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해”로부터 마지막 이익을 취함
“여호와께서 ··· 나를 보내사 ··· 여호와의 은혜의 해[선의의 해, 신세]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게 하려하심이라].”—이사야 61:1, 2.
1. 다른 이의 선의를 갖는다는 것이 어떠한 면으로 바람직한 것입니까?
다른 이의 “선의”(善意),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가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울 수 있고,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분의 선의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현명한 왕 ‘솔로몬’은 “왕의 희색에 생명이 있나니 그 은택[선의, 신세]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고 말하였읍니다. 이 고대 잠언은 오늘날까지도 진리입니다.—잠언 10:1; 16:15.
2. “자연”의 힘에게는 선의가 없음이 어떻게 증명됩니까?
2 “자연”의 힘에게는 선의를 기대할 수 없읍니다. 그들은 지성과 분별력이 없는 맹목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지성이 그들에게 제정해 놓은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리하여 대기에 있는 어떠한 상태는 태풍을 일으켜서 인간의 통제와 지휘를 무색케하며 일부 지역을 강타하여 인간이나 짐승, 재산, 농작물 할것 없이 사정없이 쓰러뜨려버립니다. 과도한 폭우나 쌓인 눈이 녹아서 일어나는 홍수는 하천과 강의 물을 불게 하고 평평한 지역을 휩쓸어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닥치는대로 쓸어버립니다. 막대한 힘을 가진 자연 지진은 인간이 세운 대건물들을 흔들리게 하고 땅을 갈라지게 하여 이웃에 사는 산 피조물들을 위태롭게 합니다. 태양 표면의 불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방사능 입자는 조용히 지구로 돌진해서 사람으로 해로운 영향을 받게 합니다. 참으로 이러한 자연의 힘은 아무런 선의도 나타내지 않습니다.
3. 누구의 선의를 갖는 것이 우리에게 가치있는 일이며, 그러므로 생각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알려고 합니까?
3 그러면 이러한 자연의 힘의 창조주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위로를 위하여 그 분은 선의를 나타내실 수 있읍니다. 그는 지성적인 분이며, 도덕적 성품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을 떠나서 살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선의를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는 생각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자신의 창조주이신 이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선의를 얻을 수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4. (ㄱ)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는 왜 창조주의 “선의의 해”에 관심을 가집니까? (ㄴ) 참으로 현명한 길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우리가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라면 우리는 옛날에 선포된 이 창조주의 “선의의 해”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여기 “해”라는 표현은 보통 일년과 같이 제한된 기간임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 특별한 해에 있을 선의도 또한 기한부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해”가 끝나면 선의와 반대되는 것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선의를 일축한 자들에게 자비를 나타냄이 없이 보응하는 일입니다. 기록된 역사는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방적인 태풍이나 홍수 혹은 지진이 아니라 세계적인 행동을 취하실 날이 박두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가져오시는 것이며, 지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해 있읍니다. 이러한 행동을 취하실 때에 하나님의 선의를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살아남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할 것입니까? 지금 그의 선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5. “선의의 해”는 어떤 종류의 기간을 의미하며, 이 선의는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입니까?
5 이 “선의의 해”가 1970년이나 1971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1970년은 이미 흘러갔으며 1970년대의 이 첫해도 “선의의 해”에 포함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선의의 해”는 365일로 되어 있는 여러 해가 이미 흘렀읍니다. 이것은 상징적 해이며, 태양력이나 태음력으로 1년보다 더 긴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문자적인 해에는 언젠가 끝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 상징적 “선의의 해”가 무한정할 것이라든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태도로 무관심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 해도 문자적인 해와 같이 시작과 끝이 있는 지정된 기간입니다.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면 이 “선의의 해”의 끝이 매우 가까왔음을 알려줍니다! 이 “해”와 함께 이 선의도 끝날 것이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모형적 “선의의 해”
6, 7. (ㄱ) “선의의 해”라는 특별한 술어로 주의를 이끈 사람은 누구였읍니까? (ㄴ) 그는 장차 올 어떠한 위로의 소식을 예언하도록 영감을 받았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6 “선의의 해”라는 이 특별한 술어를 사용해서 이 해에 우리의 관심을 처음으로 이끈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결혼하여 두, 세명의 아들을 가진 아버지로서 통용 기원전 제8세기에 살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사야’인데, ‘스트롱’ 편 「성서 어귀 사전」에 의하면 그 이름의 뜻은 “‘야’가 구원하셨다”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예언서 외에도 여러 역사 서적에 언급된 역사적 인물입니다. (열왕 하 19:2-20:19; 역대 하 26:22; 32:20, 32)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환상을 본 예언자였으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여호와의 질문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유대’)땅에 장차 임할 황폐에 관한 여호와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았읍니다. 이 황폐가 임하면 이 일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참 숭배자들을 슬프게 할 일이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의 땅과 여호와의 숭배의 전이 위치하고 있는 거룩한 성을 참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읍니다. (이사야 6:1-13)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사용하여 그러한 슬퍼하는 자들에게 장차 올 위로의 소식을 예언하도록 영감을 주어 이렇게 선포하게 하셨읍니다.
