을 가져다 주었다! 선교인들까지도 통역을 사용하여 프로그램의 일부를 담당하였다.
부산 선교부
1955년 가을에 서울에서 남쪽으로 40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항구 도시 부산에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그 당시 부산 인구는 약 1,100,000명이었고 증인의 회중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선교부는 해밀튼 형제 부부와 에발린(명혜) 박(현재는 에머슨) 자매 그리고 한명의 한국 자매로 이루어졌었다.
피난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부산에서 적당한 주거 시설을 얻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그만 집을 찾아냈다. 침실이 두개 있고 식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그만 방과 주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낭하가 있는 2층이었다. 상수도는 설치되지 않았고 전기도 귀하였다. 그래서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물을 음료수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끓이거나 소독을 해야 하였다.
해밀튼 형제는 “그때 형제들은 가진 것은 없었지만 따듯하고 우정적이었고 야외 봉사에 대한 열이 매우 높았다”고 말한다.
총 17명의 선교인이 부산에서 봉사하였었으며, 오늘날에는 인구가 3,500,000명인 그 도시에 51개 회중이 있다. 그 도시의 형제들은 항상 그들의 도시에 선교부가 있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였다.
이정표가 된 한 손님의 방문
중대한 때가 도래하였다. 홀리스터 형제 시대 이후로 세계 본부로부터 처음 있는 공식 방문이었다. 1956년 4월 27일에 그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이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1,500명 전도인 중 500명이 그를 영접하였다. 브루클린 사무실에 있는 돈 애덤스 형제와 (현재의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 형제가 그를 수행하였다. 배리 형제는 동양 지구 봉사를 위해 훈련을 받고 있었다.
노어 형제의 6일간의 방문은 한국의 신권 역사에 이정표가 되었다. 전국 대회에 참석한 1,330명의 청중에게 행한 그의 첫 연설은 그들이 참으로 여호와의 세계적인 조직의 일부라는 것을 재확신시켜 주었다. 이 대회에서는 303명이 봄의 차가운 한강 물에서 침례를 받았다. 또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온 인류를 창조주 아래 하나가 되게 함”이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을 듣기 위하여 3,473명이 서울 운동장 수영장에 모였다.
노어 형제는 한국에서 이제 중요한 일은 이들 새로운 사람들이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돕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주된 책임을 지부 성원들과 선교인들의 어깨 위에 지워주었다. 그는 또한 일부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이 너무 빨리 침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사람들이 진리에서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부 성원들에게 침례는 다만 순회 대회나 더 큰 대회에서만 주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도움이 되었다. 관심자들은 이제 침례를 받기 전에 더 많이 연구하고 더 오래 연합해야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증인으로서의 미래의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였다.
성서 교육에 있어서의 유리한 점
1956년에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한국어판 발행으로 성서 연구 봉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문맹률이 단지 8퍼센트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지부에서는 읽고 쓰기 반을 마련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것은 물론 사람들에게 성서 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의 유리한 점이며, 전도인들은 성서 교육을 받을 만한 능력이 있다.
또한 흥미있는 것은 종교 신도들의 분포이다. 42,000,000명의 인구 중 약 20퍼센트만이 불교 신자들이고 또 다른 20퍼센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고 주장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샤머니즘이 아직도 전국적으로 퍼져 있고, 유교가 대다수의 사람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전도인들은 종교적으로 혼란을 느끼고 있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서 교육을 실시하는 데 깨어 있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1956년에 야외에서 이미 11명의 선교인이 활동하고 있을 때 12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자가 임명되었다. 현재 거의 400명에 이르는 이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훌륭한 열매를 맺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도시 인구 가운데서 큰 증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현대 통신 및 교통 수단에 힘입어 가장 작은 촌락과 읍에까지도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어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열렬한 일꾼들의 한 가족
순회 감독자인 박 영신 형제는 특별 파이오니아의 노력과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으로 인하여 그의 가족이 어떻게 참 숭배를 택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야기는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 순천에는 세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있었읍니다. 이웃집에 놀러 갔던 어머니는 한 특별 파이오니아에게서 「파수대」 잡지를 받았읍니다”라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누나와 나는 어머니에게 증인들은 무식한 이단이니까 그들에게서 그런 것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들이 성서를 사용하는 매우 좋은 사람들로 보인다고 주장했읍니다. 바로 그때 두명의 여자 증인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읍니다. 나는 그들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읍니다. 그들의 설명이 이치적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받았고 그들과 성서를 연구하는 데 동의하였읍니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서 지식을 증가시키기 위해서였읍니다.
