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연구 노트—2장
라오디게아: 소아시아 서부, 오늘날 튀르키예의 데니즐리 근처에 있던 부유한 도시. 이 도시는 골로새에서 약 18킬로미터, 에베소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부록 나13 참조) 이 도시는 주요 무역로들이 만나는 비옥한 리쿠스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구절의 내용을 볼 때, 바울이 라오디게아에 좋은 소식을 전파한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왕국 소식이 전해졌으며 (행 19:10) 라오디게아뿐만 아니라 근처의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에도 회중이 생겼다. (골 4:13, 15, 16) 라오디게아는 성경에서 골로새서와 요한 계시록에만 언급된다.—계 1:11; 3:14.
나를 직접 본 적이 없는: 또는 “나를 만나 본 적이 없는”. 직역하면 “육으로 내 얼굴을 보지 못한”.—롬 3:20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신성한 비밀 곧 그리스도: 하느님의 신성한 비밀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에 관한 신성한 비밀”이다. (골 4:3) 하지만 하느님의 신성한 비밀에는 여러 가지 부면이 있다.—마 13:11; 고전 2:7; 엡 1:9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 안에는 … 주의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일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맡기신 중요한 역할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감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감추어져 있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러한 귀중한 지혜와 지식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성경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마 13:11) 예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정신을 열어 주어 그들이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 가운데는 예수의 삶과 봉사의 직무가 어떻게 성경 예언을 성취시켰는지에 관한 진리가 포함되었다. (눅 24:25-27, 32) 또한 그분은 아버지에 관해 밝혀 주시어, 사람들이 아버지를 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해 주셨다. (눅 10:22) 예수는 하느님의 맏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그분의 방식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골 1:15, 16, 18.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걸을”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골 2:6) 이 첫 번째 표현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내린 나무처럼 확고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엡 3:17 연구 노트 참조.
그분 안에 …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다는 의미이다. 이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견고한 건물과 같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엡 3:17 연구 노트 참조.
믿음 안에서 굳건해지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걸을” 수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한 세 번째 비유적인 표현이다. (골 2:6) 그는 농업(“뿌리를 내려”)과 건축(“세워지고”)과 관련이 있는 비유적인 표현을 언급한 뒤에 상업 및 법률 분야에서 쓰이는 표현을 사용한다. “굳건해지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법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확증하다; 굳건하게 하다; 보증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롬 15:8; 고전 1:8; 고후 1:21) 한 사전에서는 이 표현을 “믿음 안에서 확고히 되어”로 번역한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는” 일을 언급할 때 이 단어와 어근이 같은 그리스어 명사를 사용한다. (빌 1:7)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됨에 따라, 그분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에 확고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할 만한 더 많은 이유를 갖게 된다.
철학: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는데, 문자적으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바울 시대에 이 단어는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상을 가진 여러 집단이나 학파를 가리켰는데, 거기에는 종교 집단도 포함되었다. 성경에는 바울과 그리스 철학자들이 대화를 나눈 기록이 단 한 번 나오는데, 그 대화는 주로 종교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었다. (행 17:18-31) 골로새가 있던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는 다양한 철학 학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골 2:8의 문맥과 문법 구조를 볼 때 바울은 특히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할례, 축제,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일을 비롯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골 2:11, 16, 17.
속임수: 또는 “유혹”.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는 “기만적인 힘”, (마 13:22; 히 3:13) “기만적인 가르침”으로 번역되기도 한다.—벧후 2:13.
여러분을 사로잡지: 또는 “여러분을 자기 먹이로 끌어가지”. 한 사전에서는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를 “전리품으로 가져감으로 장악하다, 포로로 삼다”로 정의한다. 그 사전에서는 이 단어가 “누군가를 진리에서 끌고 가 오류의 종으로 만드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갈 4:3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언급한 철학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바울은 참된 지식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기도한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한 지식과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골 1:9, 10; 2:2, 3.
