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의—악몽을 살아남다
켐 소우의 체험담
캄보디아(일명 캄푸치아)는 오랜 기간 평화로운 나라였다. 이윽고 1970년이 되자 육군 중장 론놀이 정권을 잡았다. 그 결과, 크메르 루지 또는 공산 크메르로 알려진 공산주의자들이 이에 반항하여 일어섰다. 론놀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캄보디아 전역에서 가능한 모든 사람을 동원하였다.
당시, 나는 프놈펜 대학교에서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면서, 아울러 작가로도 활동하였다. 실은, 불과 15세였을 때 「고아의 눈물」(Tears of Orphans)이란 첫 작품을 내었다. 그 책은 주로 일곱살 때부터 써온 일기를 모아 만든 것이었다. 그 책은 상당히 잘 팔려서, 돈이 필요치 않았던 나는 그 수익금을 고아원에 기부하였다.
대학을 다닐 때 작가, 작사가, 가수로서 꽤 알려졌다. 쓴 책만해도 전부 20권 정도 되며 노래도 많이 작사하였다. 글쓰는 취미를 갖게 된 것은, 프놈펜 대학교의 불문학 교수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론놀이 동원령을 내리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해야 했고, 군에 입대하든 경찰에 들어가든지를 결정해야 하였다. 비록 의붓아버지가 고위 장성이었지만, 군과 관계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경찰에 들어가서, 1973년에는 22세의 나이로 경위의 직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경찰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생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갔다. 결국 그에 대한 자극으로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Life has No Purpose)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 작가이자 경찰관으로서의 경력을 쌓으면서, 불교와 많은 프랑스 철학에도 심취했었지만 그후에 내린 결론이 바로 그와 같았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배경
아주 어릴 적에는 부모가 아닌, 할머니, 삼촌, 숙모 두분과 함께 살았다. 그후 어머니가 재혼을 하고, 내가 12세가 되어서야 마침내, 어머니, 의붓아버지, 두명의 친누이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불교 신자로 양육하였다. 열살이 되자 사찰에 들어가 석달 동안 종교 훈련을 받았다. 사찰 밖에서는 중들이 고개를 숙이며 다니기에 그야말로 매우 온유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안에서는 매일매일 서로 말다툼을 하며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의 탑에는, 조그만 금불상 하나가 있는데 때때로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런 경우 그 불상은 어디에 가 있었는가? 중들의 얘기로는 그 불상은 날아다닐 수 있어, 근처의 여러 탑을 들른다는 것이었다. 주의 깊이 지켜본 후에야, 나는 한 중이 그 불상을 빼어내어 숨기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이 그러한 속임수를 쓴다는 데에 마음이 괴로왔다. 이것을 할머니에게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나에게 대단히 화를 냈다. 할머니는 날아다니는 불상을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찰을 떠난 후, 나의 불신은 커져 갔다. 고등 학교 시절엔 심지어 종교 과목 교사까지도, 불교는 많은 파로 분열되어 있으며 일종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나는 인생에 관한 질문에 대해 답을 얻고자 하는 기대에서 여러 프랑스 철학자의 학설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커져만 갔다. 인간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 대답을 알지 못했지만,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되풀이하여 자문해 보았다.
론놀 정권의 끝
1973년과 1974년 중, 전쟁의 소요가 격해지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은 불공평한 일들을 보고서는 더욱 괴로와하였다. 그러한 불만에 대해 경찰관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으므로, 작가로서 무언가를 시도해 보았다. 그래서 「하늘은 어둡다」(The Sky Is Dark)라는, 비판적인 사회 소설을 썼다.
이 책은 나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나는 그로 인해 투옥되었다. 2년을 선고받았지만, 왕가와의 관계뿐 아니라 인근 아시아 국가에 주재하는 한 캄보디아 대사와도 친척 관계를 맺고 있어 그 덕분에 수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 대사는 나를 위해 온갖 힘을 써 주었다.
