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연구 노트—1장
요한: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셨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를 의미하는 여호하난 또는 요하난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복음서에는 필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기원 2세기와 3세기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도 요한이 이 책의 필자라고 생각했다. 이 복음서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이 언급될 경우 요 1:42; 21:15-17을 제외하고는 모두 침례자 요한을 가리킨다. 그 구절들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을 언급하셨다. (요 1:42; 21:15 연구 노트 참조) 이 책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세베대의 아들들”로 언급된다. (요 21:2; 마 4:21; 막 1:19; 눅 5:10. 요 1:6 연구 노트 참조) 이 복음서의 끝부분에서 필자는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언급하는데 (요 21:20-24) 여러 가지 사실을 볼 때 이 표현이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 13:23 연구 노트 참조.
요한복음: 복음서 필자 중 아무도 자신들의 기록에 이러한 제목을 붙여 자신이 필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복음서 원문에는 제목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요한복음의 사본 중에는 제목이 유앙겔리온 카타 이오안넨(“요한에 의한 좋은 소식[또는 “복음”]”)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짧은 형태인 카타 이오안넨(“요한에 의한”)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제목들이 어느 시점에 붙여졌는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시기를 기원 2세기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긴 형태의 제목이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에 만들어진 복음서 사본들에 나오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처음에 나오는 말(“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의 시작”) 때문에 “복음”(“좋은 소식”)이라는 단어가 사복음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필자의 이름을 넣은 이러한 제목들을 사용한 것은 이 책들을 쉽게 구분하여 부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시초: 이 문맥에서 “시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르케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며 시작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시 90:2) 따라서 여기서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신 때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의 첫 창조물은 ‘말씀’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말씀’은 하늘에 계실 때의 예수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요 1:14-17) 따라서 예수를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처음 난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골 1:15) 그분은 “하느님의 첫 창조물”이셨으므로 (계 3:14) 다른 영적 피조물들과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존재하셨다. 사실, 예수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이 하늘과 땅에 창조되었다.’—골 1:16. 그리스어 아르케가 사용된 다른 예들을 보려면 요 6:64 연구 노트 참조.
‘말씀’: 또는 “로고스”. 그리스어 호 로고스. 여기서 이 단어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요 1:14과 계 19:13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요한은 이 칭호를 가진 분이 예수임을 밝혔다. 이 칭호는 예수께서 인간이 되기 전 영적 피조물로 존재하셨을 때, 땅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봉사하셨을 때,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도 그분에게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 즉 ‘대변자’로서, 창조주의 다른 천사 아들들과 인간들에게 정보와 지시를 전하는 역할을 하셨다. 따라서 예수께서 땅에 오시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인간과 의사소통하실 때 많은 경우 이 ‘말씀’ 즉 천사 대변자를 사용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이치적이다.—창 16:7-11; 22:11; 31:11; 출 3:2-5; 삿 2:1-4; 6:11, 12; 13:3.
하느님과 함께: 직역하면 “하느님을 향해”. 이 문맥에서 “함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치사 프로스는 두 대상이 가까이에 있고 친밀한 관계라는 점을 암시한다. 또한 이 전치사는 두 대상이 별개의 인격체임을 보여 주며, 따라서 ‘말씀’이 유일하신 참하느님과 별개의 인격체임을 알 수 있다.
