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을 위한 나의 투쟁—그것은 가치있는 일이었는가?
‘올림픽’ 육상 ‘스타아’ 회고기
오랫 동안 나는 ‘올림픽’ 경기에서 겨루는 이 순간을 꿈꾸어 왔다. 때는 1964년 10월 17일 토요일, 일본 ‘토오쿄오’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 8일째 날이었다.
국립 경기장의 75,000개의 관중석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 찼다. ‘토오쿄오’의 모든 거리들은 철시를 하다시피 하였다. 사실상 모든 사람들은 ‘텔레비젼’ 수상기 앞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200‘미터’ 결승 시각이 도래하였다.
나는 일곱명의 다른 단거리 선수들과 나란히 출발 지점에 늘어 섰다. 우리 각자는 이제까지 있었던 예선을 통과하였다. 이 경주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람들이었다.
압박감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이는 수백만명이 시청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 경기들은 소련과 미국 사람들간의 거대한 일종의 경쟁으로 변하고 있었다. 매일 각 나라가 차지한 ‘메달’ 수에 대한 비교는 전세계의 주목 거리였다. 우리의 학교들, 시장(市長)들, 주지사들,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우리가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과 우리 나라가 최고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전문을 보내왔다.
신문들 역시 우리가 승리한 것처럼 ‘메달’을 계산하면서 압박감을 주었다. 그들은 마치 승리하는 것이 생사 문제인 양, 우리가 지면 나라가 면목을 잃는 것인 양 야단이었다. 사실상, 일본의 ‘마라톤’ 선수였던 ‘쓰부라야 코오키치’는 우승을 놓치고 나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자기 나라를 ‘욕되게’ 한 데 대하여 사과하는 유서를 남겼다.
그러므로 내 머리 속에서는 ‘내가 국위를 떨어뜨려서는 안된다. 내가 지면 얼굴을 들고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나는 200‘미터’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내가 우승하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흑인이라는 동일성을 들어, 흑인들 역시 압력을 가하였다. 나는 종종 다른 흑인들이 실패하였을 때 그것이 어떻게 우리 흑인들을 실추시켰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미국의 흑인들을 위하여 꼭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흑인들은 우리 흑인들 없이는 미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경기를 거부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주로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낭패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영웅이었다. 그들은 나를 후원하였다. 그들은 나를 격려해 주었다. 내가 이기면 그들도 이긴다. 내가 지면 그들도 지는 것이다. 아마 당신이 나의 배경을 좀 알게 된다면, 이러한 점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탁월하게 됨
나는 미국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시에서 11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났다. 나의 성장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별거중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매일 오랜 시간 집일을 하셨다.
나는 항상 운동을 좋아하였다. 읽고 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동네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아이가 되거나 운동을 가장 잘하는 선수가 되는 것에 뜻을 두었다. 그것이 생의 활력소가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나는 곧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3년 동안,—1959년, 1960년 및 1961년—나는 전 미국 고등학교 육상 ‘티임’의 일원이었다. 220‘야아드’ 경기가 나의 특기였다. 나는 또한 2년 동안 미식 축구와 농구에서 주 ‘티임’의 일원으로 뽑혔다.
보통 때 같으면 대학은 엄두도 못낼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학교들이 내게 교섭을 해 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미국 내의 여러 대학교들을 여행해 보았으며, 그들은 내게 선물 공세를 폈다. 결국 나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나는 주머니에 돈을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캐딜락’을 몰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운전 시험을 보지 않고도 식당에서 운전 면허를 받았다! 인근 대학교에서 나를 끌기 위해 이러한 마련을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리조나’ 주립 대학을 택하였다. 그리고 육상계에서 신속히 두각을 나타내었다. 2학년 때, 나는 220‘야아드’ 경기에서 세계 기록을 깨뜨렸다. 세계 지도자들은 나를 만나 보려고 하였고 함께 악수를 나누었다. ‘모스코바’에서는 ‘니키타 흐루시초프’를 만나 보았다. 그러나 모든 명성과 육상 경기 대회들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 내게는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리조나’ 주로 돌아 왔을 때, 나는 가장 빠른 경주자라는 이유만으로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운동 선수들이 ‘사탕 발림’이라고 부르는 선물들을 내게 퍼부어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돈과 새 옷과 차를 가지고 있었다. 이따금 나는 가족들을 돕기 위해 돈을 부쳐 주었다. 확실히 나는 선물들과 인기를 끄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보수를 받지 않는 ‘아마튜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불공평한 현실
나의 재능은 칭송을 받게 했지만, ‘토오쿄오’에 오기 꼭 한달 전, 나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모텔’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 거기 있던 여자는 내게 “우리는 너같은 자들에게는 봉사하지 않아!” 하고 소리를 쳤다. 그 때는 밤이 늦었었고, 나는 잠잘 곳이 꼭 필요했던 때였다.
