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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살아남았다”깨어라!—1982 |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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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살아남았다”
이야기는 내가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사는 연로한 부모님과 삼촌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때는 삼촌이 사망하기 수개월 전이었다. 평상시대로, 우리는 일요일 아침에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 가서 공개 강연에 참석하였다. 우리는 「당신은 “마지막 날”의 생존자가 될 것인가?」라는 훌륭한 강연을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삼촌은 “그 연설은 내가 무시무시한 재난을 살아 남았을 때를 기억나게 해 주는군” 하고 말했다. 삼촌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너도 알다시피, 나는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살아 남았지” 하고 말을 이었다.
그 후에 나는 ‘루이스 가레트’ 삼촌에게 그가 ‘타이타닉’호에서 겪은 일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 하고 말하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북으로 약 130 내지 140‘킬로미터’ 떨어진 조그만 산간 마을인 ‘하쿠우르’에서 1900년에 태어났단다. 우리 가족은 밀을 빻아 가루를 만드는 수력 맷돌 방앗간을 소유하고 운영했지. 아버지는 마을의 제분업자이신 셈이었지.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지. 1904년에 어머니와 두명의 누이들이 ‘레바논’을 떠났고, 그 후 1906년에 형이 미국으로 떠났단다. 1912년에는 가족 이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내가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지.
“1912년 3월에, 우리는 배를 타고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갔단다. 거기에 있는 동안, 우리는 ‘뉴우요오크’로 처녀 항해하는 ‘타이타닉’호의 배표를 샀지. 출항 날짜는 1912년 4월 10일이었지. 아버지는 눈병이 나서 요구된 신체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르세이유’에 남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삼촌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지!” 하고 말했다.
“우리가 ‘타이타닉’호에 탔을 때 누나는 열네살이었고 나는 열두살이었지” 하며 삼촌은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아버지를 뒤에 남겨 둔 것이 섭섭했지만, 그 당시 가장 크고 빠르고 가장 호화로운 배인데다—침몰할리도 없다고들 말하던 R. M. S. ‘타이타닉’호를 탔다는 흥분에 들떠 있었단다. 그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들 몇 명을 포함하여 2,200여명이 승선해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타이타닉’호의 처녀 항해를 축하하기 위해 그 배에 타 있었지.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일이었지. 배의 속도는 예상대로 였다. ‘뉴우요오크’의 도착 예정일은 4월 17일 수요일이었다. 물은 잔잔하고, 날씨는 일반적인 4월의 쌀쌀한 날씨였지.
“항해 닷새째인 4월 14일 일요일은, 날씨가 유별나게 추워서—갑판에는 산책길에 나온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몹시 추웠지. 우리는 그 지역에 빙산의 조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 그 배의 진로에는 빙산이 하나도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지. 그래서 ‘타이타닉’호는 그대로 전속력으로 전진했단다. 하지만, 북 대서양 상의 또 다른 배인 ‘캘리포오니아’호의 선장은 ‘타이타닉’호에 우리의 진로에 빙산들이 목격되었다는 경고를 무선으로 알려 주었지. 그러나 그것이 무시된거야. ‘스미스’ 선장과 거의 700명의 승무원 그리고 800명 이상의 승객들의 과신이 치른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지.
“4월 14일 일요일 오후 11시 45분 경에, 누나와 나는 급격한 흔들림으로 인해 잠에서 깼지. 선실의 윗쪽 침대에 있던 누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나봐!’ 하고 소리를 질렀단다.
“‘어서 도로 잠이나 자, 누난 걱정이 너무 심해’ 하고 나는 누나에게 소리쳤지. 이윽고, 배 안에서 만난 이로서 우리에게 아버지같은 관심을 보여 준 한 연로한 남자가 우리 선실로 와서 침착하게 이렇게 말하였단다. ‘선실에서 나와 상갑판으로 가자구나. 이 마당에 소지품을 가져 가는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나중에 또 갖게 될게다.’
“우리는 3등 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2등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었지. 하지만 2등과 3등실의 사람들은 1등의 상갑판에 이르는 방호문을 통과할 수 없었지. 그러나 우리는 구명정을 탈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아지도록 1등의 상갑판으로 가는 것이 현명할 거라는 말을 들은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위의 구명정에서 대여섯 갑판 아래인 3등 갑판에서 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단다. 철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일이 누나에게는 힘든 일이었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 일을 해냈지.
“정말 굉장한 광경이었지! 대부분의 구명정들은 없어지고 말았지. 승무원은 여자와 어린이들만 구명정에 타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지—모두가 타기에는 부족했던 거야. 우리는 남편을 두고 떠나기 싫어 울부짖는 여자들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서둘러 구명정에 타라고 간청하는 남편들을 보았단다. 온통 수라장이 되어 흥분한 사람들 가운데서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두명의 이민가는 어린이인 누나와 나는 도와달라고 울부짖으며 믿기 어려울 만큼 무서워 했단다.