“내가 지금까지 거짓 교리를 배워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나의 양심을 괴롭게 하였으며, 나는 마침내 교회를 탈퇴하기로 결심했읍니다. 내가 ‘목사’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왜 하필이면 여호와의 증인이오? 개종을 하려면 감리교나 성결교로 갈 것이지. 종교를 잘못 택했오.’
“1957년 10월에 어머니와 누님 그리고 나는 함께 침례를 받았으며, 그 후에 아버지와 다른 동기들—모두 일곱명의 친형제 자매들이 침례를 받았읍니다. 어머니는 73세로서 아직도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으며, 누나는 1967년부터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왔읍니다. 누나는 그동안 약 60명이 헌신하고 침례를 받도록 도왔읍니다. 나의 형 둘은 여행하는 감독자입니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었다
1957년 1월에 또 하나의 전국 대회가 개최되도록 마련되었다. 그때 현 협회장인 프레드릭 W. 프랜즈 형제의 첫 방문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대회장으로 직행하였으며, 한국을 방문하는 데 63년이나 걸리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함으로 청중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모니카를 꺼내서 왕국 노래를 몇 곡 불어 청중을 즐겁게 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수일간 프랜즈 형제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형제들이 따라가 끝없이 성서 질문을 쏟아 놓았다. 하루는 오후 한시에 점심 마련이 있었다. 모두 맛있는 한국 음식을 즐긴 다음에 형제들은 성서 질문을 시작하였으며, 그날 저녁 여섯시까지 프랜즈 형제는 대답하기에 바빴다. 그래도 프랜즈 형제는 지친 기색이 없었으나, 그의 통역은 지쳐서 다른 통역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8년 성의 국제 대회
브래들리 네스와 빌 필립스 형제 두명의 새로운 선교인이 도착하여 서울의 지부 시설을 돌볼 수 있어서, 11명의 다른 선교인이 뉴욕 시(미국)에서 개최된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들 외에도 14명의 한국 대표자가 그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에, 1956년에 처음으로 지부에 상주하는 번역자가 된 박 종일 형제와 함께 김 장수 형제 그리고 김 경희, 이 혜영 두 자매가 길르앗 학교에서 수학하도록 선택되었다.
한국에서는 10월에 성의 국제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노천 경기장에서 열렸으며, 싸늘한 가을 날씨였는데도 불구하고 일요일에는 2,800명이 참석하였고 153명이 침례를 받았다.
순회 봉사의 확장
지부에는 항상 자격있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부족하였고 길르앗 졸업생들을 순회와 지역 봉사에 임명함으로 그 일부를 충당하였다. 이들 중에는 1955년에 한국에 온 노리스 피터스와 칼 에머슨 형제들이 있었다. 회중을 방문할 때 그들은 언어에 숙달할 때까지 처음에는 통역을 사용해야 했다. 현재 봉사부 감독자이며 지부 위원회의 한 위원인 채 수완 형제는 그가 연구를 시작했을 때는 육군 장교였다. 1957년에 그는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에 길르앗에서 수학하였다.
