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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라파수대—1980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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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라
바다표범 사냥꾼들은 세상이 온통 얼음과 휘몰아치는 눈보라뿐인 가운데 가망 없이 길을 잃고 말았다. 사태가 최악에 이르렀을 때,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우리 중 아무도 살아 남아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중 몇몇 사람은 끈기 있게 단념하지 않았다. 그중 한 분대 인솔자는 자기 약혼녀에 대해 간절히 생각하였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동료들이 포기하려 할 때면, 항상 자기 앞에 약혼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동료들이 눈 속에 주저앉지 말고 계속 움직이라고 격려하였다. 그와 약 50명의 동료들이 그 재난을 살아 남았다. 나중에 결혼했지만, 그의 약혼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의 정신의 눈에 비친 약혼녀의 뚜렷한 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것이다.
이 실화는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목표에 대한 시야가 결코 흐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의 중요성을 예증한다. 때때로,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지칠 대로 지친 바다표범 사냥꾼들의 투쟁만큼이나 힘들 수 있다. 사람이 “투쟁”을 중단하고 누워서 잠들게 하는 압도적인 충동에 굴복하면 죽음이 닥쳐온다.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는 영상을 자기 정신의 눈앞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고대 충성자들이 바로 그렇게 하였다. 예를 들어,애굽의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서의 생활을 계속하는 대신에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하였다. 왜 그는 그러한 선택을 하였는가? “이는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세는 앞을 바라보았으며, 상뿐만 아니라, 그러한 상의 전망을 주시는 분도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 즉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본 것이다.—히브리 11:24-27.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실을 지키기 위한 쓰라린 투쟁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념하시지 않았다. (히브리 5:7) 그분은 자기가 고통당한 것으로부터 순종을 배우셨으며 자기 아버지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정해 놓으신 상을 향하여 앞을 계속 똑바로 바라보았다.—히브리 12:2.
우리가 앞을 똑바로 바라볼 때 무엇을 보게 되는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자기 이름 여호와로 그리고 사랑, 자비, 사려 깊음 및 관대함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다. (시 83:18; 사도 14:17) 여호와께서 이러한 특성들을 매우 풍부하게 나타내심을 입증하셨으므로 옛날의 충실한 욥처럼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게 된다. 그분은 자기 생명을 바쳐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분이다. 얼마나 우리를 사로잡는 광경인가!—골로새 3:1, 2; 비교 사도 7:55, 56.
마치 그것으로는 부족한 듯이, 우리 시야의 수평선에는 새로운 새벽의 서광이 비쳐온다. 하나님의 왕국이 땅을 낙원으로 만들기 시작할 날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의 실현에 대한 시야가 결코 흐려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눈은 마치 좋은 카메라의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는 렌즈와도 같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이 우리의 영과 마음에 뚜렷한 인상을 새기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니라.]” (누가 11:34) 성한 눈으로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 그리고 왕국을 바라본다면, 제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의 경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훈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네 눈은 바로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의 행할 첩경을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잠언 4:25, 26.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두에 소개되어 있는 실화를 볼 때 극한 상황하에서 계속 전진하는 데에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세계 역사의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극한 상황하에서 살고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해 디모데 후서 3:1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였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라.]”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인내의 탁월한 본을 세우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피로의 기색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은 경주를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그리스도인이 피로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는 이유 중 얼마를 알고 특히, 어떻게 하면 이것을 상쇄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낙심하거나 거의 포기 상태에 있을 때 앞을 계속 똑바로 바라보도록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어 온 요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적극적인 견해를 기르라
격려는 인내하게 해 주는 강력한 힘이 된다. (사도 27:33-36) 격려를 위하여는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반면, 부정적인 태도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 실망을 주게 된다. 매우 부정적이고 거의 매사에 비평적인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인가? 물론 비평이 반드시 다 잘못은 아니다. 타당한 비평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비평이 그러한 비평적인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그를 매우 불행하게 만든다는 데 당신은 동의하지 않는가? 사실상 이것은 견해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를 기른다면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심지어 범죄자에게서도 항상 좋은 점을 보신다. 여호사밧 왕의 범죄가 하나님의 노를 유발시켰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셨다. “그러나 임금께서 하신 좋은 일들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역대 하 19:3, 공동번역)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 여호와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임명된 장로를 비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경우,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좋은 점들, 즉 여호와와 회중에 대한 그의 사랑, 집회를 준비하는 그의 수고 및 남을 도와주려는 자진성 등을 고려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당신의 정신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듯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언제든지 그러한 상황하에서 올바로 대처할 때 오게 될 좋은 결과를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탁월한 본으로서 예수의 경우가 있다. 그분은 원수들의 손에 고통을 당하셨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브리 5:8.
보다 큰 믿음과 확신을 기르라
또한 당신은 열등감으로 인하여 자기 스스로 눌러앉은 사람들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감정에 그처럼 압도되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로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를 보는 올바른 방법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지적 자녀들은 그분께 매우 소중하다. (학개 2:7) 옳은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분의 눈에 열등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와께 대한 강화된 확신과 우리를 자신의 영을 통하여 종들로서의 자격을 구비시켜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더 큰 믿음이다.—고린도 후 3:5.
스스로 실망하여 포기하는 대신에, 정신 속에 전술한 견해를 가질 때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앞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운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에 인내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잠언 16:20.
