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그는 ···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명 32:4.
1, 2. (ㄱ) 성서는 심판관으로서의 여호와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모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오래 전에 한 ‘히브리’인 「시편」 필자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하였읍니다. 그리고 다른 시에서 이러한 말을 볼 수 있읍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니이다].” 그러한 표현은 여러 세기 전에 한 표현이지만 그러한 말은 당신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표현이 아닙니까? 우주의 최종적 권위자이신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만족과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시 33:5; 119:75.
2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가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한가지 이유는 우리 각자가 어떤 형태로든지 불의와 불공평에 피해를 입어왔기 때문입니다. 아마 당신은 국적이나 인종적 사회적 배경 때문에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왔을지 모릅니다. 혹은 당신은 아마 학교에서, 직장에서 혹은 이웃에서 공정하지 않은 대우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는 예를 듣는 것은 참으로 흔한 일입니다.
3, 4. 이것은 많은 인간 재판관들의 경우와 어떻게 다르며 따라서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3 한 비유 가운데서 묘사된 바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그러한 대우를 받을 때의 사람들의 느낌이 어떠한가를 잘 아셨읍니다. 그 분은 분명히 ‘로마’인들에 의하여 임명된 한 재판장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재판장이었읍니까? 공정한 대우를 받을 것을 확신하고 찾아갈 수 있는 재판장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장이었읍니다. 사실, 그 재판관은 한 ‘유대’인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댔을 때에 비로소 공의를 베푼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누가 18:1-6.
4 그러한 재판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읍니까? 마땅히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할 사람이 그렇게 하기를 주저합니다. 진실로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분으로 묘사된 재판장은 참으로 상쾌한 대조를 이루는 분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필자는 여호와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였지만, 당신도 그분이 그러한 분임을 확신합니까? 당신은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도 그러한 주장을 들어 본 일이 있읍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견해에 영향을 줍니까? 당신은 「시편」 필자의 말에 동의하는 확신을 주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읍니까?
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의 어떠한 면이 일부 사람들에게 관심이 되어 있읍니까?
5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목적에 관심이 있지만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확신에 의문을 던지는 질문 때문에 교란된 사람들이 일부 있읍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큰 환난”에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가 종말을 고하기 전 짧은 기간에 모든 사람이 왕국 소식을 듣고 받아들일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를 결정할 기회를 가질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마태 24:21) 또 다른 관심 분야는 어떤 친척, 현대의 악한 사람들과 기타 사람들이 새 질서에서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을 것인가의 여부입니다. 혹은 하나님께서 새 질서에서, 특히 결혼 상태 및 가정사와 관련하여 어떠한 특권을 주실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당신은 교란되어 있읍니까? 아니면 여호와께서는 정의와 공의에 합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까?
6. “정의”와 “공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6 정의와 공의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장황하고 법률적인 정의를 논하지 않고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읍니다. 즉, “정의”의 사람은 올바르고 도덕적인 일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덕이 있고 비난받을 것이 없읍니다. 이와 관련하여, “공의로운” 사람은 편협됨이 없이 올바르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에 대한 이러한 묘사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명 32:4.
증거를 고려해 봄
7. 어떠한 증언을 조사해 보는 것이 적절합니까?
7 한 유명한 법률가는 한 때 “법정 안에서나 밖에서나 공의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 일이 있읍니다. 법조계에서의 경험 및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여 그는 그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읍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할지 모르지만, “경험”은 여호와에 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몇가지 증거, 그분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의 증언을 고려하여 봅시다.
8, 9. (ㄱ)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법적인 일에 어떻게 관련을 갖게 되었읍니까? (ㄴ) 그는 그 상황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읍니까?
8 성서 기록이 시작되기 전에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하여 말한 일이 있읍니다. ‘아브라함’이 그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시를 떠나 ‘가나안’ 땅에 이주하였읍니다. (창세 12:1-5; 히브리 11:8) 그의 조카 ‘롯’은 ‘소돔’ 시 근처에 거주하였읍니다. 후에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대표하는 천사의 방문을 받았읍니다. 그 천사는 주민들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사법적인 조사를 하러 간다고 말하였읍니다. (창세 18:20, 21) 천사는 어떤 확정적인 사법적 조치가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는 “그 모든 행한 것이 내게 부르짖음과 같은지”, 불평과 같은지 알아보러 가는 중이었읍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 어떠한 반응을 보였읍니까?
9 ‘롯’을 포함한 ‘소돔’의 주민들이 보존을 받을 가능성에 관심을 가진 ‘아브라함’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하였읍니다. 창세기 18:23-25의 기록은 ‘아브라함’의 말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다음에, 그 도시를 보존할 근거가 될 수 있을 의인의 최저 수자를 알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사십오명, 사십명, 삼심명, 이십명, 아니 열명의 의인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는가를 질문하였읍니다.—창세 18:26-33.