그즈음 ‘미시시피’에서 세명의 민권 운동자들이 백인들에게 살해당하였다.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기를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개들이 흑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계 여행을 해 보니 불공평은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내가 미국에서 당연한 일로 여겼던 개인의 자유가 종종 매우 심각하게 제한을 받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쏠렸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는 미국 내에 있는 문제들이 단순히 인종 문제 한 가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흑인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때때로 그들은 백인들 못지 않게 동료 흑인들을 학대할 것이다. 내 상식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장래를 위태롭게 할 일에 말려 들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 당시 나로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내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였기 때문에 굶고 잠자리에 드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제도가 바라는 예의바르고 공손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웠다. 사람들은 내게 ‘만일 자네가 ‘올림픽’과 같은 큰 시합에서 이긴다면 아무 걱정이 없어질걸세. 자네가 ‘올림픽’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큰 회사들이 자네를 고용할 테니까’ 하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골치아픈 일을 피하고 ‘토오쿄오’에서 승리하기만 고대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천부적인’ 주자라고, ‘‘이세 오웬스’가 전성기를 누렸던 이후의 가장 유연한 단거리 선수’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나 자신 나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땀흘려 노력하였다. 우승자가 되는 것은 투쟁이었다. 그러나 만일 ‘올림픽’에서의 우승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일들을 내게 가져다 주기만 한다면, 그건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올림픽’ 결승시 출발 지점에 섰을 때처럼 압박감을 느껴 본 일은 내 생애 중 처음이었다.
결과
나는 제7주로 출발 지점에서 몸을 굽혔다. 나의 계획은 도는 지점에 이르기 전에 선두에 나서서 다른 선수들이 나를 쫓아오게 만들어, 그들에게 약간 더 부담을 주게 하려는 것이었다. 편한 마음으로 뛰지 못하게 되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령이 울렸다. “준비!” 그 다음, “빵” 하고 총성이 울렸다. 나는 출발이 좋았다. 도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좋아! 내가 선두다! 승리는 내 것이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드디어 결승선이 눈에 들어 왔다. 나는 두 다리를 높이 들어 힘있게 달려 갔다. 결승점이 다가왔다. 마침내 승리한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다. 만물이 정지한 것 같았다. 나는 극도의 흥분을 느꼈다. 그것은 ‘올림픽’ 신기록이었으며, 맞바람만 없었더라면 아마 내 자신이 세운 세계 기록을 깨뜨렸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시상대 맨 꼭대기에 섰으며 미국 국가가 연주될 때 나는 내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것이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시상대 위에 올라서기 전에 사람들을 괴롭혀 온 그 동일한 불공평이 아직도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일이 끝나 버리면 내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감돌았다. ‘나의 후원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나를 버릴 것인가? 나는 어떤 직업을 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행복감과 두려움과 분노를 한꺼번에 느꼈다.
나는 ‘올림픽’ 촌으로 돌아오면서 금‘메달’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가 기대하였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은전보다 약간 더 큰 것이었다. 나는 실제로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세계에서 무엇이 되었단 말인가! 그 여러 해 동안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고작 이것을 받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기뻐해야 할 때인데도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말로 낙심천만이었다.
며칠 후, 나는 1600‘미터’ 계주의 마지막 400‘미터’ 주자로 뛰었다. 우리는 ‘올림픽’ 신기록이자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여, 나는 또 하나의 금‘메달’을 탔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하여 또 다른 시합을 치른 후 집으로 돌아왔다.
현실에 부딪치다—그 결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제 시작될 나의 인생의 새로운 국면—직업을 갖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골똘히 생각하였다. 먼저, ‘올림픽’에 출전했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백악관을 예방하고 ‘존슨’ 대통령의 축하를 받았다.
