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김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 상 2:30.
1. 우리가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기를 원할 만한 어떤 이유가 있읍니까? (디모데 전 1:17; 계시 4:11)
성서에 근거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전망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희망의 하나님,” 곧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전적으로 적절하고도 이치적인 일입니다. (로마 15:13, 제임스 왕역; 신세계역)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소하고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온 우주의 위대한 창조주를 존중히 여길 수 있읍니까? 그리고 그분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실 것입니까?
2.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읍니까?
2 우리는 예수와 관련하여 있었던 일들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가 공경 즉 존중히 여김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요한 5:23; 12:28; 15:8) 사실상, 예수께서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은 그분에게서 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난하셨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존경 즉 존중히 여기지 않은 일이 부당한 동기 및 행위와 관련이 있었음에 유의하십시오. (마태 15:7-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신 일에 그분의 희망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존중히 여김을 받으신 일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읍니까?
3. 예수께서 여호와를 바라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3 예수께서는 시편 16:10에 나오는 이러한 다윗의 말을 명심하셨읍니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니이다.]” 부활되리라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옆에 달려 있는 행악자에게 다음과 같은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읍니다. “참으로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말하는데,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누가 23:39-43, 신세) 그 행악자는 곧 이어 죽었으므로, 일으킴을 받으리라는 예수의 희망이 분명히 실현된 사실을 사흘 후에 목격할 수는 없었읍니다. 그러나 한 목격 증인은 이렇게 보고하였읍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도 2:31, 32)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읍니다.
4. 예수께서는 무슨 존경을 받기에 마땅한 분입니까? (계시 5:12)
4 예수의 섬김을 받았던 많은 평민들은 그분이 존경, 즉 존중히 여김을 받아 마땅한 분임을 알았읍니다. (누가 4:15; 19:36-38; 베드로 후 1:17, 18) 그후에 그분은 범죄자처럼 죽으셨읍니다. 그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읍니까? 그렇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랐던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셨읍니다. “희망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생명으로 일으키시어 영계에서의 불멸성으로 옷 입히신 사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을 계속 존중히 여기고 계시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브리 2:7, 9; 빌립보 2:9-11.
5.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예수께서는 존중히 여김을 받으셨으며, 그로 인해 어떤 부가적인 영예가 하나님께 돌아가게 되었읍니까?
5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셨던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한 가지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존중히 여기신 일을 언급하셨읍니다. 한번은 충실한 사도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18-20)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독특한 권세를 주심으로 아들을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부가적으로 나타내셨읍니다. 이 권세는, 예수께서 존중히 여기고자 하는 분에게 영예가 돌아가는 일을 할 인간들을 위해 사용될 것이었읍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인가 아버지를 존중히 여기며 또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분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김
6.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어하는 열망이 온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읍니까? (누가 14:10)
6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존중히 여김을 받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좋은 평판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존중히 여김을 받으므로, 그 말도 어느 정도는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 전 3:2, 13; 5:17; 사도 28:10) 그러나, 인간들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에 쉽사리 과장될 수 있읍니다. 무슨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명성을 추구하거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볼 때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7. 사람들에게서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 매우 제한된 가치만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사람들로부터 최대 한도로 존중히 여김을 받는 일도 덧없는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 곧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몇 영웅들이 잠시 기억 속에 남아 존중히 여김을 받을지 모르지만,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잊혀집니다. 증조부나 증조모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100년 전의 자기 나라의 지도자들이 누구였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읍니까? 사실상, 어떤 사람이 살았거나 살지 않았거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시간이라는 저울 위에 놓여 있는 미세한 먼지 조각, 수많은 생명의 흐름 속의 한 작은 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 그 사람이 사후에 잠시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욥 14:21; 역대 하 32:33; 전도 9:5; 시 49:12, 20) 차이가 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희망을 가지고 그분을 존중히 여기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두명의 동시대 인물의 생활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읍니다.
8. 존중히 여김을 나타내는 일과 관련하여 엘리는 무슨 함정에 빠졌읍니까?
8 그 한 사람은 엘리였읍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라는 독특한 직분으로 40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으며, 또한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특권도 받았읍니다. (사무엘 상 1:3, 9; 4: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엘리는 자기 아들 홉니 및 비느하스와 관련하여 우유 부단한 태도를 보였읍니다. 제사장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들은 자신들의 직책을 남용하여 희생 제물의 일부를 도적질하고 부도덕한 성관계를 가졌읍니다. 그들의 아버지 엘리가 아들들을 가볍게 비난하는 것으로 그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가 ‘자기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선언하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론계의 제사직이 계속될 것은 약속하셨지만, 엘리의 집이 대제사장의 직분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읍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 상 2:12-17, 29-36; 3:12-14.
9. 사무엘에게 여호와를 존중히 여김을 나타낼 수 있는 어떤 기회가 주어졌읍니까?