1958 봉사년도 말이 되자 54개 회중과 여러 격지 집단에 최고 2,724명의 전도인이 있어서 5개의 순회구를 형성하게 되었다. 야외에서의 이러한 증가로 인하여 자격있는 더 많은 형제들을 찾아내서 여행하는 봉사자들의 수를 증가시켜야 하였다. 옥 례준 형제 부부가 순회 봉사에 임명되었으며, 밀튼 해밀튼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행하는 선교인 부부가 되었다.
해밀튼 부부에게 있어서 이것은 지방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고 선교부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에 젖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으로서 그들은 왕국회관 집회에서 바닥에 앉는 습관을 배워야 할 뿐 아니라 바닥에서 먹고 잠자는 일상 생활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만 해도 수도물이 귀하였고, 수세식 화장실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선교 봉사의 일부였다. 현재 해밀튼 형제는 지부 위원과 공장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박 이균 형제는 1956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으며, 순회 봉사하는 선교인과 동행하면서 통역하는 일을 하였다. 길르앗 교육을 마친 후에, 그는 지금 지부에 다시 들어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1966년에 제리 틸릭과 그의 아내 바바라가 한국에 도착한 후에 그들은 서울에 있는 한 회중에 임명되었다가 그 후에 순회 봉사를 하게 되었다. 1967년에는 짐 틸릭, 머린 스토인, 그리고 듀랜드 노르봄과 그의 아내 레이철이 순회 봉사에 합세하였다. 노르봄 부부는 현재 공도 벧엘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노르봄 자매는 회중을 방문했을 때에 사람들에게 받은 몇 가지 질문들이 생각 난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서양 여자가 시골에 나타나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보였으며, 매우 사적인 질문을 받는 일이 흔하였읍니다. ‘나이는 몇 살입니까?’ ‘결혼은 했읍니까?’ ‘자녀는 몇이나 있읍니까?’ 그 다음에는 ‘왜 자녀가 없읍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이 이어집니다. 한 곳에서는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기 위하여 미국 부부가 어린이들을 모집하러 왔다는 소문이 나서 몇명의 여자들이 자기 자녀들을 더 풍요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보내기 위하여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읍니다.”
오늘날 한국의 43개 순회구 가운데 여행하는 봉사를 하며 섬기는 선교인들은 요셉 브라잇프스(오스트리아), 페리 후무아드와 그의 아내 젤린(필리핀) 그리고 존 웬트워스와 그의 아내 수전(미국)으로서, 지난 14년 내지 17년간 봉사하여 왔다.
소요 사태로 아슬아슬했던 일
1960년 4월 13일에 밀턴 헨첼 형제가 탄 비행기가 김포 국제 공항에 착륙하였다. 지부에 대한 그의 지구 방문은 4일간의 대회와 겹쳤으며, 그 대회 첫날에는 2,385명이 참석하였다.
