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걷어찼다’—마약 습관을
1968년 12월 6일자 ‘오하이오’ 주 「영스 타운 빈디 케이터」지 제1면에는 “LSD를 판매하는 18세 소년을 검거”라는 큰 표제가 가로 질러 있었읍니다.
내가 바로 그 소년이었읍니다. 나는 십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읍니다. 그러나 삼십일 후에 출감하였고 즉시 나는 다시 마약을 밀매하기 시작하였읍니다. 나는 나 자신의 마약 습관을 지탱하기 위하여 돈이 필요하였으며, 모든 종류의 마약 특히 LSD를 사용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헤로인’ 중독자가 흔히 경험하게 되는 깊은 경지에 이르기에는 아직 멀었읍니다. 모두 합하여 스무번 이상 형무소에 수감되었었고 세번 정신병원에 입원했었읍니다. 내가 발가벗기우는 일이 한번만이 아니었고, 정신병 환자실에 갇혀서 금단의 고통을 겪었읍니다. 마지막 번에는 감방에서 중태에 빠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종부성사까지 거행되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났으며 절도 죄로 유죄 선고를 받고 결국 ‘오하이오’ 주 교도소 ‘맨스 필드’ 지소로 보내졌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이제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나는 마약 남용을 극복하였읍니다. 내가 마약을 끊은지 삼년 반이 되었으며 다시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을 것에 자신이 있읍니다. 왜냐 하면 나는 마약 남용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진정한 해결책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나의 이전 생활을 간단히 설명하겠읍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마약 남용으로 인도하기 쉬운 환경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당신의 가족에게 발전되는 기미가 보이면 너무 늦기 전에 문제를 시정할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버릇이 없이 자랐다
나의 부모는 1951년 곧 내가 생후 여덟달 되었을 때 이혼하였읍니다. 그 후에 법정 투쟁에서 이상하게도 나의 아버지가 나에 대한 법적 보호권을 획득하였읍니다. 나는 일주일에 하루만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마련이 되었읍니다. 어머니가 재혼하자 법적 투쟁은 계속되었으며 양쪽은 모두 물질로 나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읍니다. 그 결과 나는 매우 버릇이 없게 되었읍니다.
그 후 어머니는 나의 사랑을 “사”려는 노력을 포기하였읍니다.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과의 가정 성서 연구에서 많은 발전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곧 물건을 집어 던지며 싸우는 버릇, 담배피우는 일, 기타 나쁜 습관이 사라지기 시작하였읍니다. 내가 찾아가면 어머니와 계부는 나를 성서 연구 집회에 동반하였읍니다. 내가 집에 돌아와서는 아버지에게 새로 배운 것을 이야기하곤 하였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읍니다. 친척들은 아버지에게 “그 애를 제 어미에게 가지 못하게 하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를 곡해하는 미치광이들이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나와 어머니와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공동 노력이 시작 되었읍니다. 나는 비싼 선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고 아버지는 내 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었읍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어머니가 찾아왔을때 나는 “난 이제 더는 엄마를 만나지 않겠어요” 하고 말하였읍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당신이 이 아이에게 이렇게 하라고 시켰군요?” 하고 항의하였읍니다. 나는 그 때 아홉살이었고 그 후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어머니를 다시 만났읍니다.
아버지는 1960년 8월에 재혼하였읍니다. 나는 참으로 버릇이 없었으며, 아버지와 계모를 괴롭혔읍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매를 맞거나 호된 징계를 받은 일이 없었읍니다. 나는 일곱살에 몰래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였으며 열살이나 열한살이 되었을 때 술에 취하곤 하였읍니다. 또한 나는 아교풀의 냄새를 들여 마시고 ‘마리화나’를 실험하였읍니다. 어려서부터 징계를 받지 못하고 자랐고 일찌기 마약을 남용하였기 때문에 나의 사고 방식은 비뚤어졌읍니다.
내가 열세살 가량 되었을 때 어떤 소녀가 나를 냉대하자 나는 그 집의 차고 앞길에 휘발유를 뿌리고 성냥불을 붙여 차고를 그슬렸읍니다. 아버지는 벌금과 손해 배상액으로 800‘달라’를 지불하였읍니다. 그 무렵 나는 또 들치기를 하다가 체포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썽은 단지 시초에 불과하였읍니다.