하느님의 특성의: 또는 “신성의”. “하느님의 특성”에는 예수의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가지신 모든 뛰어난 특성들이 포함되며, 그 특성들은 그리스도 안에도 나타나 있다. 이 표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테오테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구절에만 나오며, “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테오스에서 나온 말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많은 사전에서는 테오테스를 “신의 특성; 신의 본성; 신성”으로 정의한다.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은 이 단어를 어떤 행동의 결과로 얻거나 잃을 수 있는 특성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여호와께만이 아니라 피조물에게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테오테스를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
하느님의 특성의 모든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나타나 있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특성”을 갖고 계시다고 해서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분이 전능한 하느님과 동등한 것은 아니다. 문맥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앞 장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모든 충만함이 그[그리스도]의 안에 머무르게 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골 1:19)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특성의 충만함’을 갖게 하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골 1:15에서 바울은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골 1:19-22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고 알려 주며, 골 2:12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말한다. (골 3:1) 이러한 점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특성의 모든 충만함”을 갖고 계시다고 해서 전능한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러분은 그분에 의해 충만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문맥에 나오는 이러한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주의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그분 안에 … 세워지고 믿음 안에서 굳건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다. (골 2:3, 6, 7) 그에 더해 골 2:13-15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율법 계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인간 철학과 전통도 필요하지 않다. (골 2:8) 그들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 즉 그리스도에 의한 귀중한 “충만함”이 있다.—골 2:10-12.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 롬 2:29 연구 노트 참조.
범죄 …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생명과 죽음이 비유적인 즉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엡 2:1 연구 노트 참조) 바울은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이 과거에 그들의 생활 방식 때문에 “범죄 … 가운데 죽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여호와께서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알려 준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 많은 생활 방식을 회개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예수의 대속 희생을 근거로 그들의 모든 범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실 수 있었다.—엡 2:5. 눅 9:60; 요 5:24, 25 연구 노트 비교.
손으로 쓴 문서: 모세 율법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예수께서 흘리신 희생의 피를 받아들이심으로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버리셨다.” 다시 말해 율법 계약을 그 계약에 규정된 제물과 희생과 함께 폐지하셨다. 비유적으로 말해 하느님께서는 이 문서 즉 계약을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형주에 못 박으셨다. 골 2:16에서 바울은 하느님께서 지워 버리신 그러한 법령들 중 일부를 언급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판단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엡 2:15에서 바울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께서 “적개심을 품게 만드는 것을, 곧 법조문으로 이루어진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한다.
지워 버리셨습니다: 행 3:19 연구 노트 참조.
형주: 또는 “고통의 기둥”.—용어 설명 참조.
그분은 정부들과 권위들을 벌거벗기고: 여기서 바울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정부들과 권위들을 로마의 개선 행진에서 처형되기 위해 끌려가는 포로들에 비한다. (엡 6:12 비교) 포로들은 갑옷이 벗겨지고 무기를 빼앗긴 채 끌려갔으며 사람들은 그 행렬을 따라가며 그들을 조롱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군주들을 비롯해 일부 포로들은 그런 행렬 가운데 끌려가며 수치를 당하느니 자살을 하는 쪽을 택했다고 한다. 바울이 사용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정복자인 여호와께서는 적들을 벌거벗기고 패배시켜 공개적인 구경거리로 삼으신다. 바울은 여기서 “개선 행진”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고후 2:14-16과는 다른 상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고후 2:14 연구 노트 참조.
형주를 통해: 원문에는 “형주”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고 “그것”으로 되어 있는데 앞 구절에 나오는 “형주”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형주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손으로 쓴 문서” 즉 율법 계약을 없앨 근거가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어둠의 권세 아래 속박된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골 2:14) 그리스어 원문의 표현을 “그분을 통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로 해석할 수도 있다.
축제나 초하룻날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모세 율법 아래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이러한 특별한 행사들을 지켜야 했다. (갈 4:10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초막절”, “봉헌 축제”, “무교절”, “초하룻날”, “오순절”, “안식일” 참조) 일부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행사들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권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폐지된 모세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축제들을 지키는 문제로 아무도 자신들을 판단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오게 될 것들의 그림자: 어떤 물체의 그림자를 보면,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실체의 대체적인 모양이나 형태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림자는 그 그림자를 드리우는 물체 혹은 실체에 비할 때 일시적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율법과 그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축제와 장막과 희생이 오게 될 더 큰 것들의 그림자였다고 설명한다.—히 8:5; 9:23-28; 10:1.
거짓 겸손: 이 표현은 단지 “겸손” 또는 “자기를 낮추는 정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거짓 선생들이 “우쭐댄다”고 말한 것을 볼 때, 그가 진실하지 않은 겸손을 가리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면 행 20:19 연구 노트 참조.