‘말씀’은 신이셨다: 또는 “‘말씀’은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말씀’은 신 같은 분이었다”. 요한의 이 말은 ‘말씀’(그리스어 호 로고스.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즉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이나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말씀’은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는 데 사용하신 맏아들로서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계시므로, ‘말씀’을 “신; 신 같은 분; 신성을 지닌 분; 신격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합당하다. 많은 번역자들은 그분을 전능한 하느님과 동일시하여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몇 가지 점을 고려해 보면, 요한이 ‘말씀’과 전능한 하느님이 동일한 분이라는 의미로 그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먼저, 이 구절의 앞부분과 다음 구절은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분명히 언급한다. 또한, 1절과 2절에는 그리스어 테오스가 세 번 나오는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그리스어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었지만 두 번째는 정관사 없이 쓰였다.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테오스에 정관사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맥에서 정관사와 함께 사용된 테오스는 전능한 하느님을 가리킨다. 반면에 문법 구조를 볼 때 여기서 정관사 없이 사용된 테오스는 성질을 묘사하는 것으로, ‘말씀’이 지닌 특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여러 성경 번역판들은 이 표현을 번역할 때 「신세계역」과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여 ‘말씀’이 “신이셨다; 신성을 지니고 계셨다; 신격을 가진 존재였다; 신 같은 분이었다”와 같이 번역한다.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콥트어 방언인 사히디어와 보하이르어로 번역한 고대 역본들을 들 수 있다. 기원 3,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역본들은 요 1:1에 나오는 첫 번째 테오스와 두 번째 테오스를 각각 다르게 번역했다. 그러한 번역 표현은 ‘말씀’이 가진 특성, 즉 그가 하느님과 유사한 본성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말씀’을 그의 아버지인 전능한 하느님과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이 구절과 일치하게, 골 2:9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의 특성의 모든 충만함”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벧후 1:4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들도 “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으로, 「칠십인역」에서는 그리스어 테오스가 히브리어 엘이나 엘로힘을 번역할 때 주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엘과 엘로힘은 “하느님” 또는 “신”으로 번역되며, 기본적으로 “위력 있는 자; 강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히브리어 단어들은 전능한 하느님을 가리킬 때만 아니라 다른 신들과 인간들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요 10:34 연구 노트 참조) ‘말씀’을 “신” 즉 “위력 있는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 9:6의 예언과 조화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언에서는 메시아가 (“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위력 있는 신”으로 불릴 것이며, 자신의 백성 모두에게 “영원한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의 아버지인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룰 것이다.—사 9:7.
그분: ‘말씀’ 즉 로고스를 가리킨다.—요 1:1 연구 노트 참조.
그분에 의해 생명이 생겨났으며: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3절과 4절에 문장 부호가 나오지 않는다. 「신세계역」은 웨스트콧과 호트, 네스틀레와 알란트, 세계 성서 공회 연합회가 발행한 그리스어 본문과 일치하게 문장을 구분하여, 3절의 끝부분과 4절을 연결했다. 이러한 번역 표현은 생명과 빛이 ‘말씀’에 의해 생겨났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골 1:15, 16) 일부 번역판들은 그리스어 본문을 다르게 이해하여, 3절의 끝부분을 동일한 구절의 앞부분과 연결시킨다. 그럴 경우 3절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며, 생겨난 것 중에 그분 없이 생긴 것은 하나도 없다”와 같이 번역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신세계역」의 번역 방식을 지지한다.
생명 ··· 빛: 이 두 가지 주제가 요한의 영감받은 기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말씀’ 즉 예수에 의해 다른 모든 생명이 “생겨나게” 하셨다. (요 1:3) 그런 의미에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있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해, 죽어 가는 죄 많은 인류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요 1:9에는 ‘말씀’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비추는 참빛”으로 언급되어 있다. “세상의 빛”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가지게” 된다. (요 8:12) ‘말씀’은 인류에게 생명을 얻는 길을 밝혀 주는 “생명의 수석 대표자”이다.—행 3:15.
하느님의 대표자로 보냄을 받은: 또는 “하느님께 임명을 받은”. 침례자 요한은 하느님께 임명을 받았으며 (눅 3:2) 그 임명에는 전파자 즉 공식 사자로서 활동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요한은 자신에게 오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오실 것이며 하느님의 왕국이 다가왔다고 선포했다. 또한 그들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권했다. (마 3:1-3, 11, 12; 막 1:1-4; 눅 3:7-9) 침례자 요한은 예언자와 복음 전파자로 활동했다. 그는 가르치는 일도 했으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눅 1:76, 77; 3:18; 11:1; 요 1:35.
요한: 침례자 요한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쓴 복음서에서 침례자 요한을 19번 언급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 필자들과는 달리 “침례자”라는 칭호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 3:1; 막 1:4 연구 노트 참조) 사도 요한은 3명의 마리아를 언급할 때 그들을 구별시켜 주는 표현을 사용했다. (요 11:1, 2; 19:25; 20:1) 하지만 침례자 요한을 언급할 때는 그처럼 구별시켜 주는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사도 요한은 이 복음서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요한이라는 이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이 복음서에 나오는 요한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오해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복음서의 필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이다.—“요한복음 소개” 및 요한복음 책명 연구 노트 참조.