“평화를 좇는” 전국 대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정부는 수천명의 학생들에 의한 유혈 소요 사태를 진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대회장 밖에 있는 거리에서 바로 치고 받는 일이 있었다. 대회 참석자는 공개 집회의 신기록으로 4,000명 이상으로 증가하여 삼일당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회가 끝난 다음날인 월요일 저녁에 헨첼 형제는 선교인들인 브래들리 네스와 엘레인 쉐이트의 결혼식을 주례하였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피로연장으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헨첼 형제와 몇명의 선교인들이 결혼식장을 나와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그들은 길 한쪽으로 몰리는 소요 군중인 수천명의 학생들과 또 다른 쪽에서 마주 오고 있는 트럭에 가득 실린 무장 경찰관 사이에 끼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헨첼 형제와 그의 동행자들은 쏜살같이 길을 건너 양편의 충돌 직전에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참으로 놀랍게 위기를 모면하였다! 식당 안에 들어가서야 다시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다섯명의 길르앗 졸업생이 더 한국으로 임명되었으나, 정부는 그들에게 입국 사증을 내주지 않았다. 반대자들이 증인을 혁명주의자로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돈 스틸 형제는 1960년 4월 6일에 월터 맥코노이 주한 미대사와 회견을 하도록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스틸 형제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혁명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하였다. 자기가 한 동유럽 국가에서 근무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동독에서 증인들이 얼마나 박해를 받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한국은 주권국이기 때문에 정부가 원하는 사람에게 입국 사증을 내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틸 형제에게 기꺼이 외무부 장관과의 회견을 주선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회견 날짜는 1960년 4월 19일 화요일로 정해졌다. 헨첼 형제는 미국 협회의 이사이고 아직 한국에 있었으므로, 그도 외무부 장관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국내 형편은 매우 어지러웠다. 정부는 소요 사태를 진압할 수 없었다. 화요일이 되었다. 형제들은 도시 중심부에서 외무부 장관과 회견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곳은 소요가 가장 격렬한 곳이었다. 두려워할 줄을 모르며 또 약속을 어기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외무부로 향하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건물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고 학생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건물 주위는 모래 주머니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날의 회견이 불가능한 것이 분명하였다. 헨첼 형제와 스틸 형제는 급한 걸음으로 부상자들의 곁을 지나 골목길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난 후에 외무부에서는 입국 사증을 거절한 “명분”이 “제거되었음”을 통지하고 입국 허가를 해주었다. 그해 6월에 러셀 맥피와 그의 아내 도티, 드로리스 웹(현재는 피터스), 오드리 웬델(현재는 홈스), 그리고 로이스 다이크(현재는 렌터)가 선교 봉사를 위해 도착했다. 광주시에 또 다른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일시적인 제한 조치
1960년 봄에 이 승만 정부가 무너진 지 몇달 후에 선거에 의한 정부가 들어섰으나, 1961년 5월에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전복되고 말았다. 또다시 전국은 계엄령하에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집권자에 의하여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대규모 종교 집회까지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회중 집회 참석수는 감소되지 않았다.
제한 조치가 해제되자 모든 종교 단체는 새로운 정부에 재등록을 해야 하였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서류 준비를 요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1961년 11월 25일자로 사단 법인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로 문교부에 다시 등록하였다.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
1963년에 한국에서도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가 개최된다는 발표가 있자 즐거움이 고조되었다. 그 당시 한국은 개발 도상국이었다. 지금은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입국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19개국에서 온 400명이 넘는 방문객은 가장 큰 관광단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한국 증인들은 모두 외국으로부터의 형제들의 도착을 기다렸다.
94명의 외국 대표자를 태운 첫 번째 비행기가 노어 형제 부부와 함께 1963년 8월 24일 아침에 도착하였다. 외무부 의전국장이 공항에 나와 노어 형제 부부를 영접하였다. 그리고 노어 형제 부부는 승용차로 앞서 떠났다. 그러나 다른 대표자들을 가득 태운 버스는 특별 의전 경찰의 호위를 받아 그 승용차를 앞질러 간격을 더욱 넓히며 쏜살같이 앞서 달려갔다.
612명이 침례를 받은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가장 큰 수였다. 한국어판 「깨어라!」가 이제 월 2회로 발행된다는 발표가 있어 참석자들을 크게 기쁘게 하였다. 1959년 9월 8일호부터 발행되어 온 「깨어라!」는 월 1회만 나왔었기 때문이다. 공개 강연 참석자는 8,975명으로 불어났으며, 이들 중 3,000명은 관심자였다! 그러나 예사로이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은, 그해에 전도인의 수가 12퍼센트나 증가하였다는 것과 기념식 참석자 수가 9,893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지부의 첫째 확장 공사
전도인의 놀라운 증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지부 시설을 확장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15년도 안 되는 기간에 한국 전쟁 전의 단지 수십명의 전도인으로부터 1964 봉사년도가 시작할 때는 5,000명 이상으로 급성장하였으니 말이다. 1964년 8월에 기존 바닥 면적의 3배나 되는 3층 건물로 증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벧엘 가족은 1965년 5월 1일에 새집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왕국회관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의자가 놓인 회관이 되었다.