나는 여러 가지 직장을 제안받고 그 중 내가 바라는 곳을 택하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오랫 동안 사람들은 내가 ‘올림픽’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승리하면 그런 일이 있을 것임을 이야기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간 대부분의 곳에서 사람들은 내가 ‘올림픽’ 승리자라는 사실에 별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하였다. 그러나 나를 고용하는 문제에 이르면, 나를 다른 흑인이나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목적에 적합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버릴 뿐이었다. 자연히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직업 미식 축구선수로 뛰는 일에 관심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육상 경기에 전념하는 2년 동안 미식 축구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는 직장을 구하는 일에 지친 나머지 “좋다”고 응락하였다. ‘뉴우요오크 자이언트’ 미식 축구단은 나의 달리는 속도라면 쓸모있다고 생각하여 나와 계약을 하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참으로 열심히 뛰었으며 ‘티임’을 이끌어 나아갔다. 3년 동안 나는 성적이 좋았으며, 한 때는 방어 주장으로도 뛰었다. 어느 ‘스포오츠’ 기자는 “‘뉴우요오크 자이언트’ 소속 ‘카아’는 그 연맹 중에서 최우수 ‘백’ 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세번째 ‘시이즌’ 중 세번의 시합을 남겨 두고 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으며, ‘트레이너’는 내게 그 해를 마치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후에 의사가 불러서 말하기를 ‘코우치’는 내가 경기를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상처의 심각성보다 더한 논쟁이 있었는데, 왜냐 하면 그 해 초에 나는 그 ‘티임’에 대한 인종 분쟁에 말려 들어 갔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 ‘시이즌’이 끝나자 나는 교체되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말썽의 발단이었으며, 상처를 입어서 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팔려간 ‘티임’에서 나는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지난 해에 27,000‘달러’를 벌긴 했지만, 그만 두기로 결심하였다.
잃은 자
나는 애를 써 보았지만, 그럴싸한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즉석 ‘햄버거’ 연쇄점에 투자를 했으나 손해를 보았다. 나는 몹씨 속이 상했다. 사람들이 나를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것을 잡지 못한 풋내기라고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내게 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인생에서 성공할 모든 기회를 상실하고 있었다. 나는 상습적인 ‘마리화나’ 흡연자가 되었으며, 어떻게 내가 다시 정상에 이를 수 있는가를 꿈꾸었다. 아내는 나를 도와 주려고 하였으나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가족(우리는 그 때 두 아이가 있었다)이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나갔다.
얼마 안있어 나는 도덕적으로 인간의 맨 밑바닥까지 타락하여, 마약 밀매업자들과 창녀들과 사귀게 되었다. 나는 도박과 ‘코카인’을 시작하였다. ‘디트로이트’의 한 빈민가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 당시 내가 거래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얼마 안있어 그들은 나를 ‘똘만이들’ 중 하나로 취급하였으며, 나에게 마약 밀매업을 시작하도록 주선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런 일을 중지하고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신이 항상 미워하였던 바로 그 일에 내 자신이 말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만사가 부정적이었다. 내게 이롭게 해 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몰랐다. 성서를 하나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읽기 시작했으나 그 뜻을 깨달을 수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가치있는 생활을 하게 됨
아내는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나를 몹시 보고싶어 하였음이 그들의 눈에 역력하였다. 나는 군(郡)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청소년 범죄자들을 다루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산 삭감으로 인하여 실직하게 되었다. 나는 자존심 때문에 다시 자포자기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의 동의를 얻어 재산을 얼마 처분하여 광고 회사를 만드는 데 돈을 투자하였다. 나의 동업자는 다재다능한 상업 미술가였으며, 나는 섭외 일을 담당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 주었으며, 그리하여 얼마 안 있어 나는 고객들을 만나러 ‘뉴우요오크’를 동분서주하였다. 사업은 잘 되어 나아갔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온 어느날, 아내는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성서를 연구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다. 아내는 말하기를 자기 반 학생(아내는 국민학교 선생이었다)의 부모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라고 하는 책을 자기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료 선생 하나도 성서에 관하여 뭐든지 알고 싶으면 ‘여호와의 증인’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최근, 우리는 여러 가지 종교에 관하여 이야기하였었다. 아들이 학령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종교 교육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는 논하지 않았었다. 나는 그들이 별난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그들과 공부하고 싶어한다면 반대할 의사는 없었다.
나는 시간에 쫓겨가며 일을 하였다. 그러나 이따금씩 아내는 자기가 배우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한 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아내와 함께 공부하는 그 여인의 남편이 나를 방문하였다.
고려해 볼 만한 일
그는, 사람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게만 된다면,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되겠는가 하고 이야기하였다. 나도 동의하였다. 그러자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세상 상태에 대해 책임이 없으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면, 누구에게 있읍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궁금하였다.
“‘사단’, 마귀이지요” 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가 성서를 펴서 내게 보여 주었을 때 나는 정말로 놀랐다. 고린도 후서 4:4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 증인은 ‘사단’이 “이 세상 신”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전세계에 퍼져 있는 극심한 불공평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을 때 참으로 이치적인 말이었다. 이 세상은 ‘사단’의 세상이며,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그 증인은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점은 그가 내게 보여 준 또 하나의 성귀를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2:31.