성적 부도덕과 유치장
‘리버티’ 고등 학교 2학년 때 나는 여자 변소에서 여자 친구와 추행을 하다가 발각되었읍니다. 그리하여 2주간 정학 처분을 받았읍니다. 그 여름 나는 반발심에서 나의 “보수적인” 옷을 뒤뜰에서 태워버렸읍니다. 계모와 아버지는 격노하여 나를 방구석으로 몰아넣었읍니다. 나는 최루 ‘가스’총으로 아버지를 “쏘았”고 창문으로 뛰쳐나갔읍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왔으며 ‘프레드 포스티노’ 순경이 나를 지붕에서 끌어내려 구속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읍니다.
그 해 후반에 나의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방과 후 침대속에 들어있는 우리를 발견하였읍니다. 우리는 결국 ‘리버티’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이튿날 나는 또 그 여자의 집에서 그 여자와 함께 있었읍니다. 나는 권위를 무시하였으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읍니다! 두 주일 후에 여자 친구의 삼촌이 방해를 하려고 하였을 때 나는 한 젊은 친구와 함께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읍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읍니다.
나는 장발의 반항아, 진정한 말썽 꾸러기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가치있는 것, 잡을 만한 가치있는 것, 어떤 가치있는 미래를 찾고 있었읍니다. 나는 관심을 끄는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나는 결혼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였읍니다. 부모는 이 문제를 고려하였지만 우리가 너무 어리고 일시적으로 열을 올리고 있다고 판단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출하기로 결정하였읍니다. 그리고 1967년 2월에 훔친 돈 420‘달라’를 가지고 서쪽으로 떠났읍니다. 도중에 우리는 ‘로스 앤젤레스’에서 갑자기 체포되어 ‘오하이오’ 주로 다시 비행기 편으로 호송되었읍니다. 기다리고 있던 경찰관이 나를 수갑을 채우고 ‘트럼벌’ 교도소로 데리고 갔으며 나는 거기에서 두주일을 보냈읍니다.
이제 어느 학교에서도 나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읍니다. 나의 아버지는 여러 모로 간청하여 가까스로 나를 인근 ‘워렌’에 있는 ‘존 에프. 케네디 가톨릭 고등 학교’에 입학시켰으며 나는 그 학교에서 삼학년 과정을 마쳤읍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나는 더욱 마약 남용에 깊이 빠졌읍니다. 그 해 여름에 나는 여러 집에 불법 침입하다가 체포되었읍니다.
나의 4학년 생활은 엉망이었읍니다. 최근에 교장 ‘프랭크 레너드’와 학교 기록을 조사해 보니 75일간 결석을 하였었읍니다. 1968년 2월에 나는 여자 친구를 사흘동안 나의 방에 숨겼었읍니다. 부모가 굴복을 하고 우리를 결혼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읍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나는 ‘오하이오’ 주 교화원에서 석달을 보내게 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얼마후 석방되어 나의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얻어 고등 학교를 졸업하였읍니다.
기회가 오자 나는 여자 친구에게 다시 가출하여 ‘아스피린’ 한병으로 거짓 자살 소동을 벌이자고 권하였읍니다. 내 생각에는 그렇게 하면 우리 부모가 우리의 사랑을 확신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피를 토하며 귀가하였읍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 녀석은 너를 사랑하는게 아니야. 그저 노리개로 취급하는 거지. 그는 너를 노예로 삼고자 하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나를 미워하게 되었읍니다. 나는 그 소녀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이러한 실연은 나를 더욱 타락하게 하였고 걷잡을 수 없이 마약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하였읍니다.
