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충성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베드로 전 4:3.
1. 왜 인류의 악은 현시대에 더욱 악화되는 것 같습니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특이한 때, 전례없는 폭력과 유혈과 만연한 도덕의 타락으로 특징을 이루어 온 기간에 살아 왔읍니다. 수천년 전 비슷한 기간에 관하여 성서의 역사적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니라].” (창세 6:5) 그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유의하지 않았읍니다. 이 말은 ‘노아’ 홍수 이전의 사물의 상태를 묘사한 말이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통치의 현 제도의 마지막 날에 비슷한 상태가 존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4:37-39) 기원 1914년 이래 우리는 그 “마지막 날”에 살아 왔읍니다.
2, 3.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나쁜 영향력을 느끼고 있으며, 왜 그들은 그것을 저항해야 합니까?
2 인류의 도덕 수준이 더욱 더 낮아지고 있는 지금 부도덕한 행동을 무방하다고 생각하게 하는 압력이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가하고 있읍니다. 소위 “신도덕”에 대한 생각이 주위의 세상 사람들에게 침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서적과 오락을 채우고 있읍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굳은 결의를 가지고 저항해야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부도덕한 생활에 가담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높은 도덕 표준에 따라 형성된 새로운 인간성을 옷입었으므로 이방 사람들과 같이 생활할 때가 지났읍니다. 그러한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은 개가 토한 것에 되돌아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베드로 후 2:22.
3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타락한 육체의 욕망을 더는 경험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그들에게 약점입니다. 그들이 자제라는 도덕적 방어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약점을 쉽게 공격받을 수 있읍니다. 이 부패한 인류 세상의 신, ‘사단’은 그의 세상의 부패한 영향력을 통하여 이 약점에 작용합니다. 그는 통용 기원전 15세기에 ‘이스라엘’을 부패시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도록 하기위해 사용한 같은 책략을 오늘날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단’은 육체의 정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불리한 심판이 임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베드로 전 5:8.
4. 그리스도인이 그릇된 욕망을 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읍니까?
4 그리스도인이 마귀의 사물의 제도가 만드는 도덕적으로 부패한 서적과 기타 형태의 오락에서 즐거움을 얻을 때 그는 자신을 드러내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릇된 욕망을 품는 것은 마침내 그것에 굴복하고 그리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까? (야고보 1:14, 15) 그러한 길로 계속 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이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모압’ 평지에서 죽임을 당한 24,000명에게 있었던 일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단’은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왕이신 분께 불충성하게 함으로 그들에게 대하여 승리를 거둔 셈이 될 것입니다.—민수 25:1-9.
모든 면에서의 충성
5, 6. (ㄱ)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ㄴ) 예수께서는 왕국에 부가하여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읍니까? 어떻게?
5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충성에는 그보다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아모리’ 사람들과 용감하게 싸운 ‘이스라엘’ 군인들도 자기들이 하나님께 충성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충성을 또한 전체 행실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읍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릇된 욕망에 굴복한다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그의 전 파는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그는 사실 자신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불충성하는 것입니다. 그의 비그리스도인 행실은 그의 하나님 겸 왕의 이름에 모독을 가져옵니다.—베드로 후 2:2.
6 그리스도인은 사소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는 일에서도 자기의 전체 생활로 하나님과 왕국에 대한 충성을 나타냅니다. 그의 생활은 세상의 친구나 친척이 자기에 대해 악담을 할지라도 세상의 부패한 생활과 현저히 달라야 합니다. (베드로 전 4:3, 4) 예수께서 하나님의 왕국의 관심사에 무엇이 수반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바에 유의하십시오. 그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부언하셨읍니다. (마태 6:3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왕국을 충성스럽게 옹호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과 성서의 충고에 표현된 하나님의 의에 일치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로써 참 그리스도교를 반영해야 합니다.
7. (ㄱ) 참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와 개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특히 무엇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ㄴ)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것을 버릴 때에 왜 불충성의 죄가 있읍니까?
7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인들과 같이 참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읍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깨끗하고 의로운 것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가장 큰 원수인 ‘사단’ 마귀는 부패하고 불의한 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 때문에 이 불순종하는 인류 세상은 악한 신이며 통치자인 그의 부패하고 불의한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 8:44; 고린도 후 4:4) 그리스도인이 그릇된 욕망에 굴복함으로 의로운 것을 버린다는 것은 불충성스럽게도, 그가 다른 신, 이 세상의 악한 신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는 이 악한 자의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그는 ‘모압’인들과 ‘미디안’인들의 축제에서 그릇된 욕망에 유혹되어 ‘바알’ 숭배에 빠지게 되었던 불충실한 ‘이스라엘’인들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과 행동의 가장 큰 순결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충고에 청종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 12:2.