분명히, 인간들은 강력한 영자인 ‘사단’ 마귀를 제거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고 그 증인은 설명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다스림하에 평화스러운 땅을 창조하실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고려해 볼 만한 점이었다.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움을 받음
그 증인은 수차 다시 찾아왔으며, 나를 집에서 만나면 성서에 관하여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는 실제로 내가 배운 것들을 믿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을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바로 성서 시편 83:18에서는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알려 주고 있다. 나는 그런 점들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사단’이 이 세상 신이라고 알려 주는 점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은 더욱 그러하였다. (요한 17:14-16) 한가지 이유는, 내가 정치 운동에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디트로이트’ 시장 선거에 출마한 유력한 흑인 후보자의 선거 운동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날 그 증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댁에서 진심으로 나를 도와 주시려는 점은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새로 맡은 광고 업무에 너무나 쫓기고 있기 때문에, 오시게 해 놓고 내가 집에 없을 때가 많을 것같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되어, 나는 등이 아파서 마침내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중에 증인들은 나를 방문해 주었으며, 내게 진정한 염려를 나타내 주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 사람들은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지 않는가! 내가 ‘글랜다’의 남편이라는 점 밖에는, 그런데도 그들은 이처럼 나를 후대하다니!” 나는 그것이 좋았다.
그 동안 나는 아내가 변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증인들 중 한 사람의 어린 딸이 죽었는데, 아내는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극진한 관심을 보였다. 나는 아내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내가 전에는 이처럼 행동해 본 일이 없는데 왜 아내는 그 부인을 위해 식사를 마련해 주고 여기 저기 다니며 그 부인을 돕는 일에 이토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런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얼마 후에, 우리의 광고 사업은 매우 타격을 받았다. 우리 회사는 네 사람이 운영할 정도로 성장하였었으며, 일을 계속 운영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였다. 내가 퇴원했을 때는 사업이 엉망이 되어 모두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또 다시 나는 손해를 보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즉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으며 행복해지기를 원하였다. 나는 아내에게서 변화를 보았으며, 나 역시 그렇게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는 것은 ‘사단’이 이 제도의 신이며, 나는 ‘사단’의 영향력을 저항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 퇴원하자 나는 증인을 초대하여 그에게 성서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어떻게 변화를 받았는가?
1972년 12월, 내가 처음 연구를 시작한 후, 왕국회관에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며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내가 회관에 나온 것을 보고 아내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연사가 어떻게 남편이 가정의 머리이며, 인도를 해야 하는가 이야기한 것이 기억난다. 또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그들을 집회에 데리고 다니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는 등 그 모든 일을 해 왔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 아이들이 병이 나자, 아내는 “저, 당신이 아이들과 같이 집에 계세요. 저는 집회에 다녀 오겠어요.” 하고 말하였다. 아내는 내가 집회에 나가고 싶어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쳐다보며 “내가 인도해야 할 사람이니 당신이 아이들과 같이 집에 남구료” 하고 말하였다.
아내는 놀라서 나를 그냥 바라보았지만—기쁜 듯이 보였다. 나 역시 비로서 내가 인도를 시작하는구나 하는 긍지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후 나는 거의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우리 가족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변화를 이루도록 나를 도와 주었다.
얼마 후, 나는 항상 바라던 직업인 신문사 광고 부장직을 얻게 되었다. 나는 항상 뛰어 다녀야 하는 분주한 입장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알아 보고 나도 사람들을 알고 있었으며, 내가 발전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나는 몇 가지 부가적인 직업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나는 꾸준히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내가 집회에서 배우는 것은 실제로 내 생활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집회 참석은 참으로 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나는 마약 중독의 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그러고 나는 그 때까지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었다. 그것을 피우는 일은 아주 일반적이어서 그것이 실제로 나쁘다는 것이 내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집회에서 흡연이 비성서적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성서에서는 우리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고 알려 준다. 이것은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면 ‘마리화나’를 끊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 주었다.—고린도 후 7:1.