염려하지 말라
과도한 염려 역시 사람들에게서 생의 즐거움을 앗아가고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이것이 현재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이 “마지막 때”에 관한 예수의 말씀에 지적되어 있다. (다니엘 12:4) 그분은 이렇게 지적하셨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라.]”—누가 21:26.
어떤 사람들은 불안한 세태, 어려운 경제 상태, 높은 인플레이션, 범죄의 증가, 가정 생활의 파탄, 외로움 및 기타 많은 불유쾌한 일들에 대해서만 항상 이야기한다. 이러한 염려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마저 그러한 역경을 계속 이겨 내려는 의지를 잃고 생명을 상실할 위험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바울의 이러한 고무적인 훈계가 있다. “주안에서 항상[그렇다. 문제들이 생길 때일지라도]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어떠한 결과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빌립보 4:4-7) 그러한 사람은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영성을 강화하라
눈보라 속에서 지치지 않고 전진하려면 대단한 체력을 요한다. 점감되는 체력 소모는 재공급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마음에 영적 양식을 꾸준히 공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잃고 지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다면 그는 생명의 길에 계속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다.—마태 4:4.
오늘날에는 쾌락과 오락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이전에는 잘하던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될 수 있다. (디모데 후 3:4) 한편, 이것은 그들에게서 자신들을 영적으로 부양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시간을 앗아간다. 또한 물질주의 즉, ‘부하려는 마음’은 매우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하여 영성을 파괴할 수 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경고는 특히 우리 시대에 적절하다. “이것[돈]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났느니라.]”—디모데 전 6:9, 10.
이 험난한 시대에 확고 부동하게 서려는 사람이라면 성서와 성서 출판물들의 연구를 위한 시간을 매일의 계획에 포함시킴으로써 자신의 영성을 강화해야만 한다.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의 정기적인 교제를 추구해야 한다. (디모데 후 3:16, 17; 히브리 10:24, 25) 이것은 그의 정신과 마음에 이사야 40:29-31에 묘사되어 있는 활력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과 동행하라
‘자기 생각대로만 하’지 않고 동행할 벗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렇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 4:9, 10) 에녹과 노아 같은 고대 충성자들은 자기들과 동행할 최대의 벗이 있었다. 그들은 참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창세 5:24; 6:9)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최악의 역경을 살아 남는 데 필요한 도움을 준다. 여호와와의 개인적인 매일매일의 통신과 천적 아버지와의 강력한 개인적인 관계는 자신의 길에 머물러 있게 해 줄 것이다.
예로서, 사랑하는 결혼 배우자나 자녀를 죽음으로 여의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 하나님과의 이러한 친밀한 관계는 뼈저리는 허탈감을 견딜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학대를 받거나 어떤 불의한 일을 당할 때, 혹은 믿음 안의 형제로 인하여 심각한 상처를 입을 때일지라도, 여호와와의 이 소중한 관계는 그가 결코 투쟁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 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그의 양심이 깊이 고통받는 경우라 할지라고 여호와와의 그의 관계는 그를 회복시켜 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을 통하여 그의 죄는 용서받게 될 것이다. (요한 1서 1:7) 그는 계속 그리스도인으로서 앞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걸어가게 될 것이다.
앞을 바라보는 것에는 풍부한 상이 따른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인생에서 힘에 겨운 개인적인 역경들을 이겨 나아가기 위하여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 외에도, 우리는 “큰 환난” 즉, 이 전체 사물의 제도를 황폐시킬 격심한 전세계적인 “태풍”을 자신이 직면해야 할지 모른다. (마태 24:21, 22; 예레미야 25:31, 32)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도와서 이 역경을 이겨내고 깨끗해진 땅 즉, 전세계적인 낙원으로 장차 변화될 땅 위로 해가 솟아오를 때 생존해 있도록 해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쳐서 포기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6:11, 12에서 묘사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약해지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 예수의 대속 희생에 대한 우리의 믿음, 그리고 새질서에 대한 밝은 전망이 우리 생활에 활기를 주게 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여호와를 본 모세와 같이,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바라본 예수와 같이 될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전세계의 수십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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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의 주를 섬기는 데서 오는 축복파수대—1980 |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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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의 주를 섬기는 데서 오는 축복
‘어어네스트 E. 비이버’의 체험담
많은 문젯거리들은 타협을 하면 잠정적으로 연기될 뿐,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불행이 따르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리고 타협은 두 주인을 섬기려고 하는 데서 비롯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육적 형제인 야고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라고 편지하였다.—마태 6:24; 야고보 4:4.
여기에 요점이 있다. 간단히 말하여 우리가 누구의 벗이 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편으로 세상, 육적인 것 그리고 마귀가,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과 같다. (요한 1서 2:15-17)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선택하면 무한한 행복이 따르는 상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내 앞에 전개된 환경은 바로 이러하였다.
진리의 씨가 뿌려지다
1902년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부모는 성서 연구생들이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이 당시에는 이렇게 불렸다. 우리는 성서 연구생들이 모이던 런던 성막에 참석하곤 하였다. 내가 옛날에 부르던 노래들 중 하나를 지금도 환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린이들을 그리스도인 집회에 데리고 가는 것이 중요함을 증명해 준다. “천년이여! 땅은 영화로워지도다! 이 날은 오랫동안 예언된 기쁜 날이도다.” 이 옛 노래는 얼마나 참된가! 낙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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