“마지막 구명정이 사람을 태우고 있었어. 한 중년 신사가 매우 젊은 자기의 임신한 부인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아내를 구명정에 태우고 나서 갑판을 뒤돌아 보며 타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 보았지. 그는 아내와 작별의 입맞춤을 하고, 갑판으로 돌아오면서 오는 길에 있는 첫 사람을 붙잡은 거야. 다행히도, 내가 마침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고 그는 나를 구명정에 태워 주었지. 나는 공포로 얼어붙은 누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누나도 밀어 넣어졌단다. 그처럼 친절한 행동을 한 그 용감한 사람은 누구였겠니? 우리는 그가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라는 걸 알게 되었단다. 그 때 그는 48세였고 그의 아내 ‘매덜라인’은 19세였지. 그들은 자기들의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미국으로 여행을 하던 중이었지. 많은 신문들이 ‘존 제이콥 애스터’가 한 어린 이주자를 위해 자기 생명을 희생한 이야기를 실었지. ‘애스터’ 부인에 의하면, ‘애스터’ 가족의 기록은 ‘애스터’ 씨가 자기 아내를 구명정에 타도록 돕지 못하게 하려던 한 승무원과 승강이 하였음을 알려주지. 어쨌든 그는 그렇게 하였단다.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그는 아내에게 입을 맞추고는 갑판으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들이 구명정에 타도록 도와 주기 시작했지.
“나는 구명정을 타서 다행이었지만, ‘타이타닉’호에 남은 사람들 때문에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지. 그 크고 아름다운 배를 돌아 보며, 나는 색다른 견지로 그 배를 볼 수 있었고, 아직 켜져 있는 등불들로 인해 그 배의 크기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지. 밤의 적막과 물 위로 매우 잘 전달되어 오는 소리로 인해 우리는 갑판 위의 악단 연주 소리와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승무원은 가능한 한 그 배에서 멀리 저어 나갔지. 그 배가 최후로 바다 깊이 침몰할 때 함께 빨려들어 가게 될까 두려워한 거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어떤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폭발도 없었고 바다는 그 날 밤에 보통 이상으로 잔잔했고 그것은 대부분의 구명정에 사람들이 가득 타 있었기 때문에 다행한 일이었단다.
“기록에 의하면,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 15일 오전 2시 20분경에 침몰하였지. 나는 그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 무서운 최후를 마치는 것을 목격하였지. 배가 침몰하는 그 순간이 남겨준 기억은 오늘날까지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단다. 얼음 투성이의 물 속에 빠져 도와 달라고 신음하며 미친듯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지. 거의 모두가 차가운 물로 인해 죽었는데 그 소리는 약 45분간 계속되다가 사라졌단다.”
삼촌은 회상에 잠겨 잠시 말없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계속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SOS를 한 밤중에 보냈는데, ‘쿠나르드 화이트 스타’ 해운의 ‘S. S. 카르파티아’호가 그것을 받았단다. 그 배는 약 93‘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지브로올터’로 향하던 항로를 즉시 돌려 구조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 왔지. 그 배는 오전 4시 30분 경에 도착하였지. 유감되게도 ‘S. S. 캘리포오니아’호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점에서 겨우 32‘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지만, 무선 통신사가 휴식 시간이었기 때문에 SOS 신호를 수신하지 못했다는 거야. 나중 보고에 의하면 ‘캘리포오니아’호는 밤에 불길을 보기는 했지만, ‘타이타닉’호의 승객들이 처녀 항해를 축하하는 불꽃 놀이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거야.
“‘카르파티아’호가 구조 작업을 마친 것은 오전 8시 30분 경이었지. 우리의 구명정은 맨 나중에 구조되었지. 그 배에 실려 두터운 옷을 받고 따뜻한 차를 얻어 마시고 안정이 되자, 나는 비록 너무 큰 외투와 구두를 걸치고 있었지만 살아있다는 게 행복하였단다.
“나중에 ‘카르파티아’호의 선장은 모든 생존자들을 갑판 위로 불러 그 빙산을 보게 하였지. 열두살 된 내 생각에는 그 빙산이 2층 높이에다 폭은 그보다 더 넓고 거대한 굴뚝이 있는 집만한 것으로 보였단다. 그 배는 ‘지브로올터’로의 여행을 계속하기에 앞서 ‘쿠나르드 화이트 스타’ 해운 경영진 측의 배려로 우리를 ‘뉴우요오크’로 데려다 주었지. 우리는 4월 18일 목요일 오후 8시 30분에 ‘뉴우요오크’에 도착하여 ‘쿠나르드 화이트 스타’ 선창으로 보내졌단다.