증인으로: 또는 “증언하러”. 요한복음에는 “증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마르티리아)가 다른 세 복음서에 나오는 횟수를 합한 것보다 두 배 이상 나온다. 증언하여로 번역된 이 단어의 동사형(마르티레오)은 요한복음에 39번 나온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 전체에 이 동사가 2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대조가 된다. (마 23:31; 눅 4:22) 이 그리스어 동사가 침례자 요한과 관련하여 매우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그를 “증인 요한”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 1:8, 15, 32, 34; 3:26; 5:33. 요 1:19 연구 노트 참조) 요한복음에서 이 동사는 예수께서 수행하신 봉사와 관련해서도 많이 사용된다. 그분이 ‘증언하셨다’(또는 ‘증거하셨다’)는 표현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요 8:14, 17, 18)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신 이러한 말씀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나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요 18:37) 요한 계시록에서는 예수를 “충실한 증인”, “충실하고 참된 증인”으로 언급한다.—계 1:5; 3:14.
자신: 침례자 요한을 가리킨다.—행 19:4 비교.
세상: 여기서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 세상에 오다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침례를 받아 인류 가운데로 오신 것을 주로 가리키는 것 같다. 그분은 침례를 받으신 뒤에, 자신에게 맡겨진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인류 전체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셨다.—요 3:17, 19; 6:14; 9:39; 10:36; 11:27; 12:46; 요1 4:9 비교.
세상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는데도: 여기서 그리스어 코스모스(“세상”)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이 구절의 뒷부분에서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다. 세속 문헌에서 이 그리스어는 우주와 창조물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연설할 때 그러한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행 17:24) 하지만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인류 전체나 그 일부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비롯해 모든 것을 만드는 데 참여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인류가 생겨나는 데 있어서 예수께서 하신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창 1:26; 요 1:3; 골 1:15-17.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예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전히 인간이셨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보면 그분이 육체가 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즉 “육체”]입니다.” (요 6:51) 또한 예수께서는 온전히 인간이셨기 때문에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이 겪는 일을 경험하실 수 있었고, 그리하여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다. (히 4:15) 예수께서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이실 수 없었다. 그분이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어지셨다”고 성경에서 알려 주기 때문이다. (히 2:9; 시 8:4, 5. 이 구절에 나오는 육체에 대한 연구 노트 참조) 하지만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노시스파(영지주의자들)가 있다. 그들은 지식(그리스어 그노시스)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배교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그리스 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와 결합시켰다. 그들은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기원 1세기 말에는 그노시스주의의 초기 형태가 널리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일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이 쓴 편지들에서 예수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정하는 거짓 가르침에 대해 경고한다.—요1 4:2, 3; 요2 7.
육체: 또는 “사람”. 여기서 그리스어 사르크스는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 즉 육체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셨을 때 과거에 천사들이 한 것처럼 단지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더는 영이 아니셨다. (창 18:1-3; 19:1; 수 5:13-15) 따라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실 수 있었다.—요 1:51; 3:14. 마 8:20 연구 노트 참조.
사셨다: 직역하면 “천막을 치셨다”. 그리스어 스케노오. 일부 사람들은 ‘말씀’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즉 천막을 치셨다’는 표현이 예수께서 실제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베드로가 스케노오의 명사형을 사용한 방식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임시로 사는 거처에 비할 때 스케노오의 명사형(“장막” 또는 “천막”)을 사용했다. (벧후 1:13; 각주)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고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부활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현재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벧후 1:13-15. 또한 고전 15:35-38, 42-44; 요1 3:2 참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께서 땅에서 살면서 봉사하시는 동안, 요한과 다른 사도들은 여호와의 특성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사람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영광 즉 찬란함이나 탁월함을 보았다. 그에 더해 사도 요한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변형 환상을 목격했다. (마 17:1-9; 막 9:1-9; 눅 9:28-36) 따라서 요한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하느님의 특성뿐만 아니라 60여 년 전에 있었던 변형 환상도 염두에 두고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을 수 있다. 변형 환상은 사도 베드로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그는 요한복음이 기록되기 약 30년 전에 편지를 쓰면서, 변형 환상이 “예언의 말씀”을 놀랍게 확증해 준다고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벧후 1:17-19.