10, 11.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잘못된 일을 행하려 하고 계셨다고 믿었읍니까?
10 ‘아브라함’은 현재 우리처럼 도덕적이고 덕이 있고 곧은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의미의 “의인”이 그만큼도 없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하고 말하였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의를 심각하게 의문시하고 그분이 불공평하게 행하실 것을 우려한 것이었읍니까?
11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와 반대로, 증거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개성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창조주께서 악인과 의인을 멸하실 것으로 상상할 수 없었음이 명백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불가”한 것, 즉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 아님을 알았읍니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암시하였듯이,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알았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올바른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악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읍니까?
12.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일을 처리하시는 방법에 관하여 왜 확신할 수 있었읍니까?
12 우선, ‘아브라함’은 자기를 위하여 여호와께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었읍니다. 순종적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에 입각하여 ‘우르’를 떠났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모른 체 하셨읍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축복과 번영을 주셨읍니다. (창세 12:16; 13:2) ‘애굽’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가 ‘바로’에게 욕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셨읍니다. (창세 12:17-20)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조카 ‘롯’을 ‘납치’해 간 네명의 왕에게 승리를 거들 수 있었읍니다. (창세 14:14-20) 그렇습니다. 그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잘 알았읍니다.
13. 하나님께서 과거에 일을 처리하신 방법은 어떠하였읍니까?
13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아직도 여호와께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는 다른 이유들이 있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산 사람들과도 관계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홍수 전에, ‘아브라함’의 조상 ‘노아’는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사람들의 세상 가운데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읍니다. (창세 6:5-7, 11, 12) 하나님께서 그 횡포한 세상을 끝내실 때에 “당세에 완전한” 사람이었던 ‘노아’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읍니까? (창세 6:9, 13)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와 그의 가족을 악인들과 함께 일소하셨읍니까? 확실히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며, ‘아브라함’은 그것을 알고 있었읍니다.—베드로 후 2:5.
14. 이 증거는 어떠한 결론을 내리게 할 것입니까?
1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소돔’의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다루실 것인지에 대하여 확실치 않은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에, 그에게는 그의 생각을 인도해 줄 충분한 근거가 있었읍니다.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두 종류의 사람들을 동일하게 다루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그의 결론은 정확하였읍니까? 확실히 그러하였읍니다! ‘소돔’과 그 주변의 도시들은 멸망되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의로운 ‘롯’”이 가족과 함께 도피할 기회를 갖게 하셨읍니다.—베드로 후 2:7, 8; 창세 19:21-29.
15. 이것은 왜 우리의 관심사입니까?
15 이제,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 생사와 관련된 미래의 어떤 상황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에 관한 질문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읍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다루신 일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신 일을 알고 있읍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로써 일을 처리하여 오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당신은 그것의 영향을 받아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를 판단하겠읍니까? 당신은 성서의 증언을 무시하겠읍니까? 아니면 그것에 따라 당신의 생각을 올바로 틀잡겠읍니까?
겸손의 필요성
16, 17. 왜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겸손을 필요로 합니까?
16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이 얼마나 철저히 타락하고 변태적이었는가를 성서 기록을 통하여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죄에 대한 부르짖음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도시들을 멸망시킨 것이 정의와 공의에 입각한 행동이었음에 동의할 수 있읍니다. (창세 19:4-11; 로마 1:26-28, 32)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 주민들이 정상적이었으며 무죄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어떠하겠읍니까? 만일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 도시들을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키셨다고 말해 준다면, 그는 창조주에 대하여 성급하고 부정확한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17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처리에 대한 결론에 이르는 데 겸손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잠언 11:2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말하며, 그것이 이 문제에 있어서 확실히 참됩니다.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자세히 모르는 단순한 인간이 자신을 재판관과 배심원으로 세우고 “온 땅의 심판하시는 이”를 정죄하는 것이 현명하겠읍니까? 또 다른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18:13) 만일 단지 몇가지 세부점만을 알고 특히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과 원칙을 모르는 사람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불공평하고 불의하게 활동하셨다고 결론짓는다면 그러하지 않겠읍니까?
18. 어떻게 하여 ‘욥’은 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읍니까?