야외에서 전할 종이 표지 서적
1966년 7월 19일은 또 하나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때부터 협회의 한국어판 서적은 모두 한국에서 인쇄하게 된 것이다. 더는 미국 지부에서 양장본 서적을 기증 품목으로 보내는 일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서적은 신문 용지에 단색으로 인쇄된 것으로서 종이 표지였다. 양장본 서적의 생산비가 높아서 대중에게 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아뭏든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는 소식이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 한국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서적들은 종이 표지였다. 첫 출판물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이었다.
1969년 1월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 초판 50,000부가 발행되었다. 그러나 몇달도 못되어 즉시 재인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제들은 이제 야외에서 비싸지 않은 이 책을 가정 성서 연구 교재로 잘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서 연구 수는 급증하였다! 그동안 진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출판물을 통하여 성서의 기본 교리를 배웠다. 현재까지 이 책이 한국에서만도 2,200,000부 이상이 인쇄 배부되었다! 전도인 수는 1968년 말에 겨우 8,000명을 넘는 수로부터 1982년에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이 발행될 때까지 30,000명이 넘을 정도로 증가하였다.
1969 봉사년도 말에 10,610명이라는 전도인의 제 22차 연속 신기록에 이어 10월에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개최되었다. 14,529명의 청중에게 프랜즈 형제가 「성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책을 발표하였다. 처음으로 영어판과 동시에 출판된 한국어판이었다.
양심 문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국민 개병 제도가 실시되고 있고, 교직자나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막론하고 아무도 면제를 받을 수 없다.
1971년 2월 22일자로 지부는 정부로부터 한통의 등기 우편물을 받았다. 그 공문은 증인들이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나 선거에 투표하는 것을 금하도록 가르치고 군 징집을 기피하도록 고의적으로 고무한다고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지부는 여호와의 증인이 무정부주의자들이 아닌 이유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는 성서적 근거를 설명하였다. 지부는 증인들이 투표나 징집 문제를 포함하여 정부에서 하는 어떠한 일도 방해하는 일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해에 걸쳐 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형제들은 이 쟁점들에 대하여 담대히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형제들은 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또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잃은 다른 형제들은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큰 대회
1973년 여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번째 국제 대회의 날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이 “하나님의 승리” 대회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열렸던 단일 대회로는 가장 큰 대회였다. 29,000명 이상이 참석하였고 2,002명이 침례를 받았다.
이 대회의 감독자였던 박 이균 형제는 이렇게 보고한다. “국내의 불안 상태 때문에, 당국에서는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읍니다. 그 결과 130명의 사복 경찰관이 운동장 이곳 저곳에 배치되었고, 또 대회 각 부서에는 두명씩 배치되었읍니다. 경찰관은 우리가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보다 더 잘 순종한다고 말하였읍니다.
“옥외에서의 운동 경기나 다른 집회가 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하면, 모든 군중이 출구로 모여들어 수라장을 이룹니다. 대회의 한 회기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경찰은 급히 모든 출구를 열어 놓았읍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읍니다. 그들은 모두 우산을 펴들고 조용히 앉아서 프로그램을 경청하였읍니다.
“그뿐 아니라 운동장장은 운동장이 이렇게 깨끗해 본 적이 없었으며, 만일 한달에 한번씩 여호와의 증인에게 빌려 줄 수만 있다면 이 운동장은 항상 깨끗할 것이라고 말하였읍니다.”