외아들: 직역하면 “독생자”. 그리스어 모노게네스는 “독생(한)”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그 종류에서 하나뿐인; 유일한”으로 정의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눅 7:12; 8:42; 9:38 연구 노트 참조) 사도 요한의 기록에서 이 단어는 예수에게만 사용된다. (요 3:16, 18; 요1 4:9) 요한은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인간으로 존재한 일을 언급할 때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 이전의 예수를 묘사할 때만 이 단어를 사용한다. 그분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계셨고 “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로고스 즉 ‘말씀’이셨다. (요 1:1, 2; 17:5, 24) 예수는 여호와의 맏아들이고 그분이 직접 창조하신 유일한 분이므로 “독생자”이시다. 다른 영적 피조물들도 “참하느님의 아들들”이나 “하느님의 아들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창 6:2, 4; 욥 1:6; 2:1; 38:4-7) 그 아들들은 모두 맏아들을 통해 창조되었다. (골 1:15, 16) 요약해 보면, 모노게네스는 예수께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비할 데 없는” 분이라는 의미와 그분이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유일한 아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요1 5:18. 히 11:17 연구 노트 참조.
하느님의 은혜: 또는 “과분한 친절”. 그리스어 카리스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150회 이상 나오며,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전달한다. 카리스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과분한 친절을 가리킬 때는, 그분이 무엇인가를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시는 관대한 선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받을 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받을 자격도 없는 대상에게 하느님께서 관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베푸시는 풍성한 선물, 관대한 사랑과 친절을 가리킨다. (롬 4:4; 11:6) 하지만 이 단어가 언제나, 친절을 받는 대상이 자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이 은혜 즉 친절을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이 단어가 이 구절에서처럼 “하느님의 은혜”로 번역되거나 “호의”로 번역되었다. (눅 2:40, 52) 다른 문맥에서 이 그리스어 단어는 “은혜”, “호의”, “고마운 선물”로 번역되었다.—눅 1:30; 행 2:47; 7:46; 고전 16:3; 고후 8:19, 각주.
하느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다: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으셨으며 언제나 진실하셨다. 하지만 문맥을 볼 때 예수께서 “하느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다”는 표현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와께서 아들을 특별히 선택하여 아버지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를 온전히 설명하고 보여 주게 하셨다는 것이다. (요 1:16, 17)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가 예수를 통해 온전히 밝혀졌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도 본 것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과 진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 친절과 진리가 전달되는 통로였다.
내 뒤에 오시는 분: 침례자 요한은 예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으며 예수보다 먼저 봉사를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요한보다 “뒤에” 즉 나중에 오시는 분이었다. (눅 1:24, 26; 3:1-20) 하지만 예수께서는 요한보다 훨씬 더 큰 일들을 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모든 면으로 요한보다 앞선 분 즉 그보다 뛰어난 분이었다. 또한 침례자 요한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다고 말함으로 예수에게 인간 이전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과분한 친절에 과분한 친절을 더하여: “과분한 친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리스이다. 이 문맥에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선물, 관대한 사랑과 친절을 가리킨다. 이러한 친절은 받는 쪽이 받을 만한 노력을 한 것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순전히 주는 쪽에서 관대하게 베푸는 것이다.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그리스어 전치사 안티(“더하여”)와 함께 카리스가 2번 사용된 것은 과분한 친절이 풍부하게, 계속해서 또는 연속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을 “계속되는[또는 “끊임없는”] 과분한 친절”로도 옮길 수 있다.