7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이사야 40:1, 2.
8. 이사야 61:1-4에 의하면 그 예언자는 누구의 입장에서 말하도록 영감을 받았으며, 그는 거기에서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8 예언자 ‘이사야’는 얼마 후에 또 영감을 받아 지존하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주 여호와의 신[즉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선의의 해, 신세]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죄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라].”—이사야 61:1-4.
9. (ㄱ) 이 “기쁜 소식”에는 어떠한 주제가 들어 있었읍니까? (ㄴ) 희랍어역(칠십인역)은 “해”와 “날”에 관한 부분을 어떻게 번역하였읍니까?
9 이것은 온유하고 슬퍼하는 자들에게 알려 줄 만한 “기쁜 소식”이 아니었읍니까? “여호와의 선의의 해”가 들어 있는 기쁜 소식이었읍니다. ‘시온’과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고 약탈한 자들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 즉 복수의 날이 온다는 것도 원수들이 여호와의 숭배의 중심지에게 한 일에 대하여 슬퍼하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읍니다. 통용 기원이 시작되기 여러 해 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희랍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선의의 해”에 관한 이러한 말씀을 번역할 때에 그들은 이 귀절을 희랍어로 “[여호와의] 받아들이실 만한 해와 응보의 날을 선포하며, 슬퍼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며”라고 번역하였읍니다.—이사야 61:2, 「칠십인역」, ‘돔슨’ 영역.
10. (ㄱ) 이들 ‘유대’인 번역자들은 그 해가 어떤 종류의 해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하였읍니까? (ㄴ) 그러나 이 ‘히브리’ 원문과 일치한 어떠한 다른 사상이 내포되어 있읍니까?
10 그리하여 이들 ‘유대’인들은 ‘이사야’가 ‘히브리’어로 말한 “해”는 여호와의 태도 즉 “여호와의 선의”에 관하여 말한다기보다도 “받아들이실 만한 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읍니다. 이들 ‘유대’인 번역자들에게 그것은 여호와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해 즉 여호와 앞에 은혜로운 해를 의미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여호와께서 은혜로운 일을 하시기에 “받아들이실 만한” 해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특히 “받아들이실 만한 해”가 “보응의 날”과 대조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실 만한 해”는 여호와께서 선의 즉 은혜를 나타내실 만한 때라는 사상을 내포합니다. 이것은 그가 받아들이실 혹은 수령하실 때인 그의 “받아드리실 만한 해”입니다. (‘로더함’역) 이 상징적 “해”가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 “해”의 정확한 뜻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고 우리 시대의 적용을 알아 보도록 합시다!
그 “해”의 선포의 시작
11. (ㄱ)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누가 그 “해”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읍니까? (ㄴ) 그가 지상에 오자 어떠한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름은 어떻게 그 예언을 한 사람의 이름과 상통하였읍니까?
11 “때가 차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전파”하도록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늘에서 이 땅으로 보내셨읍니다. (갈라디아 4:4) 하늘에서 온 그의 아들 이외에 또 누가 이 상징적 “해”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태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겠읍니까? 이 아들이 지상에 오자 그에게는 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관한 예언을 한 예언자의 이름과 매우 상통하는 이름이 주어졌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적 어머니에게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명하셨읍니다. 이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라는 뜻인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줄인 형태입니다. 한편 ‘이사야’라는 이름은 “구원하였다 ‘야’[즉 여호와]가”라는 뜻입니다. 이와 일치하게 예언자 ‘이사야’는 여러 경우에 예수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모형 즉 예언적 인물의 역할을 하였읍니다.—누가 1:30-33; 마태 1:20, 21.