“구명정에서의 오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당시 우리가 ‘카르파티아’호에 안전하게 탔다는 사실은 기적만 같았지. 매서운 추위는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함께 떼지어 있었지. 사람들은 서로 친절하였어. 나는 ‘카르파티아’호 갑판 위의 바람이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기억한단다. 바람은 시속 몇 ‘노트’로 빨라진거야. 다행히, 구조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간 만큼 바람이 지체한거지. 만일 그 시간에 바다가 잔잔하지 않았더라면 구조 작업이 그렇게 성공적이었을지 의심스러웠단다.”
“구명정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나요?” 하고 나는 물었다.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추위로 죽은 사람이 우리 구명정에 한명 있었지. 그 시체는 ‘시트’로 싸서 배 밖으로 던져졌단다.”
“삼촌이 탄 구명정에 남자도 있었나요?” “노 젖는 사람으로 일한 소수의 승무원을 제외하고는 승무원의 지시대로, 여자와 어린애들뿐이었지. 승무원을 ‘속이는데 성공한’ 아기를 데리고 있던 한 젊은 부부가 있었지. 그 부인은 아주 약삭빠르게, 자기의 젊은 남편을 여자로 분장시키고, 머리에 ‘쇼올’을 걸치게 하고는 아기를 준거야. 그 남편은 다른 구명정에 타 있었고 부인은 우리 구명정에 타 있었지. 둘다 ‘카르파티아’호에 구조되었지.
“‘뉴우요오크’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민 수속을 마치기 위해 ‘엘리스’ 섬으로 보내질 것으로 예상하였지. 하지만, 생존자들이 이미 견디어 낸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그 일은 연기되었지. 우리는 가족들과 결합하도록 적십자사로 인계되었지. 나의 형 ‘아이작’은 ‘뉴우요오크’에 있었고 우리의 재회는 기쁨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되었지. 아버지는 아직도 ‘프랑스’에 계셨단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타이타닉’호에 타셨더라면 여자와 어린애만 된다는 규칙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지. 아마 우리가 살아 남는 데까지도 영향을 미쳤을거야. 우리가 아버지를 ‘타이타닉’호에 남겨두고는 우리들 자신의 안전을 찾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아버지를 위해서는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다른 배를 타고 석달 후에 안전하게 도착하셨지.”
삼촌은 말을 멈추고, 그 무시무시한 체험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마침내, 나는 그의 명상에 끼어 들었다. “삼촌은 그 대참사에서 살아 남으셨는데, 그러면, 언제 현 임박한 ‘마지막 날’의 환난에 대해 알게 되셨나요?”
“1912년에서 1930년으로 가 보자”고 하며 삼촌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뉴우요오크’의 ‘브루클린’으로부터 ‘콜포처’ 한 사람이, 형의 가족과 내 아내와 아들 및 나로 이루어진 나의 가족이 거주하는 ‘플로리다’ 주 ‘잭슨빌’을 찾아 왔었단다. 형은 ‘아라비아’어를 하는 얼마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지. 형은 벌써 활동적인 ‘증인’이 되어 있었단다. ‘죠오지 카푸우리’라는 그 ‘콜포처’는 ‘아라비아’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몇 차례의 집회를 열었지. 나는 ‘아라비아’어 「하나님의 거문고」를 한부 받았단다. 형과 여러 차례 논쟁한 후에, 나는 몹시 당혹하여 마침내 형에게 이렇게 말했지. ‘나는 형이 원 희랍 정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형과 의절합니다. 나는 형이 삼위일체의 상징인 십자가의 성호를 다시는 긋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읍니다.’
“나는 형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우리 사이의 그런 불화로 인해 심히 괴로왔지. 몇달 후에 나는 받아 두었던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우연히 보게 되었단다.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 책을 펴서 한낮에 읽기 시작하여 자정이 넘어서까지 계속 읽었단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내 마음에 파고들기 시작한거야. 나는 ‘아라비아’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행되는 연구에 가담하였고, 1933년에 침례를 받았단다.
“나의 생애에서 두드러진 사건이 하나 더 있지. 1949년에 나는 재정상, 여러 해 동안 꿈에 그리던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단다. ‘레바논’에 찾아가서 왕국 희망을 전해 주고 싶은 이복 형이 한분 있었지. ‘레바논’으로 돌아가는 항로는 ‘그리인란드’ 상공과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점에서 아주 가까운 상공도 지나갔지. 나는 차가운 대서양 바닷물을 내려다 보며 그리고 그 슬픈 때를 회상하며 감정이 복받쳐 올랐단다.