율법 ··· 과분한 친절과 진리: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과 “과분한 친절”을 비교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롬 3:21-24; 5:20, 21; 6:14; 갈 2:21; 5:4; 히 10:28, 29)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보호자” 역할을 했다. 그 율법에는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그림자 즉 예언적 모형이 들어 있었다. (갈 3:23-25; 골 2:16, 17; 히 10:1) 율법의 두드러진 역할 한 가지는 “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게 해 준 것이다. (롬 3:20) 사람들은 그 정확한 지식 덕분에 “죄의 대가는 죽음”이며 “모든 범법과 불순종의 행동이 공의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롬 6:23; 히 2:2) 여기서 요한은 “율법”을 “과분한 친절과 진리”와 비교하면서 그 친절과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미리 보여 준 것들을 실현시키셨는데, 그중에는 용서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포함되었다. (레 4:20, 26) 또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속죄 제물로 주심으로 죄 많은 인간들에게 “과분한 친절”(그리스어 카리스, “고마운 선물”로 번역되기도 함)을 베푸실 것이라는 점을 밝혀 주셨다. (골 1:14; 요1 4:10, 각주. 롬 6:23 연구 노트 및 용어 설명 “과분한 친절” 참조) 예수께서는 그 희생 제물을 통해 사람들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새로운 “진리”를 밝혀 주셨다.—요 8:32. 요 1:14 연구 노트 참조.
아버지의 곁에: 직역하면 “아버지의 품에”. 누군가의 품에 있다는 것은 특별한 호의를 누리고 친밀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유적인 표현은 당시의 식사 관습에서 유래한 것 같다. 사람들은 식사할 때 침상에서 친밀한 친구의 품, 즉 가슴에 등을 댈 수 있는 자세로 기대앉았다. (요 13:23-25) 따라서 이 구절에서는 예수를 여호와의 가장 친밀한 친구, 즉 여호와에 대해 누구보다도 온전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마 11:27.
독생자인 신: 직역하면 “독생한 신”.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요한은 앞서 그분을 “신”이라고 불렀다. (요 1:1, 17) 그는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로 언급하기도 했다. (요 1:14; 3:16) 그런데 이 구절에서 요한은 예수를 “독생자인 신” 즉 “독생한 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느님의 마련 안에서 예수의 독특한 위치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성경에서 “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보면 예수를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위력 있는 자’를 의미하며 성경에서 사람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시 82:6. 요 1:1; 10:34 연구 노트 참조) 예수는 전능한 하느님이신 아버지로부터 능력과 권위를 받으셨기 때문에 “신” 즉 위력 있는 분이다. (마 28:18; 고전 8:6; 히 1:2) 예수는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유일한 분이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므로 (요 1:3) “독생자인 신” 즉 “독생한 신”으로 불리기에 합당하다. 이 표현은 하느님의 모든 천사 아들들 가운데서 예수만이 누리는 영광스럽고 탁월한 위치를 보여 준다. 일부 사본들에는 이 표현이 “독생자”로 되어 있으며 몇몇 성경 번역판에서는 그와 같이 번역한다. 하지만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독생한 신”(그리스어 정관사가 있는 경우도 있고 없는 경우도 있음)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여기서 “증언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마르티리아이다. 요 1:7에서 침례자 요한은 “증인”(마르티리아의 한 형태), 즉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 언급된다. 이 구절(요 1:19)에서 마르티리아는 침례자 요한이 예수에 대해 확증하거나 선언한 것을 가리키며 그 내용이 이어지는 구절들에 기록되어 있다.
엘리야: 마 11:14 연구 노트 참조.
‘예언자’: 모세가 예언했으며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예언자를 가리킨다.—신 18:18, 19; 요 1:25-27; 6:14; 7:40; 행 3:19-26.
여호와: 이 구절에서 인용한 사 40:3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으로 표기된 하느님의 이름(יהוה, 로마자로 음역하면 YHWH)이 나온다. (부록 가5 및 다 참조) 복음서 필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는 사 40:3의 예언을 침례자 요한에게 적용하며, 요한복음의 이 구절에서 침례자 요한은 그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한다. 요한이 여호와의 길을 곧게 할 것이라는 말은 하늘의 아버지를 대표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인 예수보다 요한이 앞서 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는 의미이다.—요 5:43; 8:29.