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은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생활 가운데 있을 수 있읍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8 여호와의 이름이 하나님의 왕국을 증거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읍니다. 그 이름은 우주에서 고결하고 깨끗한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그의 아들이 잡은 왕국의 홀은 “공평한 홀”입니다. (히브리 1:8) 그 왕국과, 왕국의 최고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신민들은 그들의 생활의 모든 면에서 그 의를 반영하여야 하지 않겠읍니까? 충성은 이것을 요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항상 여호와의 이름을 지니고 있읍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나쁜 일 혹은 수치스러운 일을 은밀히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그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는 “은밀한” 것이 우리 생활가운데 있을 수 없읍니다. 우리가 비밀리에 악을 행한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만 비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셨읍니다. 그는 불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인들이 ‘모압’인들과 ‘미디안’인들의 장막안에서 행한 일을 보시지 않았읍니까? 그는 수세기 후에 불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의 안뜰의 안방에서 행한 일을 보시지 않았읍니까? 그는 거기에서 그들이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보시지 않았읍니까?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불충성은 숨겨질 수 없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속이고 있었읍니다. (에스겔 8:9-12) 참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가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이러한 거짓 이론을 받아 들이는 잘못을 범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9, 10. (ㄱ) 어떻게 육체의 욕망이 그리스도인을 난관에 처하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ㄴ) 여기에 어떻게 충성이 결부되어 있읍니까?
9 그리스도인이 강한 방비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난관에 빠지기 시작할 수 있읍니다. 그는 그릇된 육체의 욕망으로 유인하는 환경에서 멀리 떠나 있는 대신에 가능한 한 벼랑의 가장자리 가까이로 가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의 양심이 그에게 그 욕망이 옳지 않다고 말할지라도 그는 그 욕망을 품을지 모르며, 그 욕망과 오래 장난하면 할수록 그릇된 욕망은 더 강하여집니다. 불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인들과 같이 그는 “해로운 일”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저항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 10:6, 신세) 그러한 상태는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가 그들의 손을 은밀하게 상대방의 음부에 가져가 서로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일을 시작할 때 발전될 수 있읍니다. 이것은 도덕적 더러움의 한 형태이며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여호와의 의를 반영해야 합니다.
10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일반 세상에서 용인하는 것을 따를 수 있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건전한 표준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여호와의 원수인 “이 세상 신”의 불의를 반영합니다. (고린도 후 4:4) 우리의 감정이 무디게 되도록 방임하거나 우리 자신을 속일 것이 아니라 성욕이 자극되면 이것이 성적 결합으로 그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충동으로 인도할 수 있읍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실태입니다. 이러한 만족은 정상적이며 결혼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한 결합으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심각하게 범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불충성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성을 나타냄으로 그러한 범죄의 모험을 하지 말고 위험하게 성욕을 자극하는 행동을 피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11. (ㄱ) 어떤 사람들은 정욕적인 “애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이론을 제기할지 모르며, 그 이론은 왜 그릇됩니까? (ㄴ) 실제로 성적 결합을 하지 않을지라도 더러운 행동은 어떻게 “음행”(포르네이아)의 단계에 이를 수 있읍니까?
11 “데이트”가 예사가 되어 있는 오늘날 많은 젊은 남녀는 강렬한 정욕을 유발하는 “애무”에 빠집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는 바로는, 성서에서 미혼자들에게 특별히 금하는 것은 음행이므로 성기를 실제로 결합하지 않는 한 이러한 애무에는 잘못이 없다는 이론을 제시할지 모릅니다. 그러한 이론은 그릇된 것이며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지체를 더 이상 “부정(더러움)과 불법에” 노예로 바치지 말고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고를 받고 있읍니다. (로마 6:19) 그들의 정욕적인 “애무”가 성서의 의미에서 “음행”(희랍어, “포르네이아”)의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을 지라도 그것은 “더러움”(희랍어 ‘아카타르시아’), 단정치 못하고 불순한 행실이 될 수 있읍니다. “더러움”은 사도가 타락한 육체의 일을 열거할 때 “음행” 다음에 언급하였읍니다. 그는 회개함이 없이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 이라고 경고하였읍니다. (갈라디아 5:19, 21) 그 뿐 아니라 그러한 더러운 행동은 점차 그 종류와 정도에 있어서 심각하여져서 마침내 “음행”(포르네이아)으로 분류되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이 단어는 성경에서 미혼자들 사이의 성적 결합만이 아니라 창녀의 집 등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심각한 부도덕 혹은 추잡한 행동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ㄱ) 약혼을 하였다고 하여 남녀가 정욕적인 유희에 빠지는 것이 합당합니까? (ㄴ) 독신들은 어떠한 입장을 피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약혼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애정을 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기혼자들에게 제한된 깊은 관계에 빠져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결혼시까지 실제로 성적 결합을 할 자유가 없으므로 부부가 성관계를 갖기 전 예비 행위인 깊은 “유희”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련에 대한 존경의 결핍,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깨끗한 표준에 불충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애정을 표시할 때에는 언제나 그들의 충성에 따라 주의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지방 습관을 범하여 사람들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그들끼리만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이 갑자기 그 자리에 나타날지라도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행동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우리가 약함과 육체의 욕망을 경계하도록 보호받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반면에 어두움과 밀실은 우리의 방비력을 약화시키고 우리의 결심을 허물어지게 할 수 있읍니다. (잠언 9:16-18; 요한 3:20, 21; 에베소 5:7-13 비교) 약혼한 사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인 남녀는 더러운 행동으로 인도하는 환경을 피함으로 그들의 자존심과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위험하게 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읍니까? 그들은, 그들이 있는 방이나 장소에 어떤 사람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앎으로 갖게 되는 건전한 억제력을 더 이상 느끼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지 않음으로 이러한 일을 피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면 약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이 외딴 곳에서 은밀히 만나는 일이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개적인 교제에서 서로 사귀므로 더 큰 억제력을 사용할 이유가 있읍니다.