또 다른 집회에서, 음행이 옳지 않은 일임이 강조되었다. 성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브리 13:4) 그러므로 나는 좀더 깊이있는 변화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였으며,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그분께 기도로 나아갔다. 그 후 나는 「파수대」에서 여호와 앞에서는 항상 진실해야 할 필요성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러한 좋지 않은 것들을 즐겼으며 심지어 그러한 것을 찾아다녔지만, 이제는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한다는 점을 마음으로부터 여호와께 아뢰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되고 그분께 도움을 달라고 의지함으로써 나는 그러한 좋지 않은 습관들을 떨어 버리게 되었다. ‘마리화나’ 흡연조차도 그것을 끊는 일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정말로 행복하게 되었다. 나는 인생의 목적과 지침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인도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모두는 여호와께 그리고 우리가 함께 참석하는 집회에 감사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나와 나의 가족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들과 변화를 즐거워하였다.
우리는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모든 나의 친구들—좌절감에 빠져 문제 거리에 말려들고 부도덕에 휩쓸려 들어간—은 분명히 이에 관하여 들어 보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심지어 단 한명도 그렇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나를 “목사”라고 부르며, “여기 목사 온다” 하고 나를 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있는 이들이 진정한 나의 친구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삼고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우리 생명을 헌신하였음을 표상하기 위해, 아내와 나는 1973년 5월 20일 침례를 받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나의 가족과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좋은 관계이다. 나는 재미있고 보수가 많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관심사를 나뉘게 하였으며, 그 직업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교제와 유혹이 따랐다. 나는 다음과 같은 성귀를 머리 속에 간직하였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 (고린도 전 15:33) 그러므로 나는 오랫 동안 갈망해 오던 직업이기는 했지만, 광고 부장직을 그만두었다.
물질적으로는 더 가난해도 부한 자
회중에 있는 한 증인이 도장공 조수로 나를 고용하였다. 나는 돈은 많이 벌지 못하였지만, 행복하였다. 나는 위신을 유지하는 일에 관하여 염려하지 않았다. 나는 오직 여호와를 섬기기를 원하였다. 나는 그분이야말로 모든 불공평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진정한 인격체이심을 알고 있다. 성서의 증거—예언의 성취와 생활을 바로 잡아 주는 성서의 강력한 힘—는 내게 이 점을 확신시켜 주었다.
1973년 ‘여호와의 증인’의 거대한 대회로부터 돌아온 후, 나는 아내에게 “난 ‘파이오니아’(전 시간 전파를 하는) 봉사를 해야겠오.” 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팔 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를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나는 ‘우리는 왕국 전도인들이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우연히도 고등학교 동창인 ‘프레드쿠퍼’가 ‘조오지아’ 주에서 나를 방문하였다. 그는 그곳 회중에서 장로인데 내가 증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집을 팔고 ‘조오지아’ 주로 이사하였다.
‘파이오니아’ 봉사는 참으로 즐거운 것이었지만 나의 등의 병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하였기 때문에 1975년 5월에 결국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9월에 나는 회중에서 장로로 임명되었다. 그 후 아내와 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아왔다. 물론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하지는 않지만, 더욱 중요한 면에서 부하다.
한 예를 들면, 우리 아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성서와 성서 보조 서적들을 읽는다. 약 1년 반 전인 그가 일곱살 때, 그는 자기도 신권 학교에 등록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속으로 나는 즐거움이 솟구쳐 올랐다. 내가 그 나이 때에는 생각하는 것이 전부 ‘스포오츠’에 관한 것, ‘스포오츠’계에서 대 ‘스타아’가 되는 것 뿐이었다. 나는 ‘페이튼’이 ‘리틀 리이그’나 그와 같은 것에 가입시켜 달라고 떼를 쓸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치있는 것
나는 ‘스포오츠’ 자체는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처음부터 기만적인 점이 있다. 운동 선수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의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데도 특별한 사람인 양 우상화된다. 그리고 ‘스포오츠’에서 우수한 사람이 되도록 압력을 받는다. 사실상 그것은 사업이지 ‘스포오츠’가 아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데도 우승하라는 압력에 짓눌려 받는 해를 살펴보라.
심지어 어떤 사람이 우승자가 된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지속되거나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아’들은 조만간 바뀌게 되고 망각되어 버린다. 그런 다음, 흔히 실망과 좌절감과 육체적인 문제들이 뒤따른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우승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고 섬기는 것이 참다운 만족을 가져다 주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바로 그러한 일이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고가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마태 20:28) 그렇다. 가정과 회중 내에서 이러한 비이기심과 사랑의 정신이 가져오는 따뜻한 연합은 인생을 참으로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으로서, 우승하려는 경쟁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기고.
[347면 삽화]
“나는 또 하나의 금‘메달’을 탔다”
[348면 삽화]
“‘뉴우요오크 자이언트’ 팀은 나와 계약을 맺었다”
[350면 삽화]
‘나는 가족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