물로 침례를 줍니다: 또는 “물에 잠기게 합니다; 물에 담급니다”. 그리스어 밥티조는 “담그다; 빠뜨리다”를 의미한다. 성경에 이 단어가 나오는 다른 사례들은 침례가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요한은 살림 근처의 요르단 골짜기 어딘가에서 침례를 베푼 적이 있다. “그곳에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요 3:23) 빌립이 에티오피아 환관에게 침례를 베풀었을 때, 두 사람 모두 “물로 들어갔다.” (행 8:38) 또한 「칠십인역」 왕하 5:14에서는 나아만이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근” 일을 묘사할 때 동일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신발: 또는 “샌들”. 다른 사람의 신발 끈을 풀어 주거나 신발을 벗겨 주거나 가지고 다니는 것(마 3:11; 막 1:7; 눅 3:16)은 종이 하는 비천한 일로 여겨졌다.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 요르단강 동쪽에 있던 베다니를 가리킨다.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 인근에 있던 베다니와는 다른 곳이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단 한 번 언급된다. (마 21:17; 막 11:1; 눅 19:29; 요 11:1) 이 베다니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 사람들은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장소로 전해 내려오는 곳 즉 요르단강을 기준으로 예리코 건너편에 이 베다니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 1:29, 35, 43; 2:1을 보면 이 베다니는 예리코 인근이 아니라 갈릴리 가나와 가까운 곳이었던 것 같다. 갈릴리 바다에서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부록 나10 참조.
베다니: 일부 사본들에는 “베다니”가 아니라 “벳아바라”로 되어 있으며 몇몇 성경 번역판에서는 그와 같이 표기한다. 하지만 가장 신뢰할 만한 사본들에는 “베다니”라고 되어 있다.
세상: 그리스어 코스모스는 세속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의미로 사용되며, 특히 성경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요 3:16과 이 구절에서 코스모스는 구속받을 수 있는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인류 전체에게 죄 즉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있다고 언급한다.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마귀에게 유혹을 받은 뒤에 침례자 요한에게 오시자, 요한은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다. 이 표현은 이 구절과 요 1:36에만 나온다. (부록 가7 참조) 예수를 어린양에 비하는 것은 적절하다. 성경 전체에서 양은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제물로 바치는 동물이었다. 양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희생하실 것임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영감받은 성경에 나오는 여러 구절들과 연관이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 대신 숫양을 바쳤으며, (창 22:13)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을 받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았고, (출 12:1-13)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제단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숫양이 바쳐졌다. (출 29:38-42) 침례자 요한은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중 하나나 그 이상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수 있다. 또한 요한은 여호와께서 “나의 종”이라고 부르신 자가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사 52:13; 53:5, 7, 11)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면서 예수를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불렀다. (고전 5:7) 사도 베드로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를 언급했다. (벧전 1:19)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는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를 가리켜 “어린양”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25회 이상 사용했다.—몇 가지 예를 보려면 계 5:8; 6:1; 7:9; 12:11; 13:8; 14:1; 15:3; 17:14; 19:7; 21:9; 22:1 참조.
비둘기같이: 비둘기는 신성한 용도로도 사용되었으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새는 희생 제물로 쓰였으며 (막 11:15; 요 2:14-16) 순진함, 순수함, 순결함을 상징했다. (마 10:16) 노아가 방주에서 놓아준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왔는데, 이것은 홍수로 차오른 물이 빠지고 있으며 (창 8:11) 쉼과 평화를 누릴 때가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창 5:29) 이러한 점을 볼 때, 예수가 침례받을 때 여호와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을 사용하신 것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수행할 역할에 주의를 이끌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예수는 하느님의 순결하고 죄 없는 아들로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자신이 왕으로 통치할 때 인류가 쉼과 평화를 누리도록 기초를 놓을 것이었다. 예수가 침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거룩한 영 즉 활동력이 내려오는 모습은 비둘기가 날갯짓을 하며 내려앉는 모습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성경에서 이 표현은 예수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 (요 1:49; 3:16-18; 5:25; 10:36; 11:4) 하느님은 사람과 다르시고 문자적인 아내가 없으시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다. 이 표현은 예수와 하느님의 관계가 인간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또한 이 표현은 예수가 여호와로부터 생명을 받았음을 즉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강조한다. 그와 비슷하게 첫 사람 아담도 “하느님의 아들”로 언급된다.—눅 3:38 연구 노트 참조.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여기에 언급된 침례자 요한의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요 1:40 연구 노트 참조.