염려의 원인
1975년 봄에 모든 일은 순조롭게 보였다. 벧엘 가족은 널찍한 새로운 시설로 옮겼으며, 로이드 배리 형제가 일본에서 방문하여 봉헌사를 하였다. 또한 1975 봉사년도는 훌륭한 야외 봉사 보고로 끝을 맺었다. 그해에 8,120명이 침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단지 3년 동안에 19,600명이 침례를 받은 것이다. 한국 증인들의 반수 이상이 3년도 못되는 기간에 진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1976 봉사년도가 시작되자 처음 몇달 동안 전도인 수와 가정 성서 연구 건수가 감소하였다. 이러한 감소 추세는 3년 이상이나 계속되어 전도인 수가 26퍼센트나 감소되었으며, 1975년 8월의 32,693명에서 1978년 11월의 24,285명으로 최저 수자가 되었다. 기념식 참석자 수도 1975년에 68,000명 이상이던 것이 1978년에는 49,545명으로 떨어졌다. 지부 형제들은 당혹하였다. 추세는 역전될 것인가?
물론, 그들이나 협회에서는 그러한 추세를 그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1977년 4월 4일자 협회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형제들이 가르칠 때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아마 일부 전도인들은 1975년이라는 해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은 기초가 놓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기초는 물론 그리스도 예수와 대속 희생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며, 헌신은 이해력을 가진 것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솔직한 관찰이었다! 성서를 가르치는 일부 전도인들이 특정한 해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새로 침례받은 많은 사람들은 감정의 물결에 따라 진리를 받아들였다. 일부 장로들까지도 그들의 희망을 1975년에 맞추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에서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물질주의의 침투와 국가주의의 물결이 가세하였다. 그 결과는? 형제들 사이의 냉담이었다.
돌아오는 길, 멀지만 확실하다
믿음이 튼튼한 24,000명 이상의 증인은 특정한 해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전도인의 신기록으로 돌아오는 길은 8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려 1983년 8월에 가서야 비로소 달성되었다.
이제 감정적으로 진리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침례를 받는 사람들은 이해력을 가지고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무활동이 된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갈 만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곳뿐이라는 것을 어려운 방법으로 알게 된 것이다.
동양에서의 첫 대회 회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순회 대회와 특별 행사를 위하여 적당한 장소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해결책으로서 형제들은 직접 대회 회관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설계나 건축은 단순한 것이었지만 참석자 모두가 편안하게 수용되기에는 충분한 대회 장소였다. 그리하여 1976년 4월에 부산에서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 회관이 봉헌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총 전도인의 약 75퍼센트가 사용하는 일곱개의 대회 회관이 있다.
잡지 발행의 조정
1980년에 제정된 새로운 정부 규정으로 인하여 지부에서는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 발행을 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가지 잡지를 발행하는 단체에게는 한 가지 잡지만 계속 발행되는 것이 허락되었다. 「깨어라!」 잡지는 1980년 11월에 정부가 발행 등록을 취소시킨 67개 정기 간행물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국 지부에서는 그 결정을 번복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2개월 후에 갑자기 당국으로부터 「파수대」의 별책으로 발행할 수 있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성령의 활동이 분명하였다! 이 별책은 「파수대」의 발행 일자와 같이 1일과 15일을 발행 일자로 해야 하였다. 이 방침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선교인의 입국 금지
야외에서는 더는 외국 선교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파이오니아들이 충분히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들을 훈련시키고 영적으로 세워 주기 위하여 외국 선교인들이 필요하였다. 이 점을 고려하여, 협회는 1977년 가을에 5명의 선교인을 더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부 형제들은 크게 놀랐다. 이미 국내에서 봉사하는 17명의 선교인은 계속 체류할 수 있지만, 새로운 워치 타워 선교인의 입국은 금지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현재 있는 선교인들도 일단 출국을 하면 재입국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7년 10월부터 당국은 선교인들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재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게 하였으며, 그들은 이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
거대한 공사
1979년 여름에 통치체는 지부로 하여금 지부 이전 장소를 물색하도록 허락하였다. 1년에 걸친 물색 끝에,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에 소재하는 약 만평에 달하는 농지와 임야로 된 부지를 찾아내게 되었다. 이곳이 공해가 없는 환경에 지부가 들어설 수 있는 최적지였다.