투옥보다는 자유가 더 좋은 것이 사실이건만,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특정한 사고 및 생활 방식을 강요하려는 체제가 나에게는 투옥이나 진배없이 혐오스러웠다. 고향인 수도, 프놈펜에서의 생활은 아주 비정상적인 것 같았다. 부패하고 물질주의적이며 쾌락 지향적인 사회가 역겨워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경찰직에서 종사하고 싶지 않아서,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타이의 국경 근처인 파일린성으로 이사하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보석 채굴 회사에 근무를 시작했다. 시골에서의 생활 방식은 비교적 매력이 있었으나, 오래 즐기진 못했다. 그건, 1975년 4월, 프놈펜에 진군해 들어온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지가 론놀을 축출하고, 즉시 전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이전의 정부에서 일했던 모든 공무원은 신고를 해야 하였으며, 그리하여 재훈련의 목적으로 특별 캠프에 보내졌다. 나는 다시 경찰이 되고 싶지 않아서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신고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재훈련”이란 사실상 처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고한 사람은 모두 살해되었던 것이다.
공포의 기간
추산에 의하면, 그후 수개월 만에 일, 이백 만에 달하는 캄보디아인이 죽임을 당했다. 나 자신도 그 처형 광경을 목격하였으며, 집단 무덤은 물론 강과 호수에도 문자 그대로 피로 붉게 물들었고 시체로 가득하였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집과 토지에서 쫓겨났다. 미증유의 혁명이, 2천년 이상이나 지속된 캄보디아의 전통을 휩쓸어 버렸다. 그러한 급진적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해본 캄보디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당황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채, 이러한 비인간적 사회에서의 삶에 무슨 목적이 남아 있겠는가 하고 자문하였다. 그래서 외국으로 도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미 공산 크메르에서는 나를 수색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요시찰인 명부에 올라 있었다. 경찰직을 떠난 이래 가명을 사용하여 생활하고 있던 터라 나의 수색 작업은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작사가이자 작가로서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내 신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심지어 나를 본명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신변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타이로 도피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권이야 어떻든 여전히 고국을 사랑하였다. 아울러, 일단 떠나게 되면 부모와 형제 자매를 보기 위하여 다시 온다는 것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게다가 타이로 가는 길을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사살당해서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누군가의 시체를 보았었다. 그가 타이로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탈주—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
공산 크메르가 집권한 지 꼭 두달 후, 다른 사람과 함께 탈주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길을 잃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며칠 후, 이전 경찰 동료와 함께 다시 출발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7명의 다른 일행과 합류하였다. 그중엔 세살난 아이도 있었다.
우리는 밀림에서 소름끼치는 호랑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호랑이나 독사보다 한층더 두려운 존재는, 공산 크메르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은 도피자를 찾아내기 위하여 언제나 밀림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이따금 그들이 눈에 띄었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어 그들에게 들키는 날에는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두려움 때문에 잠을 못잔 날도 있었다.
탈주한 지 삼일째 되는 날, 국경을 건넌 것으로 잘못 생각했다. 매우 기뻐서 갖고 있던 쌀 전부로 밥을 지어 먹었다. 그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그다음 나흘 동안은 먹을 식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희망도 기력도 모두 잃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바나나 다발을 갖고 나무 사이로 뛰어 다니는 원숭이들이 보였다. 하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원숭이들에게 바나나를 좀 달라고 구걸했다.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원숭이 한 마리가 바나나 한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다른 원숭이들도 그를 흉내내어 바나나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두 20개의 바나나를 얻었다.
그날의 가슴벅찬 일 때문에, 나는 그날밤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을 응시하니 검푸른 벨벳같은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무수한 별이 반짝거렸다. 참으로 잊지 못할 밤이었다.
한참 동안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연에 나타난 놀라우면서도 복잡한 모든 물리 현상을 관찰할 때, 어째서 인간은 이에 대한 영광을 지혜로운 창조자에게 돌리지 않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밤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나님은 하늘 저 멀리에 틀림없이 계신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마치 친아버지께 이야기하듯한 친밀한 감정으로 난생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게 되자, 사물이 이해되기 시작하였고, (1)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며 (2) 인생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자연의 물리 현상에 지성적인 설계가 나타나 있다고 추리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의미 심장한 법칙의 창시자께서 어떤 특정한 목적에 기여하도록 인간을 땅에 두시지 않으셨겠는가?
그러자 이러한 질문이 떠올랐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을 제거할 능력과 지혜를 소유하고 계심이 분명한데 어째서 그토록 많은 재난을 지금까지 허락해 오셨는가?’ 또한, 과연 어느 종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숭배하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이처럼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내 생활에서 우선적인 일이 되어야 했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 인간에게 해답을 알려 주시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계속 밀림을 헤쳐 나아가면서 어머니에 관해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선교인들은 우리 집에 자주 방문했었다. 때때로, 어머니는 이상한 종교에 대하여,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피를 먹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져오실 의로운 상태나 심지어 낙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한마디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믿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어머니는 이러한 점을 숙고하고 조사할 만한 지성있는 여성이 아닌가?’ 나는 사실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우선 살아서 캄보디아를 빠져 나가야 했다.
