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진리를 정기적으로 섭취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또한 영적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도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문자적 떡을 정기적으로 먹는 것처럼 영적 양식도 정기적으로 섭취해야 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이치적인가? 확실히 그러하다. (마태 4:4) 이러한 영적 양식에는 성서만이 아니라 성서를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와 주는 인쇄물도 포함된다. 바로 그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 및 관리 대행 기관인 ‘워치 타워 협회’는 성서 인쇄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그와 아울러 성서 보조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발행하여 독자들이 성서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이런 출판물들에는 때때로 동일한 주제가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때가 있는 까닭에, 이 출판물들을 정기적으로 읽는 일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어 온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빵이나 감자나 밥을 정기적으로 먹고 있지 않은가? 또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이런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받은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있을 터이지만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그것들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II 베드로 1:12, 공동번역) 또한 어떤 주제가 한번 이상 다루어지는 경우 거기에는 종종 새로운 각도, 새로운 견해, 부가적 통찰력, 보다 충분하고 효과적인 설명이 들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잠언 4:18의 이러한 말과 같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느니라.]”
양심을 더 잘 이해하게 됨
특정한 예로서 양심 문제를 고려해 보자. 1972년 12월에 「파수대」는 “증거하는 자”로서 사람의 양심이 하는 역할에 관한 여러 기사를 발행하였다. 이 기사들은 우리의 양심이 타고난 증인으로서, 우리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증언하며,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문법이나 법전을 주시기 전에도 작용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 기사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과 직업 문제에 있어서 양심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지적하였다. 이전에는 이런 문제들이 결코 그렇게 명쾌히 밝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1975년 7월에 양심에 관한 기사가 두개 더 실렸다. 이 기사가 지적한 여러 점들 중에는 양심이 두 가지의 기본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 있었다. 한 가지는 사법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이 있은 후에” 양심이 수행하는 역할로서 우리가 어떤 면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를 유죄로 판결하는 경우이다. (사무엘 하 24:10)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양심이 입법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기능을 좀더 자주 발휘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양심이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법을 제정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성서의 법과 원칙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강한 양심은 그에게 안내자 노릇을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양심이 그에게 미리 어떤 행로가 잘못이라는 것을 법으로 정해 주는 것과 같다. 이 점에 있어 잘 알려진 성서의 예로 야곱의 아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끈덕진 요구를 거절한 본이 있다.—창세 39:9.
그러다가 더 후에 「파수대」(1976년 12월 1일호)는 “더욱 유익하게 작용하도록 우리의 양심을 훈련시킴”이라는 제목으로 양심에 관한 부가적인 기사를 또 실었다. 일반적으로 양심 문제들을 고려할 때 문제는 어떤 일이 선한지 또는 악한지, 옳은지 또는 그른지를 결정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성서가 선한 양심을 믿음과 사랑에 연관시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디모데 전 1:5) 그렇다. 양심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못하게 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기회를 이용하여 비이기적이고 고상하며 친절하고 사랑에 찬 일들을 하게 하는 역할도 하여야 한다.—누가 10:29-37 비교.
그러므로 「파수대」에 나오는 기사가 이전에 토론된 제목을 다루는 경우 그것이 단순한 반복이라고 의례히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때때로 다듬어진 점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들은 모두 성서 진리를 더욱 아름답고, 더욱 의미 깊으며, 그렇다. 더욱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 주는 무엇인가를 부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켈란젤로에 관한 일화 한 가지를 생각나게 해준다. 한 친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해 놓은 아름다운 조상(彫像)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 후 다시 온 그 친구는 미켈란젤로가 아직도 그 동일한 조상과 씨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이 그동안 개선시켜 놓은 점들을 모두 지적하자 그 친구는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네’하고 대답했다.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그것은 사실이네. 그러나 사소한 것들이 완전하게 해주며, 완전한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닐세!’ 그러므로 많은 경우 이해 면에 있어 다듬어진 점이 그리 대단치 않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그 제목에 대해 우리가 더욱 완전한 또는 온전한 이해에 더욱더 다가가는 데 참으로 도움이 된다.