마약 중독에 깊이 빠짐
나는 아직 진정한 중독자는 아니었지만 마약을 과량으로 사용하였고 밀매 행위를 하였읍니다. 심지어 나는 마약을 구하러 ‘뉴욕’에도 갔읍니다. 마침내 나는 경찰의 합동 노력으로 체포되었읍니다. 사복 형사에게 마약을 팔다가 잡힌 것입니다. 제1면 표제로 나에 대한 신문 보도가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때였읍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좋은 변호사를 선정하였으며 나는 1969년 1월 15일에 출감하였읍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마약을 밀매하기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었읍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돈이 필요하였읍니다. 이제 ‘헤로인’ 주사를 맞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수개월간 나는 마약을 위하여 하루에 40‘달라’ 내지 50‘달라’를 지출하였읍니다. 아버지는 나를 도우려고 노력하였읍니다. 아버지는 나를 여기 저기에 취직을 시켜 주었지만 몇주일을 지속하지 못하였읍니다. 나는 깊이 중독되어 일하다가도 마약 주사를 놓곤 하였읍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읍니다. 나는 마약을 내 반지에 붙어 있는 조그만 곽속에 넣어 가지고 직장에 나갑니다. 다음에 나는 변소로 가서 주사기를 사용하여 마약을 정맥에 직접 주사하였읍니다. 그러나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나는 주사바늘을 당겨서 주사기에 피를 채운 다음 다시 주사하고 또 하고 하여 열번 가량 반복하곤 하였읍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나는 내 정신이 아닙니다. 나는 갑자기 건물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몸이 나긋나긋 해짐을 느낍니다. 심지어 머리끝까지 그러한 느낌을 갖습니다. 중독자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느낌을 가능한한 많이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스피드볼” 즉 ‘메데드린’과 ‘헤로인’을 섞어서, 다시 말하면 “흥분제”와 진정제를 섞어서 주사하였읍니다. 그러면 몸은 늘어지기도 하고 촉진되기도 하여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혼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LSD를 복용하면 그 영향이 전혀 다릅니다. 나는 LSD를 복용하였을 때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되어 나 자신의 운명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하였읍니다. 나의 변호사인 ‘조쇼보니’는 최근에 나에게 말하기를 한번은 내가 LSD를 먹은후 내가 임신한 여자에게서 아기를 꺼낼 수 있다고 말하여 그를 아주 무섭게 하였다고 하였읍니다. 마약을 사용하면 참으로 끔찍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모두 합하여 나는 200정 이상의 LSD를 복용하였읍니다.
일년 이상이나 나의 “드릴” 위주의 생활이 계속 되었읍니다. 즉 마약 주사를 놓고 여자들과 사귀고 경찰의 눈을 피해 다녔읍니다. 나는 아버지의 말처럼 ‘지저분한 방만 찾아다니면서’ 불결한 곳으로 전전하며 살았읍니다. 경찰은 심지어 내가 아버지의 집을 털었다는 죄로 고발하기까지 하였읍니다. 나의 “친구들”은 수천 ‘달라’ 상당의 그의 재산을 털었던 것입니다. 1969년 8월에 우리는 평판나쁜 ‘우드스탁’ 축제에 가서 나는 복합 ‘비타민’을 LSD로 팔아 많은 돈을 벌었읍니다. 주역들과 군중들을 잘 보기 위하여 무대가까이에 있는 관객석에 올라가 구경하면서 모두가 신비스러운 힘에 이끌린 것 같다고 생각하던 기억이 납니다.
귀가하자 나는 내가 심은 것을 거두기 시작하였읍니다. 나는 극한의 경지에서 겨우 살아났던 것입니다.
구사일생
1969년 9월 5일이었읍니다. 나는 정말 축 늘어져서 마약을 갈구하는 최악의 경지에 이르렀읍니다. 그래서 ‘영스타운’ 외곽의 작은 도시인 ‘비엔나’에 있는 약방에 침입하여 여러가지 물건을 모았읍니다. 그 때에 ‘사이렌’이 울렸읍니다! 총을 겨냥한 경찰들에게 둘려싸인 나는 정신적으로 교란되어 “나를 죽여라! 죽여!” 하고 소리지르면서 그들에게로 덤벼들었읍니다.