12, 13. (ㄱ)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시고 정식으로 그 “해”를 전파하시기 전에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였읍니까? (ㄴ)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신 후에 무엇으로 보아 자기가 여호와의 선의를 가졌음을 아셨으며, 그것은 무슨 예언과 일치하였읍니까?
12 ‘이사야’의 예언이 “주 여호와의 신[즉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하였으므로 예수는 그가 참으로 메시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되기 전에, 그리고 정식으로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전파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요한’에게 물에서 침례를 받고 ‘요단’ 강의 침례받은 물에서 나온 후에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읍니다. 침례받으신 예수에게 여호와의 영이 내려오는 것은 비둘기가 예수 위에 내려앉는 형태로 나타나는 기적으로써 침례자 ‘요한’에게 보이는 것으로 상징되었읍니다. 이뿐 아니라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읍니다. “이는 내 아들, 사랑하는 자이다. 내가 그를 승인하였다[혹은, 이는 나의 아들, 나의 사랑하는 자이다. 그의 위에 나의 은혜가 놓여 있다, 신영성].” (마태 3:11-17, 신세; 요한 1:32-34) 예수께서는 이제 자기가 여호와의 선의 즉 은혜를 가지고 있음을 확실히 아셨읍니다. 이사야 42:1에 예언된 바와 같습니다.
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나의 영혼이 받아들인, 영]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즉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14, 15. (ㄱ) 그러면 예수께서 여호와의 선의를 계속 가지는 것은 무엇에 달려 있었읍니까? (ㄴ) 예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자기가 더는 그들 사이에서 목수 노릇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셨읍니까?
14 예수께서는 자기가 여호와의 선의 즉 은혜를 계속 가지기 위하여는 이사야 61:1-3에 명시된 대로 자기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명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아셨읍니다. 그는 그리스도로서 자기가 기름 부음을 받은 것과 기름 부음을 받은 것에 수반된 거룩한 사명을 인정하셨읍니다. 그는 이 사실을 그가 삼십년 동안이나 자란 ‘나사렛’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하셨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자기가 지난 6개월 이상 그들 사이에서 목수 노릇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하셨읍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이러합니다.
15 “그리고 그는 그가 자라나신 곳인 ‘나사렛’으로 오셨다. 그리고 안식일에 그의 습관에 따라 그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읽으려고 서셨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그에게 드리니, 그는 그 두루마리를 펴서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내셨다. ‘여호와의 영이 내 위에 있다. 왜냐 하면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도록 그가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보내셔서 포로들에게 석방과 소경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전파하고, 눌린 자들을 석방시켜 보내며, 여호와의 받아들이실 만한 해를 전파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의 눈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그 때에 그는 그들에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이 성귀가 오늘 성취되었읍니다.’”—누가 4:16-21, 신세; 마태 2:21-23; 4:12, 13.
16, 17. (ㄱ) 예수께서는 무슨 언어로 이사야 61:1, 2을 읽으셨을 것이며, 그러나 ‘누가’는 무슨 언어로 읽으신 것으로 인용하였읍니까? (ㄴ) 그러므로 그들 ‘나사렛’ 사람들은 무슨 기간에 살고 있었으며, 그러나 그들은 그 기간으로부터 이익을 취하였읍니까?
16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히브리’ 원어로 된 이사야 61:1, 2의 말씀을 읽으셨을 것이며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의의 해” 혹은 “주의 은혜의 해”에 관하여 읽으셨읍니다. (누가 4:19) 그러나 희랍어로 기록한 역사가 ‘누가’는 예수께서 읽으신 말씀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희랍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여호와의 받아들이실 만한 해”로 읽으신 것으로 말하였읍니다.
17 하여간 예수께서는 ‘나사렛’에서 이 “받아들이실 만한” 해이며 여호와의 “선의” 혹은 은혜의 해가 될 이 특별한 “해”를 전파 혹은 선포할 거룩한 사명을 여호와로부터 받았음을 알게 하셨읍니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이 성귀가 오늘 성취되었읍니다”라고 예수께서 이들 ‘나사렛’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은 이 특별한 “해”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들 ‘나사렛’ 사람들은 바로 그 기간에 살고 있음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들은 그 기간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곧 예수를 회당에서 끌어내어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4:22-30) 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결코 좋은 본이 되지 않았습니다.