회중적인 조치
13, 14. 그리스도인 회중이 취하는 어떠한 조치가 하나님께 불충성한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충실한 장로들이 취한 행동과 유사하며, 이러한 조치는 부도덕한 행동을 반복하는 자들에게 왜 필요합니까?
13 ‘이스라엘’인들이 ‘모압’인들과 ‘미디안’인들의 축제에서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였을 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은 그들에 대한 처벌 조치를 취하였읍니다. 그 대표자들은 직접 불충성스러운 ‘이스라엘’인을 아마 천명이나 죽였을 것입니다. (민수 25:3-5) 이와 유사한 것을 오늘날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볼 수 있읍니다. 회중은 심각한 죄를 반복한 불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처형할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그들을 제명시킴으로 그들을 처벌할 권위를 받았읍니다. (고린도 전 5:11-13) 이것은 회중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만일 이렇게하지 않는다면 회중이 의로우신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읍니까? 회중은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옹호할 의무가 있읍니다.
14 ‘포르네이아’라는 말로 지적된 모든 심각한 부도덕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추잡한 행동이므로 그리스도인 회중은 그러한 일을 반복하고 아무런 성실한 회개를 나타내지 않는 자들을 제명시키는 것이 정당합니다. 어떠한 형태로 든지 “더러운 것”을 계속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더러움은 정도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체적으로 약간 더러울 수도 있고 심하게 더러울 수도 있듯이 도덕적 더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움의 정도를 판단함에 있어서 행동의 심각성을 결정하기 위하여는 동기와 환경 및 더러운 행동으로 인도한 것을 모두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회중의 순결과 깨끗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회중의 관심은 비이치적이 아니라 제반 사실에 따른 것이며, 제명 처분을 하는데 성급하지도 않고 심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반복이 있는 경우에 지체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디모데 후서 2:19에 기록된 것과 일치합니다. 그 가운데 이러한 말이 있읍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회중의 장로들이 취하는 사법적 조치는 회중과 회중의 명성이 더러움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여 줍니다. 그것은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욕망을 품는 사람에게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회중 전체에 건전한 경고가 됩니다.
15. 나쁜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읍니까?
15 물론 어떤 사람들이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는 용서를 받을 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시며 그리스도인 회중은 하나님의 용서와 일치하게 행동합니다. (요한 1서 1:9)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사법 위원회로부터 공개적으로 책망을 받거나 혹은 개인적 책망을 받을 수도 있읍니다. (디모데 전 5:20) 제명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후에 참으로 회개하고 나쁜 행실을 변화시킨다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에게 반드시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에스겔 33:11.
불충성스러운 행동을 피하라
16, 17. 우리는 무엇에 대한 강한 방비력을 유지해야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16 우리 인간이 공격당하기 쉬운 육체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방비력을 유지해야 하며 우리의 방비력을 침해하는 환경을 인정할 필요가 있읍니다. 육체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린도 전 9:27)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성욕을 계속 억제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제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부패한 사고 방식을 반영하는 세속 서적을 읽는다면 우리는 강한 방비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입니까, 아니면 약해질 것입니까? 우리가 우리의 정신으로 그릇된 욕망을 계속 생각하도록 방임한다면 우리는 확실히 강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공격을 받기가 더욱 쉬울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빌립보서 4:8에 있는 충고를 따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 귀절은 불의하고 더러운 욕망을 불태우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것을 정신에 간직할 때 우리는 불의한 행동에 빠질 것입니까?