9 그와 대조를 이루는 사람으로 사무엘이 있었읍니다. 실로에 있는 장막에서 봉사하도록 그의 부모가 어린 나이 때 그를 데려왔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루는 밤에 여호와께서 그 아이에게 이야기하셨읍니다. 사무엘 상 3:1-14에 있는 이 기록을 읽어 보면서, 이 소년이 우뢰 같은 굉음이 아니라, 연로한 엘리의 목소리라고 잘못 생각한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읍니까? 그 다음 연로한 대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에 벌을 내리기로 결정하신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어린 사무엘에게 틀림없이 얼마나 겁이 나는 일이었겠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사무엘은 그 일을 해냈으며,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김을 나타냈읍니다.—사무엘 상 3:18, 19.
10. 사무엘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10 사무엘은 예언자의 신분으로 여러 해 동안 여호와를 존중히 여겼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를 존중히 여기셨읍니다. 사무엘 상 7:7-13에 나오는 그 점을 알려 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여호와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사무엘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어 블레셋 사람들을 패배시키셨읍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일은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버리셨던 것처럼 사무엘을 버리지는 않으셨읍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필경 사무엘이 자신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점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일로서, 사무엘은 인간 왕을 구하는 백성의 요구를 나쁘게 보았읍니다. (사무엘 상 8:6, 7)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사용하시어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읍니다. 사무엘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은 애도로써 그를 존중히 여김을 나타냈읍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성서에 나오는 부활 및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좋은 것들로 축복받을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사무엘을 언급하심으로써 그를 존중히 여김을 나타내셨읍니다. (시 99:6; 예레미야 15:1; 히브리 11:6, 16, 32, 39, 40) 이러한 사실은 “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이 큰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것인가?
11, 12.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일에 관해 어떤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11 성서에 나오는 단 두 가지 예에 불과한 예수와 사무엘의 예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점은, 인간이 그들의 “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을 인생에서 최우선 순위에 둘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두 경우는,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적절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받기를 구하고 또 받을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에 의해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성서에 근거한 희망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합리적인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읍니까?
12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이 가득한 두려움을 갖는 것이 한 가지 방법입니다. (말라기 1:6) 우리는 그러한 말에 선뜻 동의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을 기억하십시오. 엘리의 아들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을 존중히 여기기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질문받았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을 존중히 여기려는 우리의 열망을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13.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을 존중히 여기려는 열망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3 만일 우리가 폭넓은 지식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도적질이나 성적으로 좋지 않은 어떤 행실에 빠질 수 있는 유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려고 하는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줄 것입니까? 우리는 ‘설사 범죄 행위가 은폐된다 할지라도, 내가 그러한 죄에 굴복한 일 자체가 내가 그 이름을 지니고 있는 “희망의 하나님”께 불명예 즉 존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된다’는 생각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사실은, 엘리의 아들들이 저지른 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범죄 행위가 영구적으로 은폐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관한 바울의 이러한 말로 실증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로마 2:5-8.
14.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는 다른 어떤 방법이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자문해 볼 수 있읍니까?
14 한편, 바울은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이며 그 결과 그분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된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종류의 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께서 마태 복음 28:19, 20에서 언급하신 이러한 일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신세 참조) 세계 전역에서, 수백만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는 이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 시간 봉사자가 되어,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든 휴가나 방학 중에 하는 것이든 파이오니아로서 힘써 노력하기까지 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 각자는 이 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것이 유익할 수 있읍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전파 사업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는가?’
15. 공개적인 봉사의 직무를 통해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일과 관련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추리하는 일이 있었읍니까?
15 여러 해 동안 활동적인 전파자로 일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점차 침체되는 일이 있었읍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자를 삼는 이 중요한 일에 적은 양을 바치거나 이따금 참여하는 식의 생활에 안주하였읍니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거나 노령으로 인해 활동이 둔해진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과는 전혀 무관하게, 여러 연령층의 특정한 증인들 가운데서 침체되는 일을 볼 수 있읍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피곤해지는 일’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면서 특정 연령층을 언급하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그 사람의 나이에 상관 없이 봉사의 직무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려면 노력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에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렇게 추리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내 몫을 해냈다. 그러니 이제는 새로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이 활동적으로 일할 때이다.’—갈라디아 6:9; 히브리 12:3.
16. 이 점에 대해 자기 검토를 해보는 것이 왜 유익할 수 있읍니까?
16 이런 식의 추리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분명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의 경우에 조금이라도 그런 경향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가? 요즘 내가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양은 과거의 양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침체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든 있지 않았든, 우리 모두는 “희망의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을 약속하신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 2:10; 사체로는 본지에서.) 바울은 이 귀절에서 “어떤 일을 위해 노력하다, 산출하다, 수행하다”를 의미하는 희랍어를 사용하였읍니다. 단지 입술로 하는 봉사로 하나님을 존경 즉 존중히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빠졌던 함정을 피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마가 7:6; 계시 2:10)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공개적인 봉사의 직무에 활동적으로 참여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수여자이신 분을 존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로서, 지금부터 무한히 그러한 사람들로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누가 10:1, 2, 17-20.