18. 기원전 537년에 충성스러운 ‘유대’인 남은 자들은 무슨 일로써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경험하였읍니까?
18 그러면 “받아들이실 만한 해” 혹은 “선의의 해”는 어떻게 시작하였으며 언제 그것이 끝날 것이었읍니까? ‘예루살렘’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기원전 607년 즉 이사야 61:1-3에 있는 ‘이사야’의 예언이 기록된지 백여년 후에 멸망되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성과 ‘유다’ 땅은 기원전 537년 즉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던 충실한 ‘유대’인들이 석방되어 ‘유다’ 땅에 돌아와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70년간 황폐된 채로 있었읍니다. 이제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기름 부음을 받으셨을 때는 ‘하가랴’의 아들인 ‘유다’ 총독 ‘느헤미야’가 재건된 ‘예루살렘’의 성벽을 수리하기 시작한지 햇수로 69“주” 즉 483년이 경과한 때였읍니다. (다니엘 9:24-27) 그러면 그 당시 회복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재건됨으로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경험하였고 그 거룩한 성에 성전이 재건되므로 슬퍼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지 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모형적이었읍니다.
19. (ㄱ) 기원전 537년에는 어떤 중요한 것이 빠졌었읍니까? (ㄴ) 누가 친히 지상에 임재하신 것이 여호와의 선의의 크나큰 증거였으며, 속박된 숭배자들은 무엇을 슬퍼하였읍니까?
19 그것은 참으로 여호와의 선의 즉 은혜의 기간이었으며 슬퍼하는 숭배자들에게 훌륭한 위로의 기간이었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빠졌었읍니다. 그것은 이사야 61:1-3을 지적해서 자기에게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예언된 기름 부음을 받은 선포자의 임재(臨在)가 없었읍니다. 단순한 식물성 기름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인 침례받은 예수께서 이 예언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는 첫째 분이었으며 그러므로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선포’할 수 있는 첫째 분이었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아들이 친히 지상에 임재하실 때 그를 하나님의 약속된 메시야로 받아들일 ‘유대’인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여호와의 선의 혹은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있었겠읍니까! 그러므로 온유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어야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읍니다. 슬퍼하는 숭배자들 즉 황폐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깨끗한 숭배가 더럽혀져 있는 상태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이 있어야 하였읍니다. 또한 고대 ‘바벨론’의 속박이 아니라 부패된 종교 제도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포로들이 있었읍니다.
20. (ㄱ) 이사야 61:1-3이 여호와의 백성에게 성취되려면 물질적 안녕이 아니라 무엇이 수행되어야 하였읍니까? (ㄴ) 그 성취는 그들과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오는 것이 목적이었읍니까?
20 예수의 동족의 물질적 안녕이 이사야 61:1-3의 성취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읍니다. 거기에 들어 있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의 사명은 영적인 방법으로 성취시키는 것이었읍니다. 물질적인 것보다 더 필수적인 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선의가 나타날 필요가 있었읍니다. 기원전 537년에 있었던 바와 같이 고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압제적인 종교의 속박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는 것이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아들 예수를 통하여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제공하신 것이었읍니다. 이교 ‘로마’ 제국의 예속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그 형벌인 죽음의 예속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베푸실 은혜였읍니다. 이러한 것들이 슬픔을 그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며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찬양할 참다운 것들이었읍니다. 그러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들 해방된 경건한 사람들의 풍부한 생활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심으신 큰 나무와 같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었읍니다.
21. (ㄱ) 메시야를 통하여 “여호와의 선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읍니까? (ㄴ) 기원 33년 오순절 때부터 그들은 무슨 일을 할 사명을 받았읍니까?
21 “여호와의 선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읍니까? ‘유대’ 민족이 아니었읍니다. 그들에게 이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널리 열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읍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들, 종교적으로 슬퍼하는 자들, 거짓 종교 제도의 포로가 되어 있음을 느낀 자들, 즉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예수의 침례받은 추종자들이 된 이러한 자들이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었읍니다. 이들이 또한 그들의 영적 머리이며 인도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었읍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다른 온유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말해 주고 거짓 종교의 소경된 포로들을 석방시켜 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므로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는 예수와 같은 사명을 받았읍니다. 기원 33년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서 다시 연합한 예수의 추종자들 위에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여호와의 선의 즉 은혜가, 스스로 의로운 체 하는 믿지 않는 민족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있음이 기적의 증거로써 나타났읍니다.—사도 1:12-2:47.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
22. (ㄱ) 예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추종자들은 왜 “선의의 해”를 선포하는데 열정적이었읍니까? (ㄴ) 그 선의는 얼마나 되는 기간으로 제한될 수 있었으며, 그러므로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읍니까?