그 두 제자는 예수를 따라갔다: 이 말을 보면 처음으로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원래 침례자 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 1:35, 40 연구 노트 참조.
제10시쯤: 오후 4시경.—마 20:3 연구 노트 참조.
두 사람 중 하나: 이 두 사람은 요 1:35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한 사람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이 복음서의 필자인 사도 요한일 것이다. (마 4:21; 막 1:19; 눅 5:10) 다음과 같은 점들이 그러한 결론을 뒷받침한다. 필자는 이 복음서에서 (1)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2) 사도 요한을 가리킬 때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며 (3) 침례자 요한을 “요한”이라고만 부른다.
메시아: 또는 “기름부음받은 자”. 그리스어 메시아스(히브리어 마시아흐의 음역 표현)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두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요 4:25 참조) 마시아흐라는 히브리어 칭호는 히브리어 동사 마샤흐에서 나온 것으로, 마샤흐는 “(액체를) 바르다”, “기름부음을 하다”를 의미한다. (출 29:2, 7) 성경 시대에는 제사장, 통치자, 예언자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었다. (레 4:3; 삼상 16:3, 12, 13; 왕상 19:16) 이 구절(요 1:41)에는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그리스어 크리스토스)라는 칭호는 “메시아”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500회 이상 나온다.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둘 다 “기름부음받은 자”를 의미한다.—마 1:1 연구 노트 참조.
당신은 ··· 시몬입니다: 성경에서 시몬의 이름은 다섯 가지 방식으로 언급된다. (마 4:18; 10:2 연구 노트 참조) 이때 예수께서는 시몬을 처음 만나신 것 같다. 그분은 그에게 게바(케파)라는 셈어 이름을 붙여 주시는데, 게바는 욥 30:6과 렘 4:29에 나오는 히브리어 케핌(바위)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 복음서의 필자인 요한은 여기에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베드로라는 그리스어 이름 역시 “바위”를 의미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셈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몬뿐이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거짓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요 1:47; 2:25) 베드로의 성품도 분별할 수 있으셨다. 베드로는 특히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되신 이후로 바위에 비할 만한 좋은 특성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어 회중을 강화하고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눅 22:32; 행 1:15, 16; 15:6-11.
요한: 일부 고대 사본들에는 이 구절에서 사도 베드로의 아버지의 이름이 요한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요나라고 되어 있는 고대 사본들도 있다. 마 16:17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다. (마 16:17 연구 노트 참조) 일부 학자들은 요한과 요나가 철자만 다를 뿐 동일한 히브리어 이름을 그리스어로 옮긴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다나엘: “하느님이 주셨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이름에서 유래했다. 아마도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바돌로매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마 10:3) 바돌로매는 “톨마이의 아들”이라는 의미로서, 아버지의 이름에서 나온 이름이다. 나다나엘을 바돌로매라고 부른 것처럼, 어떤 사람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성경에 나오는 어떤 남자는 단지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라는 이름으로만 불렸다. (막 10:46)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바돌로매와 빌립을 함께 언급하고, 요한은 나다나엘과 빌립을 함께 언급한다. 이것은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동일 인물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 (마 10:3; 막 3:18; 눅 6:14; 요 1:45, 46) 당시에는 이름을 둘 이상 갖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요 1:42.