그들은 나를 주거 침입죄로 고발하였읍니다. 5,000‘달라’의 보석금이 정해졌읍니다. 그리고 나는 친숙한 군 유치장으로 들어갔읍니다. 나는 그곳을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감방 하나에는 내 이름이 실제로 새겨져 있었읍니다! 나는 옷을 발가벗기우고 벽에 요를 댄 작은 방으로 넣어졌는데 그 방은 너무 작아서 다리를 뻗고 누울 수도 없었읍니다. 거기에서 나는 금단의 고통을 겪기 시작하였읍니다. 그곳 간수였던 ‘해럴드 포스트’는 최근에 한 친구와 나에게 그 감방을 보이면서 “나는 자네가 저 방에 누워서 그대로 죽을줄 알았네. 나는 전혀 자네에게 손을 쓰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그를 조금도 원망할 수 없읍니다. 나는 아주 완전히 폐인이었으니까요! 나는 동물과 같이 소대변에 딩굴렀으며 벽을 오르고 벽에 댄 ‘비니루’ 요에 몸을 마구 부딪치곤 하였읍니다. ‘포스트’ 씨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는 빌고 있었지. 정말 무릎을 꿇고 빌었지. 그러나 약을 주어도 먹을려고 하지 않았지.”
보안관 ‘리처드 바네트’ 씨도 거기 있었는데 금년 초에 내가 그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내가 얼마나 위험하였었는지를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자네는 내복약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지. 아주 난폭했었지. 내뱉어 버리고 말이야. 그래서 직장 좌약이 처방되었고 내가 그것을 자네에게 삽입시켜 주어야 했었지.” 그러나 내가 호전되지 않자 ‘영스타운’ 정신병원으로 옮겨졌읍니다.
새벽 네시에 아버지는 간호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읍니다. 간호원은 “댁의 아들이 중태에 빠져 있어요. 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하고 알려 주었읍니다. 아버지는 즉시 ‘버트 파이어스토운’ 박사에게 연락하여 나는 ‘성 엘리자베드 병원’으로 옮겨졌읍니다. 거기에서 나는 며칠 동안 중태에 빠져 있었읍니다. ‘파이어스토운’ 박사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내가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였읍니다. ‘성 엘리자베드’ 병원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 환자는 ··· 마약 사용으로 인한 심한 금단 증상 때문에 입원함.”
아버지는 5,000 ‘달라’의 보석금을 지불하였고 나는 삼주 후에 병원에서 나왔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하고도 나는 변화되지 않았읍니다. 아버지에게는 개심하겠다고 몇번이고 이야기하였지만 여전하였읍니다. 나는 아직도 장발을 하고 있었고 또다시 각종 마약을 사용하였읍니다. ‘헤로인’ 금단 증상이나 악성 LSD환각 증상과 같은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서도 다시 마약을 사용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당신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여자들, “드릴”, 나의 모든 친구들—‘히피’들, “자유연애”주의자들, ‘오토바이’, 방탕한 생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전축은 나의 불순한 욕망을 더욱 자극하였읍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다시 시작해도 그렇게 나쁠 것은 없지’ 하고 추리하였읍니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몇번의 LSD “여행”은 점차 악화되었읍니다. 마침내 절망의 와중에서 나는 여러 해 동안 소식이 끊겼던 어머니를 불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의 한 장로인 나의 계부는 내가 사는 지방에서 성서 연구를 하도록 주선해 주었읍니다.
험난한 회복 과정
나는 1970년 3월에 여호와의 증인과 처음으로 성서 연구를 하였읍니다. 또한 나는 ‘기러드’ 왕국회관을 찾아갔읍니다. 나는 검은 가죽 나팔바지를 입고 둥근 테 안경을 썼으며 머리는 장발이었읍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별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위선자들임을 증명하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나에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고 그들 모두는 나의 질문에 동일한 대답을 해 주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까지 감명을 받지는 않았읍니다. 그 날 밤에 나는 정든 ‘히피’ 소굴로 가서 다시 ‘헤로인’주사를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구를 중단하였다 계속하였다 하는 동안 나는 성서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하지만 나는 마약과 나의 부도덕한 생활을 도저히, 아니 적어도, 끊고 싶지 않았읍니다. 그러던 중 4월 마지막 주말에 나는 소름끼치는 LSD “경험”을 하였읍니다. 나는 자동차 바로 내 옆자리에 앉은 나의 여자 친구가 썩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 추하고 무서운 광경은 형용할 수 없읍니다. 나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정말로 자살을 하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도움을 구하였읍니다.