22 메시야 예수의 충실한 이들 기름 부음을 받은 추종자들은 “여호와의 선의의 해”의 선포에 매우 열정적이었읍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신원(伸怨)의 날”이 올 것을 알았으며 그러므로 이것은 “선의의 해”가 제한된 기간이며 바로 그들 세대 안에 끝날 것임을 알았읍니다. 예수께서 기원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설명하실 때에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부언하셨으므로 참으로 제한된 기간을 분별해야 하였읍니다. (마태 24:34) 남은 때가 제한되었음을 인식한 비슷한 사실이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성령받는 것을 관찰한 3천여명의 ‘유대’인들에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외침으로 나타났읍니다. (사도 2:37-40) “선의의 해”의 길이가 인간 세대의 길이로 제한될 수 있었으므로 그 “해”는 매우 짧았읍니다. 이 사실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지체없이 “선의의 해”로부터 이익을 취해야 할 이유가 되었읍니다. 지체한다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었읍니다.
23. (ㄱ) 누가 21:22, 23에 있는 예수의 예언에 의하면, 여호와의 선의가 끝난다는 것은 무엇의 시작을 의미하였읍니까? (ㄴ) 이와 일치하게, ‘바울’은 ‘유대’인 박해자들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23 하나님의 선의가 끝난다는 것은 그의 진노가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읍니다. 예수께서 ‘로마’ 군대가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킬 것을 예언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누가 21:22, 23)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신원의 날” 즉 복수의 날을 선포할 그의 사명을 성취시키고 계셨읍니다. 그것은 그의 “선의의 해”로부터 이익을 취할 것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원 즉 복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그의 선의와 은혜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대신 그들에 대한 적의를 더욱 증가시키는 일을 하였읍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박해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며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데살로니가 전 2:16) 그리하여 위선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인체 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신원의 날” 즉 복수의 날에 멸망을 받을 자들이었읍니다.
24. “선의의 해”에, 하나님의 태도는 ‘바울’이 로마 10:1-4에 기록한 것에 어떻게 반영되었읍니까?
24 하나님의 “선의의 해”에,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인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반영되었읍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선의, 신세]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 10:1-4.
25. ‘바울’이 나타낸 마음의 선의에 대한 ‘피시디아·안디옥’의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읍니까?
25 사도 ‘바울’이 자기의 동족에게 마음의 선의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피시디아·안디옥’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그들이 구원의 소식을 받아드릴 태도를 갖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은 이러하였읍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행하노라.” (사도 13:45, 46) 이들 반대하는 ‘유대’인들 중의 얼마는 틀림없이 기원 70년에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갔었을 것이며, 거기서 멸망을 면치 못하였었을 것입니다.
26. 한 날을 한 해에 비교하는 것 같이 “신원의 날”은 길이에 있어서 “선의의 해”와 어떻게 비교됩니까?
26 한 날이 한 해보다 짧은 것 같이, 기원 70년 봄과 여름에 있었던 “신원의 날” 즉 복수의 날은 기원 29년에 메시야가 나타나신 때부터 기원 70년에 ‘예루살렘’의 포위가 시작된 때까지 선의의 기간 40년에 비하여 짧았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더 긴 하나님의 선의의 기간도 우연히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끝났읍니다. 그의 “선의의 해”는 그의 신원 즉 복수를 집행하시는 때보다 길었으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참고 견디시는 분이신가를 명백히 해 줍니다.
27. 무슨 기간의 끝이 매우 가까왔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고 견디심을 어떻게 생각해서는 안됩니까?
27 하나님께서 그의 신원 즉 복수를 나타내시는 것을 그의 정하신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하여 우리는 그의 참고 견디심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의 참고 견디시는 목적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목적과 일치하게 그 기회로부터 이익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공언한 ‘로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것을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로마 2:4)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결정과 행동은 지금 매우 긴급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의 “선의의 해”의 끝이 매우 가까운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104면 삽화]
‘나사렛’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 61:1, 2을 낭독해 주심으로써 자기의 사명이 “여호와의 선의의 해”를 선포하는 것임을 알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