이 확장 공사는 기존 지부와 비교할 때 거대한 규모였다. 지부는 이제 잡지를 직접 인쇄하는 일과 앞으로 서적도 인쇄할 준비를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1982년 5월 8일에 흥분이 고조되었다. 이제 건물이 준공되어 세계 본부로부터 방문한 프랜즈 형제와 배리 형제의 특별 연설로 봉헌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형제들의 도움과 지방 외부 인쇄소의 협조로 이제 지부는 자체 인쇄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매우 짧은 기간에 잡지 인쇄는 매호 거의 200,000부로 증가하여 하루 종일 모든 인쇄기가 바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부가 공도로 이전한 지 3년 후에 통치체 성원인 앨버트 슈로더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방문하여 1985년 5월에 증축된 부분을 봉헌하였다. 증축 면적은 기존 바닥 면적의 배가 되는 약 9,300평방 미터(약 2,800평)이었다. 전도인의 수는 1982년에 30,000명으로부터 1985년에 39,600명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놀라운 성장이었다!
서울은 한국의 수도일 뿐 아니라 또한 사업 중심지이기 때문에, 법인 사무실을 서울에 그대로 두는 것이 필요하였다. 서울에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 그리고 서적 발송을 위한 충분한 창고가 있는 훌륭한 새 건물이 건축되어 1986년 12월 20일에 봉헌되었다. 4명의 벧엘 가족 성원이 그곳에서 생활하며 일한다.
고속 윤전 인쇄기가 돌고 있다
거의 600년 전에 한국인들은 최초로 철제 이동 활자를 발명함으로 인쇄 기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 증인들은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최첨단 인쇄 기술을 사용한다. 컴퓨터 조작 장비에 의한 제판으로 미쓰비시 권지 오프셋 윤전 인쇄기는 매분 500부의 천연색 32면 잡지를 인쇄해 내고 있다. 이 시설은 충분한 잡지와 서적을 인쇄해 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러한 큰 인쇄 시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여름에 로이드 배리 형제가 지구 감독자로 방문해서 인쇄량의 포화 상태를 보게 된 때부터였다.
그 당시 인쇄 공장은 전혀 공간의 여유가 없었다. 길이가 25미터가 넘는데다 중량이 130톤이나 되는 인쇄기를 들여놓을 자리는 더더군다나 없었다. 이것은 또 다른 건물을 증축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과 4년 만에 공도에 두번째 확장 공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어 잡지는 영어판보다 3개월 늦게 발행되어 왔었다. 그러므로 잡지를 영어판과 동시 발행하게 될 전망만 해도 모든 노력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윤전기를 수입하는 데는 여러 가지 문제가 가로막혀 있었다. 정부 방침은 수입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 부처로부터 수입 추천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1985년 여름에 그 제한이 해제되어, 지부의 형제들은 즉시 수입 면장을 취득하였다. 이 면장을 취득한 지 6주일도 못되어 법이 다시 바뀌어 추천을 받는 일이 다시 요구되었다. 성령이 길을 터주었고, 형제들은 신속히 행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지부에서는 오늘도 전도인의 손에 증거를 위해 사용할 서적을 풍부히 공급할 수 있도록 고속 윤전 인쇄기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전망
한국은 조선 곧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여러 해 전에 한국 형제들은 어떻게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인지, 여호와께서 이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택하실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였다.—마태 25:32.
오늘날 전구역의 7퍼센트만이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며, 이 구역도 대부분 여름 동안이면 전도인들에 의하여 돌보아진다. 도시의 구역들은 흔히 한달에 한번 이상 도는 경우가 많다. 48,000명이 넘는 전도인 가운데서, 매달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는 전도인과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전도인이 4분의 1이 넘음으로 한국인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한국인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양”을 택해 오신 것이다.