그 때가 새벽 세시였지만 나는 나를 가르치는 증인에게 전화를 하였읍니다. 그는 내가 이번에 진정으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여호와께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격려하여 주었읍니다. 나는 다시는 마약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고 다시는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읍니다. 내가 잠에서 깨면 그러한 경험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신 창조주께 감사하지 않는 날이 없읍니다.
그 다음 주에 지난 9월에 있었던 약방 침입 절도에 대한 공판이 있었읍니다. 상습범인 나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판사는 나를 15년 징역형을 받을 범죄로 간주하여 ‘오하이오’ 주 교도소로 보냈읍니다. 나는 며칠 후에 복역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것은 참으로 나에게 축복이었읍니다. 왜?
그동안 나는 묵상하고 연구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생활을 분석하고 나의 생활이 참으로 무익하고 파괴적임을 절감하였읍니다. 나는 여호와께 용서를 빌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고 싶다고 말하였읍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간행물의 도움으로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읍니다. 그 후 6월말에 나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읍니다. 약 2주 후 즉 1970년 7월 10일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나의 헌신을 물침례로 상징하였읍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
나는 이전 친구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들과 마약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달라진 이유와 그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읍니다. 나는 그들중 매우 많은 사람을 마약을 사용하도록 내가 만들었고 그들이 나의 단골손님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꼈읍니다. 나는 적어도 삼백명의 이전 친구들을 만나야 하였으며 그들중 일부는 장차 우리가 토론한 성서 진리에 대한 반응을 나타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서 연구를 도운 첫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나의 중요한 단골 손님이었읍니다. 나는 그에게 ‘헤로인’을 정맥에 주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었으며 그의 팔을 잡고 처음으로 그의 정맥에 마약을 주사하여 주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가족도 내가 변화한 것을 보고 참으로 감명을 받아 그 연구에 참여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이전과 같은 생활을 계속하였읍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이전 친구들중 적어도 여섯 사람이 마약과 관련있는 병으로 죽었읍니다. 그러나 이전 친구 한 사람은 반응을 나타냈읍니다. 나는 특이하게 그를 다시 만났읍니다.
나는 호별 방문 전도를 하던 중 어느 집에서 돌아서서 막 나오는데 장발을 한 청년이 차도로 달려 왔읍니다. 내가 이름을 소개하자 거의 즉시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하고 물었읍니다. 이름을 다시 말하자 그는 “아니, 그럴리가 없지, 그 사람은 댁이 아니고 딴 사람인데요!”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의 낯이 익었지만 나는 그가 자기 이름을 밝히기까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나와 함께 나의 여자 친구의 삼촌을 죽이려고 계획한 바 있던 그 청년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서 보여줄 때까지 나를 인정하지 않았읍니다. 나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는 그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는 성서에 대한 인식이 발전하여 마약을 끊고 1972년 초에 침례를 받았읍니다. 그해 여름에 우리는 ‘피츠버그’ ‘스리 리버 스태디엄’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서 우리의 경험담을 하였읍니다. 또한 우리는 마약 문제와 마약을 멀리 해야할 이유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읍니다. 마약에 대한 나의 경력을 아는 학생들이 선생들에게 요청하여 이러한 연설을 마련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1972년 11월에 우리는 ‘마호우닝 카운티 조인트 버케이셔널’ 학교에서 여섯 학급의 학생들에게 이야기하였읍니다. 모두 600여명 학생들이 참석하였읍니다. 그들은 매우 주의깊이 들었고 우리가 마약 남용을 극복하도록 도운 서적 백여부와 잡지 약 백부를 받았읍니다. 1972년 12월 5일에 나는 이 학생들로부터 60통의 편지가 든 ‘폴더’를 받았읍니다. 그들은 매우 감사하였으나 대부분 우리가 참으로 마약에 깊이 빠졌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아무도 그러한 엄청난 변화를 할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였읍니다.