“뺨에 눈물이 흐르는 채 조용히 기대어 있는 것을 본 여 승무원이 내 팔을 두드리며 ‘불편하신 데가 있으신가요?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묻길래, ‘괜찮아요. 나는 그저 내가 열두 살의 어린애였을 때의 일을 생각했을 뿐이요. 그때 내가 탔던 ‘타이타닉’이란 큰 배가 침몰하면서 바로 저 아래 바다 속으로 1,5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었다오. 나는 아직도 그 광란의 아침과, 어두움 속과 얼음 투성이의 바다에서 도움을 구하는 울부짖음을 잊을 수가 없구려’ 하고 대답하였지. ‘참 슬픈 일이였군요’ 하며 그 예쁜 검은 머리의 여 승무원은 ‘저는 그 ‘타이타닉’호의 재난에 관해 읽은 기억이 나요’ 하고 말하였지.
“나는 드디어 ‘레바논’에 도착했지. 다행히도, 이복 형은 성서에 관심이 있었단다. 나중에 그도 역시 여호와의 헌신한 그리스도인 ‘증인’이 되었지.”
나의 삼촌 ‘루이스’는 하나님의 왕국이 현 ‘사단’의 사물의 제도를 대치하리라는 희망의 표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끝맺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이제까지 내 인생의 지침이 되는 힘이 되어 왔지” 하고 삼촌은 단언하였다. “나는 ‘타이타닉’호의 재난에서 내 생명을 구해 주시고 지금 이 위급한 ‘마지막 날’에 그분을 섬길 기회를 갖게 하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하고 있단다.” 삼촌은 자기 형과 형수네 근처에 살면서 그들과 함께 죽는 날까지 여호와를 힘껏 섬겼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마태 6:9, 10) 그는 혹 ‘아마겟돈’ 전에 자기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자기를 무덤의 세력에서 구출하실 것이라는 강렬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6면 삽입]
우리는 갑판 위의 악단의 연주 소리와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6면 삽입]
나는 그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 무서운 최후를 마치는 것을 목격하였지
[7면 삽입]
나는 그 광란의 아침에, 어두움 속과 얼음 투성이의 바다에서 도움을 구하는 울부짖음을 잊을 수가 없구려
[5면 네모와 삽화]
길이 269‘미터’의 “‘타이타닉’호”는 바다에서 가장 큰 배였다. 이 배의 총 배수량은 당시 군함의 배수량보다 5,000‘톤’이 더 많았다. 그 배의 선체는 10개의 수밀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중 네 구획이 침수되어도 배가 침몰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침몰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었다. “안전에 있어서 ··· ‘타이타닉’호가 건조되었을 때, 그보다 더 안전할 수는 없는 것으로 믿어졌다.” (‘뉴우요오크’ 「타임즈」, 1912년 4월 16일 호) 그러나 그 운명의 빙산으로 인해 그 배의 측면은 90‘미터’가 갈라져 5개의 수밀 구획이 침수되었고, “침몰할 수 없는” “‘타이타닉’호”는 침몰하였다.
[4면 네모와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미국
뉴우요오크
뉴우펀들랜드
‘타이타닉’호 침몰 지점
아일랜드
영국
사우댐프턴
프랑스
[네모] 4월 10일, 수요일: “‘타이타닉’호”가 약 2,200명을 태우고 ‘사우댐프턴’에서 처녀 항해를 시작하였다.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잠시 정박한 후, ‘뉴우요오크’를 향해 떠났다.
4월 14일, 일요일: 날씨가 매우 추웠다. “‘타이타닉’호”는 앞에 빙산들이 있다는 경고를 받고도 22‘노트’의 속도로 항진하였다.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뉴우펀들랜드’ 해안에서 남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빙산을 들이 받았다.
4월 15일, 월요일: “‘타이타닉’호”는 충돌이 있은 지 단 2시간 40분만에 침몰하여 1,500명의 인명을 희생시켰다. 그곳은 목적지에서 동북쪽으로 2,57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8면 삽화]
일부 승객들은 배를 떠나라는 경고를 무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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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현 제도의 침몰에서 살아남을 것인가?깨어라!—1982 |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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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현 제도의 침몰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으로 지휘한 ‘E. J.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배에 어떤 치명적인 재난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할 수 없읍니다. 현대의 조선술은 그것을 뛰어 넘었읍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났다. 그 큰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타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말 위험에 처해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뉴우요오크’ 「타임즈」, 1912년 4월 19일자의 보도에 따르면, 한 생존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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