18 ‘욥’에 관한 성서 기록은 이 점을 더욱 예증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욥’도 몰랐고, 그를 나중에 충고하였던 그의 세 친구들도 몰랐던 사실이지만 ‘사단’은 ‘욥’의 성실에 관하여 여호와께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랑에 근거한 ‘욥’의 충성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사단’이 ‘욥’에게 연속적으로 고통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셨읍니다. ‘욥’은 소유물을 상실하였읍니다. 그의 양떼지기와 양떼가 침략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읍니다. 그의 자녀들은 때아닌 폭풍으로 죽었읍니다. 다음에 ‘욥’은 중병에 걸리게 되었으며, 그의 아내도 그를 욕하게 되었읍니다. (욥 1:6-19; 2:1-9) ‘욥’과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당신이라면 어떠한 반응을 보였겠읍니까? 당신이라면 하나님에 관하여 어떠한 결론을 맺었겠읍니까?
19. ‘욥’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읍니까? 그러나 그의 세 친구는 어떠하였읍니까?
19 ‘욥’은 하나님께 충성을 보이기로 결심하였지만 그가 고통받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였읍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의를 변호하여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괴롭힐 권리가 있다고 말하였읍니다. (욥 32:2; 10:7; 16:17; 23:11; 33:8-12) 물론, 우리는 지금 이 점에 있어서 ‘욥’이 ‘무식하게 말’한 것임을 알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에게 고통을 주고 있던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사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욥 34:35) ‘욥’의 친구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읍니까? 그들도 역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무례하게, 그리고 어리석게 대답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실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욥 4:17-19; 15:15, 16) 또한, 그들은 사실상 ‘욥’의 아들들이 죄가 많다고 주장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셨다고 한 것이었읍니다. (욥 8:3, 4, 20) 그렇습니다. 성서는 정확하게도, ‘욥’의 친구들의 논증은 사실상 ‘하나님을 악하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고 알려 줍니다.—욥 32:3, 신세.
20. (ㄱ) 이러한 본은 일부 성서 기록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어떤 영향을 주어야 합니까? (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 것입니까?
20 오늘날, 우리는 완전한 기록을 연구할 수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시는 데 대한 그 세 친구들의 견해가 참으로 그릇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성서 기록은 어떠합니까? 예를 들면, 여호와께서 혹은 그분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어떤 악한 사람들이나 도시나 국가들을 멸하였다는 것을 성서에서 읽을 때에 ‘욥’의 친구들의 본을 받아 ‘하나님을 악하다고 선언’할 것입니까? (신명 9:1-5) 우리가 관련된 모든 사실과 쟁점들을 모를지라도 발생된 일이 여호와께서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일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고 겸손할 것입니다. (신명 7:2, 23-26; 레위 18:21-27) ‘욥’과 그의 친구들을 시정해 준 젊은이인 ‘엘리후’는 그것을 확신하였읍니다. ‘엘리후’는 이렇게 밝히 말하였읍니다.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욥 34:10, 12.
모두에게 의롭고 공의로우심
21, 22.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는 많은 사람들의 행동과 어떠한 중요한 면에서 다릅니까?
21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는 얼마나 포괄적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어느 때에나 평등하게 적용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읍니까? 우리가 이에 대하여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고위에 있는 인간들은 “당신이 어떠한 사람이냐”에 따라 당신을 다루는 예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유하고 중요한 사람이 악을 행할 때에는 “눈감아 주”거나 용서해 주거나 가벼운 처벌을 가하지만, 가난하고 미미한 사람에게는 엄중한 처벌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예를 본 일이 없읍니까? 그러나 여호와는 어떠하십니까?
22 ‘엘리후’의 말이 대답이 됩니다. ‘엘리후’가 여호와를 묘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욥’을 다루신 일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십시오. 그는 다음과 같이 매우 포괄적인 말을 하였읍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다음에 ‘엘리후’는 여호와께서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고 부언하였읍니다.—욥 34:19.
23. ‘모세’의 율법은 이 사실을 어떻게 지지합니까?
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신 율법의 한 가지 면에 유의함으로써 이 사실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개인들의 문제와 가능한 비행을 다룰 인간 재판관을 위한 규정에서 재판관들에게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들으라”고 명하셨읍니다. (신명 1:17; 16:18-20) 그것은 단순히 소요를 막기 위해서 요구된 것이었읍니까? 아닙니다. 이들 재판관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요구되었읍니다. 기록은 이러합니다.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역대 하 19:6, 7; 출애굽 23:6, 7.
24.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읍니까?
24 여호와의 편벽없는 정의와 공의에 대한 이 증언은 우리를 안심시켜 주며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것을 미래사에 대하여도 그분께서 그분이 세워놓으시고 과거에 따르신 표준과 일치하게 행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우리의 감각
25. 우리 자신의 내적 “감각”은 여호와에 관하여 무엇을 증언합니까?