변화에 대한 증거 제공
그것이 일반의 견해입니다. 예를 들면 ‘시애틀’ 학교 지구 보안과장 ‘찰스 오투울’은 “마약 습관은 치료할 길이 없다”고 단언하였읍니다. 또한 ‘영스타운’의 마약 부장 ‘윌리암 에이. 프리드네이머’는 여러 해 동안 마약 문제를 취급하였지만 마약 중독자가 서너달 이상 마약을 끊는 것을 본 일이 없다고 나에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자네 한 사람이 있네” 하고 거의 못믿겠다는 듯이 부언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마약 중독에 대한 나의 경험을 읽고 의심을 가질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 때문에 나는 금년 초에 마약 중독자로 나를 다룬 사람들 즉 경찰관, 검찰관, 간수, 판사, 변호사, 심리학자, 정신병학자, 의사 등등 수십명을 찾아가 만났읍니다. 나는 그들에게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고 그들의 논평을 요청하였읍니다.
대부분은 내가 그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읍니다. 물론 그들은 악명높았던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거의 모두가 ‘마약을 어떻게 끊었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가?’를 질문하였읍니다. 나는 기꺼이 설명하였읍니다.
진정한 해결책
‘데니 코로보’ 씨는 내가 찾아가 만난 경찰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내가 약방을 불법 침입하였을 때 나를 체포하던 현장에 있었읍니다. 그는 지금 반장이며 고등학교와 기타 공공 단체에서 마약과 마약 문제에 대하여 연설하는데 전념하고 있읍니다. “정말 자네는 딴 사람이 되었군! 거의 믿을 수가 없는데!” 그는 나를 만나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면서 거듭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자네에게는 분명히 특별한 일이 있었군. 정신적으로 크게 영향을 준 무엇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확실히 깨달은 점이 있는 모양이야.”
나는 그렇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나는 창조주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말하였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정신에만 도달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까지 깊숙히 들어갔음을 말하였읍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욕망은 부도덕과 마약과 그러한 모든 것을 내 마음에서 밀어냈으며 옳은 일을 행하려는 동기와 힘을 나에게 부여하여 주었읍니다.
나는 또한 금단의 고통을 겪을 때에 나를 돌보아 준 ‘성 엘리자베드 병원’ 의사인 ‘파이어스토운’ 박사와 1973년 3월 1일에 만날 약속이 있었읍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아니 자네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소리쳤읍니다. 다음에 그는 나의 과거를 아는 다른 의사들을 불러와도 되느냐고 물었읍니다. 그들도 내가 달라진 것을 보고 놀랐읍니다. “어떻게 그런데서 빠져 나왔나?” 하고 그들은 물었읍니다.
나는 내가 나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하였읍니다. 여러 번 나는 막다른 골목에 부닥쳤었읍니다. 나는 내 표준대로 생활하였었으며, 마치 내가 신인양 행동하였고 나의 생활 법칙을 내가 정할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쾌락을 추구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러던 중 성서 연구를 통하여 나는 나의 창조주께 대한 건전한 두려움을 갖게되었다고 말하였읍니다. 또한 나는 성서의 가르침에 참으로 일치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으며 그들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고 말하였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믿음이 다른 믿음에 비하여 무엇이 독특한가?” 하고 그들은 물었읍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을 분명히 알수 있었다고 설명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죽은 자의 상태, 부활에 대한 확실한 희망, 하나님의 왕국 통치하에 낙원이 될 지구의 장래 등입니다. 내가 마약 남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이러한 것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라고 나는 말하였읍니다.
나는 의사들에게 내가 불교를 포함하여 다른 종교들도 조사하여 보았고 내가 ‘로마 가톨릭’교 집안에서 자랐음을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에는 견고한 것—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확신, 진정한 희망과 믿음이 없읍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젊은이들이 마약을 끊는 데 필요한 자극을 주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읍니다.
거의 삼년 동안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전도인으로 봉사하여 왔읍니다. 그리고 나는 생활에서 이렇게 커다란 변화를 한 사람이 나 뿐이 아님을 알았읍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창조주를 인식하게 된 후에 많은 참다운 친구들이 마약 습관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이들이 그렇게 할수 있었다면 당신도—만일 당신이 마약 중독자라면—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참 종교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마약 문제에 대한 해결책입니다!—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