17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것을 행하도록 우리를 유인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읍니다. 만일 우리가 그 마귀를 용납한다면 마귀는 즉각 우리를 부도덕한 행동으로 뛰어들도록 인도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끌려가고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면 우리는 확실히 닥칠 재난을 자초하는 것이 아닙니까? 처음부터 유혹을 물리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읍니까?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인들이 만일 ‘모압’인들과 ‘미디안’인들이 그들 앞에 놓은 첫 유혹을 물리쳤다면 더 낫지 않았겠읍니까?
18. (ㄱ) 성서는 ‘여자를 만지는 일’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이 사실로부터 독신들은 자기들의 견해에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18 ‘하와’의 경우를 고려하여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에덴’ 동산에 있는 금지된 과일을 만져서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왜냐 하면 만지는 것은 먹기 위한 첫 단계였기 때문입니다. (창세 3:3) 이 단 하나의 나무에 있는 과일을 먹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가 먹도록 허락된 다른 과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것을 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나타내는 행동이었읍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전서 7:1에 있는 충고를 깊이 고려할 수 있읍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만지지, 신세] 아니함이 좋[으니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만지는 것은 때때로 성적 접촉을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었읍니다. (잠언 6:29; 창세 20:6, 7, 신세, 비교) 그 이유는 아마 성적 결합으로 인도하는 사건의 연쇄가 정욕적으로 이성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정욕)을 품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5:28) 그러므로 ‘여자를 만지는 것’은 그러한 불의한 정욕이 솟아나게 혹은 정욕을 자극하려고 이성을 신체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읍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정욕을 계속 억제할 수 없고 정욕적인 방법으로 혹은 더러운 방법으로 이성을 ‘만지’고 싶어한다면 사도 ‘바울’이 계속 말한 바와 같이 결혼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 7:2, 9) 한편 아직 독신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현명한 행동은 쉽게 심각한 범죄로 인도할 수 있는 일 즉 정욕적으로 ‘바라보는 일’ 혹은 ‘만지는 일’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읍니다.
19. 왜 우리는 우리 생활 가운데서 여호와의 의를 반영하고자 노력해야 합니까?
19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좋은 율법과 사랑에서 나오는 친절 혹은 충성스러운 사랑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읍니다. 우리는 온 땅이 불의한 정부의 간섭없이 하나님의 왕국의 다스림을 받게 될 전망을 알고 기뻐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이것이 인류에게 공평하고 의로운 다스림이 되며 항구적인 평화와 안전을 가져올 것을 알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지적 조직의 일부로 우주의 이 의로우신 통치자께 가까이 가는 것을 기뻐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한 생활로써 하나님의 의를 반영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이것은 확실히 그분께 충성을 나타내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0. 충성을 나타내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는 것의 일부입니까?
20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는 그가 물에서 침례를 받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명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나타냄으로써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충성스러움, 신세]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성품을 포함합니다. (에베소 4:24)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과 일치하게 처신하셨읍니다. (요한 5:30) 이 동일한 의로운 율법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서 마음의 욕망을 움직여야 합니다.
충성스러움으로부터 오는 유익
21, 22. 여호와께 충성스러움으로 오는 유익 몇가지는 무엇이며, 이것은 어떻게 육체의 쾌락과 비교됩니까?
21 사람이 그릇된 육체의 욕망을 품음으로 오는 즐거움은 다만 순간적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 충성스러움으로 오는 유익은 영원할 수 있읍니다. 그러한 유익을 버리고 덧없이 지나가는 순간적인 즐거움을 택하지 마십시오. ‘모세’는 여호와의 충성스로운 종이되는 유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택하였읍니다. (히브리 11:25) 오늘날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매우 뛰어난 유익은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숭배자들의 “큰 무리”의 일원이 되어 현 사물의 제도를 종결지을 재난이 될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보존되는 것입니다.—다니엘 2:44; 계시 7:9, 14.
22 또 다른 현저한 유익은 하나님의 왕국이 가져 올 새 기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의로운 통치자들 아래에서 평화와 안전을 누리며 사는 것은 잠깐 사이에 덧없이 지나가는 불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까? 생명 그 자체만 해도 그러한 쾌락보다 훨씬 더 가치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 대한 불충성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할 수 있지만 그분께 대한 충성은 그 반대 즉 영원한 생명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 (요한 1서 2:25) 이러한 현저한 유익과 기타 많은 뛰어난 유익들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에게 옵니다.
23. 그러므로 오늘날 따라야 할 현명한 길은 무엇입니까?
23 우리가 새 기원의 바로 문턱에 이르렀으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릇된 욕망을 품고 참 하나님께 불충성하게 됨으로 낙오자가 되는 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곧은 길을 따름으로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것입니다!—시 37:2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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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앞둔 미혼 그리스도인들이 외딴 곳에서 따로 시간을 보내지 않음으로 더러운 행동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