성서 필자 한 사람이 이렇게 표현한 바와 같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씨는 계속 뿌려졌고 수확은 풍부하였다. 장래는 밝다. 여호와의 영만이 이곳 한국에서 이러한 일이 있게 할 수 있었다.—전도 11:6.
[각주]
a 스틸 자매는 한국에서 36년간 충실하게 선교 봉사를 한 후에 여러 해 동안의 투병 끝에 1985년에 사망하였다.
[193면 네모와 삽화]
1987년 5월 23일에 공도 지부의 3층 증축 시설이 통치체 성원인 밀턴 G. 헨첼 형제에 의하여 봉헌되었다. 이 새 공장 건물에는 130톤에 달하는 새로운 4색 권지 오프셋 윤전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다. 지부에서 있은 헨첼 형제의 연설에는 2,060명이 참석하였다. 이 건물은 1982년 이래 지부가 두번째로 증축한 것이다
[삽화]
1982년에 봉헌된 원 숙소 건물
[삽화]
사무실 건물; 공장(중앙에 있는 우유빛 부분); 그리고 오른쪽은 1985년에 봉헌된 숙소 건물
[삽화]
오른쪽. 1987년에 봉헌된 새 건물
[삽화]
한국 지부 시설 조감도
[136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한국
중국
소련
황해
평양
사리원
비무장 지대
서울
인천
한강
안성-공도
평택
대전
군산
대구
전주
부산
광주
제주
동해
일본
[143면 삽화]
1930년대 초에 왕국 소식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한 콜포처, 이 시종 형제
[146면 삽화]
옥 응두, 옥 례준 및 옥 지준.(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53면 삽화]
최 성규, 믿음을 위하여 1941년에 사망하기까지 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그의 믿음은 형제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157면 삽화]
서울에 증축된 지부 현관에 모인 선교인들과 지부 가족. 오른쪽에 1975년에 봉헌된 증축된 부분이 있다
[159면 삽화]
1949년 8월에 한국에 부임한 첫 워치 타워 선교인 부부인, 돈 스틸과 그의 아내 얼린
[175면 삽화]
1956년 4월 27일에 그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네이선 H. 노어 형제의 여의도 공항 도착을 환영하는 형제 자매들. 돈 애덤스와 로이드 배리 형제가 그를 수행하였다
[178면 삽화]
1957년 1월에 서울에서 열린 대회에서 하모니카로 왕국 노래 멜로디를 불어 청중의 환영에 응답하는 현 워치 타워 협회 회장 프레드릭 W. 프랜즈 형제
[180면 삽화]
듀랜드 노르봄과 그의 아내 레이철 그리고 밀튼 해밀튼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각각 20년과 33년 이상 한국에서 봉사해 온 두 선교인 부부
[181면 삽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는 선교인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전, 존 웬트워스, 젤린, 요셉 브라잇프스, 페리 후무아드
[183면 삽화]
1955년에 김(필립스) 경희, 에발린 박(에머슨) 그리고 밀튼 해밀튼과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로 이루어진 선교부가 부산에 설치되었다
1957년 서울에서 파편 자국이 있는 지부와 선교부 건물 층계에 서 있는 키드 케네디와 그의 아내 에블린, 칼 에머슨, 드루질라 크레이그(영버그), 엘레인 쉐이트(네스), 노리스 피터스, 돈 스틸과 그의 아내 얼린
[191면 삽화]
지부 위원회 성원들인 이 형제들은 평균 37년간의 전 시간 봉사를 해왔다. 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채 수완, 돈 스틸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 전 영순. 뒷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박 이균, 밀튼 해밀튼, 박 종일
[194면 삽화]
1986년에 공도에 증축된 지부 시설에 길이 25미터가 넘는 4색 윤전기를 설치한 후에 함께 일하고 훈련받은 일본 지부와 한국 지부 성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