싸울 준비를 함
그것만이 아니다. 성서와 성서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출판물들은 단순히 머리에 담기는 지식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다.’ (시 119:105)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디모데 후 3:16, 17)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그것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만큼만 이런 목적을 이루게 해줄 수 있다. 만일 읽은 것을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교훈이 우리에게 계속 생각나게 해주는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하는 세 종류의 적을 고려해 볼 때 극히 중요하다. 그 중에는 우선 세상이 있다.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가 됨을 의미한다. (야고보 4:4) 우리가 세상과 싸우는 것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 1서 5:4) 믿음은 지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오랫동안 망각 속에 묻혀져 있는 정보가 아니라 쉽사리 생각해 낼 수 있는 지식이어야 한다. 세상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거센 압력을 가하기 때문에, 세상이나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사실이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줄 필요가 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할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서 2:15-17.
마귀와 그의 악귀들 또한 우리의 적이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느니라.]” (베드로 전 5:8) 마귀와 그의 악귀들은 우리와 싸움을 벌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6:11-17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온전한 영적 갑옷을 입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갑옷을 입고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는 데 달려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잘 휘두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말씀이 우리 정신과 마음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세번째 적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의 타고난, 유전받은 죄짓는 경향이며, 그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계속해서 투쟁을 하여야 한다. 우리의 어머니가 ‘죄 중에 우리를 잉태하였고 죄악 중에 낳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우리의 성향은 악하다. (창세 8:21; 시 51:5) 사실이 이러하므로 우리 모두는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탄식한 사도 바울처럼 탄식하게 될 수 있다. (로마 7:19) 이러한 경향을 유전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 비뚤어졌으며 거짓되며 속이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도움으로, 그리고 성서 원칙들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도와 주는 성서 보조 서적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내부에 있는 이 적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몸을 쳐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잠언 3:32; 예레미야 17:9; 고린도 전 9:27.
이 일을 위한 시간은 어떤가?
그리스도인 생활은 충만한 생활이다. 성서와 더불어 매주 새 잡지를 읽고,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며, 기꺼이 듣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웅대한 일에 참여한다. 또한 우리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 위해 매일 해야 하는 세속적 책임들이 있다. 각자는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세속 정기 간행물이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데 시간을 얼마나 쓰고 있는가? 나는 텔레비젼 시청이나 대중 음악을 듣는 데 시간을 얼마나 바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은 일종의 오락과 기분 전환으로 여기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집회를 위해 준비하는 일과 그리스도인 인쇄물들을 읽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같이 준비하고 읽는 일을 그런 식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 119:162)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생활 행로를 통하여 참으로 자신이 육적인 사람이 아닌 영적인 사람으로 판명되고 있는지 주의깊이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린도 전 2:14-16.
이 모든 것은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관해 하신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마태 5:3, 신세) 지상의 하등 동물—새, 곤충, 포유동물, 물고기 등등—들은 영적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이 영적 필요를 소홀히 여긴 것이 오늘날 세상의 슬픈 혼란상의 큰 원인이 되었다. 물질주의적인 철학 및 이념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아주 멀리 떠나 버리게 했다. 그들의 육적 필요—의식주—및 성 그리고 쾌락 또는 권력욕 등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최고로 중요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참으로 영적 필요를 의식한다면, 우리는 정기적으로 성서 진리를 섭취할 것이며, 그렇게 할 시간을 찾으려 할 것이고, 그 진리를 온전히 인식할 것이다. 보상이 무엇인가? 우리는 경건한 행로를 추구하도록 도움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행로야말로 “모든 면에 유익하고 지금의 생명뿐만 아니라 장차 얻을 생명까지도 약속해” 주는 행로인 것이다.—디모데 전 4:8,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