나는 허리만 둘렀을 뿐, 입은 옷이라곤 없었다. 이 때쯤, 맨발과 다리가 심히 부어올랐다. 일행 전원은 기운이 다 빠지고 거의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나뭇잎을 씹어 먹었다. 지루한 여행의 십일 째 되는 날, 산을 올라가야 했다. 꼭대기에서 타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산을 내려오다가 고기 썪는 악취가 나는 오두막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 안에는 반쯤 썩은 시체와 해골들이 있지 않은가! 오두막 주위에는 그 소행을 드러내는 공산 크메르의 구두 발자국이 나 있었다. 기겁을 하여 도망쳤다! 우리는 아직도 위험하였다. 그 시체는 분명 캄보디아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희생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밀림 속을 좀더 멀리 헤쳐가다가, 이윽고 국경으로 생각되는 강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강 아래쪽으로 30미터 좀 못되는 곳에는 폭포가 있었다. 나는 친구와 논쟁을 벌였다. 위험성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성인들만 강을 건너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어두워지기를 기다린 다음, 등에 어린 여자 아이를 묶고서 맞은편으로 강물을 헤쳐 나갔다. 강은 깊었고, 나는 더 빠져갔으나, 드디어 해내었다! 우리 모두는 무사했던 것이다!
다음날, 옥수수밭이 있는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스스로 배고픔을 달래려고 날옥수수를 따서 먹었다. 밭 근처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는데, 그 안에 성냥갑이 보였다. 딱지를 보니, 캄보디아가 아닌 타이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심정이 어떠했겠는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바로 증거물이 있지 않은가! 드디어 우리가 타이에 온 것이다!
그때 우리를 두른 산과 강이 참으로 아름다왔다! 그후 즉시, 나는 고열이 나고, 삼일 동안 의식을 잃어버렸다. 밀림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설사 그렇더라도,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우리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함
타이의 난민 수용소에서, 우리는 200명의 다른 캄보디아인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프로테스탄트 종파의 한 성원과 성서를 연구할 수 있었다. 이 종파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알고는, 당장에 침례받기를 원했다. 나는 아직 확신이 없어서 침례를 거절했다. 많은 캄보디아인은 즉시 침례를 받았는데, 침례를 받으면 옷을 받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 종단으로부터 모국어인 캄보디아어 성서 한권을 얻었다. 성서를 읽고, 하나님께는 여호와라는 고유한 이름이 있으며, 이분은 고대 유대인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으로,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좀더 온전히 알기를 원했던 하나님이 바로 이분이었다.
1975년 12월, 타이에서 5개월을 지낸 후,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로 이주하였다. 처음엔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고, 거기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육개월 후, 린츠로 옮기었고, 그곳에선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밤에는 독일어 공부를 계속했으며 낮에는 포장 공장에 나가 일했다.
이 기간에 나는 ‘복음 교회’와 가톨릭 교회에 관련을 맺게 되었지만,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왕국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번은, 신부에게 “좋은 소식”의 의미에 관하여 그리고 “좋은 소식 종교”와 같은 그런 종교가 있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신부는 대답을 전혀 못했다. 나는 ‘어머니가 이야기해 주려고 했던 좋은 소식이 대체 무엇인가?’하고 궁금해졌다.
집에 홀로 있을 때, 두차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매번 기도하고 나서 문 밑에 강연 쪽지가 놓인 것을 보았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란 장소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 보라는 초대장이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미 나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에 대해 증거하는가? 의문과 호기심에 가득차서 두번이나 ‘왕국회관’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두번 다 결국 찾아간 곳은 교회였다. ‘왕국회관’은 디스코 홀 이층에 있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었다.
두번째로 찾아본 후 며칠이 지나, 타이 출신의 친구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자신을 밝히는 두 사람이 방문하였다. 친구가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성서를 펴서, 그 ‘왕국’이란 그리스도께서 관장하는 이 땅을 다스릴 하늘의 정부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어 죽은 후의 인간의 상태에 대해 질문을 하였을 때도 그들은 다시 성서를 사용하여 대답해 주었다. 성서에 근거한 그들의 논리적인 대답에 깊이 감명을 받아서 즉석에서 성서 연구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날 친구와 함께 ‘왕국회관’의 집회에 참석했다.