우리의 재물로
17, 18. 우리가 여호와를 공경 즉 존중히 여길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무엇이며,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왜 정당하지 못합니까?
17 우리가 “희망의 하나님”을 공경 즉 존중히 여길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방법에 대해 잠언 3:9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스퍼렐은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너의 부와 더 많아진 너의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구약 성경 히브리어 원어 역본」(A Translation of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from the Original Hebrew).
18 여러 종교 교직자들이 끝없는 탐욕과 호화로운 생활 방식으로 악명을 떨쳐 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목표가 단지 부를 늘리려는 것으로 보이는 교회나 종교 조직에 기부하기를 주저합니다. (계시 18:4-8) 그러나 그처럼 오용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 잠언 3:9의 정당성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영감받은 교훈과 일치하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재물”을 사용하여 우리의 “희망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공경”할 수 있읍니까?
19. 일부 사람들은 잠언 3:9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9 여호와의 증인은 왕국 소식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왕국회관을 증축하거나 새로운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이 필요함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재물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 역시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남녀 노소가 이 일에 참여해 왔으며, 건축 기금에 쓰도록 헌금하기로 개인적으로 결심하는 일과 같은 일을 통해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처럼 남 모르게 한 결심에 고착하기 위해, 자기 징계나 심지어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특히 건축 공사의 계획과 완공이 장기간에 걸친 일일 경우에 그러합니다. (고린도 후 9:6, 7)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돈을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여호와를 공경 즉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왕국회관은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장소이며 그들이 동료들과 함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6:3, 4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사람들을 존중히 여길 것임을 확신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20. (ㄱ) 잠언 3:9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는 어떤 자문들을 해볼 수 있읍니까?
20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할 점이 있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자신들의 부로부터 제일 먼저 유익을 얻어야 할 사람이라고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 복음 15:4-8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의 재물로 여호와를 공경’하는 일에 대해 자기 반성을 해볼 것을 권합니다. (예레미야 17:9, 10) 예를 들어, 사업을 하여 다소 부유해진 어떤 그리스도인은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계속 전 시간 일을 하는 것을 정당화할지 모릅니다. 그는 이렇게 추리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거나 전파자들이 특히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이사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특별한 방법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넉넉하게 기부하는 것이다.’ 그의 헌금이 크게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문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생활 방식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돈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나의 첫째 가는 동기임을 반영하는가?’ (누가 12:16-19; 비교 마가 12:41-44.) 그리고 이렇게도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인 좋은 소식 선포에 개인적으로 더 많이 참여하기 위해 나의 일을 조절할 수 있는가?’ 사실 우리의 생활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우리의 동기와 행동을 검토하면서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읍니다. ‘나는 나의 생명의 수여자이신 “희망의 하나님”을 어떻게 더 온전히 공경할 수 있는가?’
21.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공경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전망이 있읍니까?
21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충실한 이스라엘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리라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전망입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느니라.]” (이사야 43:4) 이 말씀을 하신 바로 그분이 ‘영광과 존귀를 구하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그분은 참으며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십니다. 참으로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대답하겠읍니까?
◻ 사람이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는 일에 대해, 예수의 본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읍니까?
◻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과 관련하여 엘리와 사무엘은 어떻게 달랐읍니까?
◻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을 더욱 늘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에 대한 응답으로 무엇을 받을 수 있읍니까?
◻ 우리의 “희망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일을 첫째 자리에 두는 사람들 앞에는 어떤 장래가 있읍니까?
[20면 네모]
헌금하면서 보낸 편지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이 받은 편지들 가운데서 발췌한 일부 내용을 아래에 싣는다.
“제 이름은 아비자입니다. 나이는 아홉살이고요. 왕국회관에서 일하는 형제들을 위해 4달러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 돈을 목재를 사는 데 쓰든 막대 사탕을 사는 데 쓰든, 상관하지 않겠어요.”—오리건 주.
‘나의 개인 수표가 들어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96세가 넘었으며 귀가 매우 어둡지만, 헌금하기 위해 돈을 저축하기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뿐 아니라, 나는 중고차를 몰고 있으며 또 플로리다 주나 캘리포니아 주에서 겨울을 보내지 않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리는 방법으로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읍니다. 그러나 돈을 저축하여 얼마를 보냄으로써,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오하이오 주.
‘왕국회관을 위해 여러분이 한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 돈[5달러]은 우리가 읽을 수 있도록 서적과 「파수대」를 만드는 여러분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내 돼지 저금통에서 꺼낸 돈입니다. 마약에 대해 알려 주신 「학교」 팜플렛(영문)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수표가 들어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중 200달러는 왕국회관 건축 기금을 위한 것입니다. 나머지는 전파 활동 증진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어디에나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미주리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