25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관련하여 고려할 수 있는 또 다른 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감각입니다. 성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알려 줍니다. (창세 1:27) 그것은 그의 신체적 형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분은 영이고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3:10에서 말하듯이, 이 “형상”은 성품 혹은 특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특성, 이를테면 사랑, 공의, 정의 및 지혜를 가진 ‘아담’을 창조하셨읍니다. 우리는 불완전하여 완전한 ‘아담’으로부터 거리가 멀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경건한 특성을 어느 정도 반영합니다. 사실 온 땅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양심과 도덕감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 2:14, 15)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공의감과 정의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계시고 나타내신다는 것, 그러나 우리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방법으로 나타내신 것을 확신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26, 27. 이것은 지옥불 교리를 예를 들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읍니까?
26 이러한 “감각”의 감응에 대한 예로, 지옥불 교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어쩌면 우리 자신의 반응이기도 한—을 고려하여 보십시오. 특히 과거에 많은 교회에서는 악인들의 영혼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초를 받는다고 가르쳤읍니다. 성서는 그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죽은 자가 무의식이며 죽은 사람들 대부분은 부활에 의하여 앞으로 살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전도 9:5, 10; 에스겔 18:4; 요한 5:28, 29; 11:11-14)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바를 모르고도 많은 사람들은 지옥불 교리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집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가 그것을 가르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위에 거슬’립니다. 그들은 사랑과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께서 예컨대 육십년 동안 악했던 사람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원히 받게 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공의와 정의의 감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지한다는 것을 알고 위안을 받았읍니다.
27 하나님의 “형상”을 단지 불완전하게 반영하는 우리 인간들이 정의와 공의가 실천되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실 자체는 여호와께서 그러한 특성의 인도를 받으신다는 우리의 확신을 증가시켜 줍니다.
28. 그러나 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길에 대하여 조심할 필요가 있읍니까?
28 한편, 우리가 틀림없이 불완전하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감각”이 비뚤어져 우리를 부정확한 결론으로 인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만일 정의와 공의에 대한 어떤 사람의 감각이 불완전성에 의하여 과장되면 그것은 기복있는 판유리를 통하여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을 수 있읍니다. 그가 아무리 반대편에 있는 것을 똑똑히 보려고 하여도, 그의 눈에 비치는 영상은 불완전한 유리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29, 30. (ㄱ) 일부 사람들은 구원에 대하여 어떠한 결론을 내렸읍니까? (ㄴ) 그러나 성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29 하나님께서 일을 처리하시는 방법에 있어서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대하여도 동일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일부 사람들이 믿게 된 일에서 알 수 있읍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동정심, 정의 및 공의감에 인도를 받아 만일 그들이 이러이러한 식으로 느끼면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그렇게 느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만인 구원의 교리를 가르쳐 왔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들을 영원히 벌하신다면 공의와 정의에 벗어날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여 지금까지 산 모든 사람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단’ 마귀도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30 그 교리가 일부 사람들의 감정이나 느낌에 ‘공감을 불러 일으킬’지 모르나, 그것은 여호와 자신의 말씀과는 명백히 조화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인간 불완전성에 의하여 왜곡되지 않은 그분의 견해를 알도록 도와 줍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범죄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에 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마태 12:32) 또한 사도 ‘바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있으리라.]” (히브리 10:26, 27) 그렇습니다. 성경은 일부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리라.”—요한 3:36; 로마 2:7, 8.
31. 우리 자신의 “감각”에 부가하여,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의와 공의의 “감각”에 기초한 단순한 인간의 생각은 여호와 자신의 말씀에 의하여 균형잡혀야 하고 그것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리는 증언과 증거가 풍부한 데 대하여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수 있읍니다. (시 33:5) 그리고 그분이 이러한 특성을 행사하실 때에 불완전성에 의하여 비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의하여 그 감사함이 증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면으로,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그분의 풍부한 지식과 지혜와 사랑과 일치하게 완전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니이다]” 하고 말할 수 있읍니다.—시 119:75; 로마 11:33-36.
3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분야를 고려할 것입니까?
32 이에 대한 확신은 왕국 전파의 범위, 새 질서에서의 부활 및 결혼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된 일과 같은 하나님의 미래사에 대한 질문을 대하는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기사에서, 성서에 비추어서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는 온전한 확신을 근거로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여 봅시다.
[394면 삽화]
온 땅을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옳은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하여 가축 떼로 갚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멸하실 때에 ‘롯’을 구출하셨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실 때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하셨다
[396면 삽화]
‘엘리후’는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신다”고 말함으로 ‘욥’과 그의 친구들을 시정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