모세가 율법에 ··· 또 예언자들이: 이 표현은 복음서에 여러 차례 나오는 “율법과 예언서” 또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 5:17; 7:12; 11:13; 22:40; 눅 16:16) “율법”은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책들을 가리키고 “예언서”는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글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될 때는 히브리어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에 언급된 제자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주의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빌립은 창 3:15; 22:18; 49:10; 신 18:18; 사 9:6, 7; 11:1; 렘 33:15; 겔 34:23; 미 5:2; 슥 6:12; 말 3:1과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 실제로 여러 성경 구절에서는 히브리어 성경 전체가 예수에 대해 증언한다고 알려 준다.—눅 24:27, 44; 요 5:39, 40; 행 10:43; 계 19:10.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나사렛이 갈릴리 사람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보잘것없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 21:2)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이 나오지 않으며 요세푸스도 나사렛을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나사렛에서 남서쪽으로 3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야비아는 수 19:12에 언급되며 요세푸스의 저서에도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이나 요세푸스의 저서에 갈릴리에 있는 도시가 모두 언급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유의할 만한 점으로, 복음서에서는 나사렛을 항상 “도시”(그리스어 폴리스)로 언급하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마을보다 인구가 많은 곳을 가리킨다. (마 2:23; 눅 1:26; 2:4, 39; 4:29) 나사렛은 에스드라엘론(이스르엘) 평야 인근의 언덕들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는 인구가 많았고 근처에 많은 도시와 성읍이 있었다. 나사렛은 주요 무역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당시의 사회, 종교, 정치에 관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눅 4:23 비교) 나사렛에는 회당도 있었다. (눅 4:16) 이런 점들을 볼 때 나사렛은 보잘것없는 마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나다나엘의 말은 단지 빌립의 말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데, 빌립은 인근 도시인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한 남자가 약속된 메시아라고 말했던 것이다.—미 5:2; 요 7:42, 52.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야곱의 후손은 누구나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단지 혈연관계를 언급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과 겨루는 자(하느님에게 끈질김을 나타내는 자)”를 의미한다.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 천사와 씨름한 뒤에 그 이름을 받았다. 그는 형 에서와는 달리 신성한 것의 가치를 인식했으며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기운을 다해 힘썼다. (창 32:22-28; 히 12:16)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단지 혈통상으로만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 그의 조상 야곱처럼 강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고착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그에게는 거짓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시 32:2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말씀은 나다나엘이 결코 위선적이거나 교활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당신은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다나엘은 예수의 이 말씀대로 ‘큰 일들을 보기’ 시작했다. 고향인 갈릴리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나다나엘은 예수께서 물을 좋은 포도주로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다. (요 2:1-11; 21:2) 또한 그는 나중에 사도로 임명된 다른 열한 명과 함께, 예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고 악귀를 쫓아내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일들을 보는 것에 더해, 나다나엘과 다른 사도들은 능력을 받아 직접 기적을 행하고 “하늘 왕국이 다가왔다”고 선포했다.—마 10:1-8.
진실로 진실로: 그리스어 아멘 아멘. 그리스어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을 음역한 것으로 “그렇게 되소서” 또는 “확실히”를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실을 말씀하시거나 약속이나 예언을 하시기 전에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심으로 자신의 말이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강조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진실로” 즉 아멘을 사용한 예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에만 나오며 다른 종교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마 5:18; 막 3:28; 눅 4:24) 아멘을 두 번 반복한 형태(아멘 아멘)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며 총 25회 언급된다. 요한복음에서는 언제나 아멘이 그러한 형태로 사용된다. “진실로[또는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라는 표현은 “분명히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또는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는데”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하늘: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는 물질적 하늘이나 영적 하늘을 가리킬 수 있다.
천사들: 또는 “사자들”. 그리스어 앙겔로스와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라크는 성경에 거의 400번 나온다. 두 단어 모두 기본적으로 “사자”를 의미한다. 이 단어들이 사자 역할을 하는 영들을 가리키는 경우에는 “천사”로 번역되었지만,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사자”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맥을 보면 사람을 가리키는지 천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흔히 각주에 대체 표현이 나온다. (창 16:7; 32:3; 욥 4:18, 각주; 33:23, 각주; 전 5:6, 각주; 사 63:9, 각주; 마 1:20; 약 2:25; 계 22:8. 용어 설명 “천사” 참조) 상징적인 내용이 많이 나오는 요한 계시록에서는 “천사”라는 표현이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계 2:1, 8, 12, 18; 3:1, 7, 14.
‘사람의 아들’: 마 8:20 연구 노트 참조.
‘사람의 아들’에게: 또는 “‘사람의 아들’을 섬기면서”. 예수께서는 천사들이 ··· 내려왔다 올라갔다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과거에 야곱이 본 환상을 염두에 두셨을 수 있다. 환상 가운데서 야곱은 천사들이 계단 또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았는데, (창 28:12) 이것은 천사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승인을 받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방법으로 봉사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하신 말씀도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 예수를 섬기고, 그분은 특별한 방법으로 아버지의 돌봄과 인도를 받을 것이었다. 예수와 함께한 사람들은 그러한 증거를 보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