거짓 겸손[을] 좋아하고: 여기서 바울은 겸손해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스스로 부과한 금욕 규정들을 지켜야만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 그러한 규정들에는 물질적인 것들을 포기하거나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거나 종교적 기념일을 지키는 것이 포함되었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요구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러한 규정들을 지킴으로 겉으로는 겸손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 “육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우쭐대는” 것이었으며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경건한 체하는 것이었다.—마 6:1.
천사 숭배: 달리 번역하면 “천사들의 숭배 방식”. 바울은 이러한 숭배에 대해 구체적인 점을 알려 주지 않는다. 이 그리스어 표현은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한 가지 가능성으로, 일부 골로새 사람들이 천사들이 하는 숭배를 따라하려고 했을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천사들처럼 경건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그들은 천사들을 직접 숭배했을 수 있다. 아마도 천사들에게 도움이나 보호를 요청함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후에 골로새 지역에서 소위 그리스도교인들과 이교도들 사이에 천사 숭배가 행해졌다는 증거가 있다. 4세기에 라오디게아에서 교회 당국이 천사 숭배를 정죄했지만 그러한 숭배는 적어도 다음 세기까지는 계속되었다. 바울이 무엇을 가리켜 이 그리스어 표현을 사용했든,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천사들은 숭배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계 19:10; 22:8, 9) 여기서 바울이 한 말을 보면 천사 숭배를 하는 사람이 “거짓 겸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거짓 겸손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그리스도인이 피조물을 숭배한다면 영원한 생명의 “상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마 4:10; 롬 1:25 비교.
숭배: 또는 “숭배 방식”.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트레스케이아)는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숭배 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행 26:5) 동일한 단어가 약 1:27에도 나오는데 본문에서는 “숭배 방식”으로 번역되었고 각주에는 “종교”라고 되어 있다. 약 1:26에서는 “숭배”로 번역되었다.
자기가 본 것들 “위에 서 있는”: 여기서 바울은 일부 거짓 선생들이 취하는 태도를 묘사한 것 같다. “위에 서 있는[직역하면 “속으로 들어가는”, 「왕국 행간역」(Kingdom Interlinear)]”이라는 표현은 이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이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바울은 신비 의식(입교 의식)이나 거짓 선생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환상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든, 이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형제들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권위를 행사하려고 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회중이 하느님의 아들 외에 다른 지식과 지혜의 근원에서 인도를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바울이 교훈을 베푼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골 2:3 연구 노트 참조.
온몸: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회중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관절과 인대”를 통해 즉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마련, 회중 내의 의사소통 마련, 회중의 활동을 조직하는 마련을 통해 그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신다. 그러한 마련을 통해 “몸”은 영적 양식을 잘 공급받게 되고, 각 부분은 임명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침을 받게 된다.—엡 4:7-16. 엡 4:16 연구 노트 참조.
관절과 인대를 통해: 사람의 몸은 관절을 통해 결합되어 있다. 사람의 몸에는 “인대” 즉 뼈와 뼈를 잇고 장기를 지지해 주는 띠 모양의 튼튼한 조직도 있다.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여기서 의학 용어들을 사용한 이유 중 하나가 “사랑받는 의사” 누가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누가는 바울이 골로새서를 쓸 당시 그와 함께 있었다. (골 4:14) 여기서 “인대”로 번역된 그리스어 신데스모스는 엡 4:3(“연합시키는 띠”)과 골 3:14(“연합의 띠”)에서 ‘결속시킨다’는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화롭게 함께 결합되어: 엡 4:16 연구 노트 참조.
자기 뜻에 따른 숭배 방식: 또는 “스스로 지운 숭배 방식”. 한 사전에서는 이 그리스어 단어를 “스스로 만드는 종교, 자기 마음대로 만드는 종교”라는 현대적인 표현으로 정의한다.
육체의 욕망: 여기서 바울은 단식을 비롯해 스스로 지운 법령들을 지키는 것이 (골 2:16, 20, 21)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욕망 즉 잘못된 욕망과 싸우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 또한 극단적으로 금욕 생활을 한다고 해서 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려 준다. 성경 시대에 하느님의 종들이 하느님에 대한 충절을 타협하기보다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히 11:35-38) 하지만 성경에서는 고난 그 자체를 위해 또는 영적인 발전을 위해 일부러 고통을 겪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참된 영성은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적용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에 믿음을 나타냄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롬 3:23, 24; 딤후 3:1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