아직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집회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의 깊이 연설을 들었다. 그러나 그 연설은 좋은 소식, 즉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여호와의 ‘왕국’에 의해서, 이 땅은 사람들이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낙원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계시 21:3-5) 언젠가 어머니가 이와 비슷한 말씀을 성서에서 읽어 준 기억이 났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제거된 세계는, 바로 전능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던 바였다.
하지만 이젠 여호와께서 그러한 세계를 왜 오래 전에 창조하시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질문과 그외에 많은 질문들이 정기적으로 성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만족하게 대답되었다. 나에게서 맹신을 요구하지 않는 종교를 발견하게 된 것이 즐거웠다.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생활 방식은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대단히 컸다.
“하나님의 자녀” 종단에서 겪은 경험과는 뚜렷이 대조되게도, ‘증인’들은 단기간의 교육을 베푼 후 침례받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침례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요구 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하고서는, 내가 침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들이 침례를 주리라고 기대했다. 놀라웁게도, ‘증인’들은, 내가 그 단계를 참으로 밟기 원하는지 신중히 결정하기를 원하였다. ‘증인’에게는 양보다는 질이 중요시 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독일어로 성서를 연구한 지 거의 7개월이 된, 1977년 7월, 린츠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인생의 목적을 깨달음
이 대회에서 새로운 서적이 발표되었다. 4년 전에 나는 「인생에는 목적이 없다」라는 책을 펴냈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은 마치 내 책에 대한 응답과도 같은, 「인생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다」란 책을 발표한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는 글을 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 새로운 책을 감명 깊게 받아들였다.
나는 이 좋은 소식이 비탄에 잠긴 캄보디아인들에게 알려지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이 좋은 소식을 통해서 그들은 시들지 않는 희망과 놀라운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캄보디아인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동포를 돕는 일에 여호와께서 나를 사용해 주실 것을 바라면서,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기도하였다.—이사야 6:8.
1980년에 빈에서 일본인 증인과 결혼하였다. 나는 어느 ‘여호와의 증인’의 결혼식에서 그를 만났었다. 아내 역시 빈 음악 학교에 다니던 동포 일본인 학생을 통해서, 찾고 있던 진리를 마침내 발견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그 동료가 아내에게 성서를 이해하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두번째 아이가 출생한 후에, 아내에게 건강 문제가 생겨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었다. 그래서 1983년에 이사하여 동경에 거주하였다.
캄보디아 피난민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나의 염원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에는 약 600명의 캄보디아인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동경 교외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들에게 봉사하며, 인류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에 찬 목적을 이해하도록 도우므로 나로선 큰 기쁨을 맛보고 있다. 지금은 내가 직접 연구를 사회하거나 일본인 사회자를 돕든지 하여 약 열 두건의 캄보디아인과의 성서 연구를 돕는 큰 특권을 즐기고 있다. 한달에 두번씩 우리 전 가족은 오로지 캄보디아인들에게만 온종일 봉사한다. 비록 이 일을 하려면 300킬로미터 가량의 자동차 여행을 해야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영적으로 꾸준히 발전하는 것을 볼 때 크나큰 격려를 받는다.
고국에 있는 친가족과의 연락이 오랜 기간 두절되었다가, 1981년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한통 받았다. 의붓아버지와 누이 한명이 내란으로 살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세 식구,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누이는 아직 생존해 있다. 지금은 일년에 수차례 편지 연락을 할 수 있지만, 그 편지 내용으로는 캄보디아의 종교적 실태가 어떠한지 말하기가 곤란하다.
나로서는 인생의 목적을 탐구함으로 분명히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데 사랑하는 가족이 연합되어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 그리고 어머니, 남동생, 누이와 재결합할 수 있게 될 날을 학수 고대한다. 그동안에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16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캄푸치아와 인접 국가들, 삽입 지도에 내가 타이로 탈주한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타이
캄푸치아
안다만 해
[지도]
타이
바탐방
파일린
캄푸치아
[15면 삽화]
프놈펜 시에 있는 왕궁의 한 건물. 소년 시절에 왕 앞에서 춤을 춘 곳이다
[18면 삽화]
아내와 내가 두 자녀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