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밝아지는 의인의 길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 는 돋는 해 아침 빛 같[으니라.]”—사무엘 하 23:3, 4.
1. 사무엘 하 23:3, 4은 우리로 무엇을 기대하게 하며, 그것은 이루어졌읍니까?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종들의 길에 비추인 빛은 계속 증가해 왔읍니다. 지상의 사태 발전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여호와]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음을 알려 준, 그 중대한 해인 1914년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읍니다. (계시 11:15)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빛은 “구름없는 아침”의 햇빛처럼 비추어져 여호와의 종들이 밟아야 할 길을 한층 더 뚜렷하게 밝혀주었읍니다.—사무엘 하 23:3, 4.
2. 우리는 견해상의 일시적인 조정을 어떻게 여길 수 있읍니까?
2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언제나 똑바로 나아간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때때로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이 제시한 설명들은 보기에 이전의 견해를 조정한 것같이 보였읍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항해계에서 “태킹”(바람 머리로 향하는 갈짓자 항해)이라고 알려진 것에 비할 수 있읍니다. 선원들은 돛을 이리 저리 움직임으로써 배가 전후 좌우로 가게 만들지만, 그러는 동안 내내 그들은 역풍에도 불구하고 행선지를 향해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들의 바라보는 그 목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베드로 후 3:13.
3. 여호와께서 그분의 증인들을 계속 축복하고 계시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3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의 감독을 받는 증인들의 전세계적인 활동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속 축복하고 계심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이 점을 그 열매들을 보고 알 수 있읍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날 단 한 백성 즉 ‘여호와의 증인’의 연합된 전세계적인 사회에서만 그러한 의의 열매를 국제적으로 볼 수 있읍니다.—마태 7:17.
4, 5. 자신의 영감받은 말씀에 더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데 어떤 다른 도구를 사용해 오셨읍니까?
4 우리가 지상 어느 곳에 살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우리의 길에 빛이요 우리의 행실 및 믿음의 행로에 등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시 119:105) 그러나 모든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들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돕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자들로 구성된 보이는 조직 즉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도 마련해 주셨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이러한 통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성서를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없을 것입니다.—사도 8:30-40, 비교.
5 하나님의 통로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이 자신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제 때에 영적인 자양분을 마련해 줄 것이며, 이 “종”에게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맡기시겠다고 하셨읍니다. (마태 24:45-47, 신세)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11-16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확한 지식에 있어서 일치점에 도달하고 온전한 영적 장성을 얻도록 돕기 위해 그리스도인 회중에 사도들 및 예언자들과 같은 영감받은 도구들 뿐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 목자들 및 가르치는 자들도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또한 고린도 전 1:10; 빌립보 1:9-11 참조.
6. 어떠한 요소들 때문에 때때로 견해들을 재검토해 보는 것이 필요하였읍니까?
6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해 있는 이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백성을 인도하고 강화하고 감독하도록 사용되어 왔읍니다. 빛이 비취는 것이 점진적이고 인간의 불완전성 및 약함으로 인한 실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견해 및 가르침을 재검토해야 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연단되고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았읍니까? 몇가지 예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대속과 여호와의 이름
7. ‘성경 연구생’들이 대속의 가르침을 그토록 돋보이게 한 이유와 그 근거는 무엇이었읍니까?
7 1878년에, 나중에 ‘왙취타워’ 협회의 초대 회장이 된, ‘찰스 T. 러셀’은 대속의 쟁점으로 인해 「아침의 전령」의 공동 편집자인 ‘N. H. 바버’와의 관계를 끊었읍니다. ‘바버’씨는 죄를 제거하는 힘이 있는 예수의 희생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였읍니다. 그 때 이후로 상당 기간 당시 자신들을 ‘성경 연구생’이라고 부른 이들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속을 성서의 주된 가르침으로 고려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을 통한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에 강조되어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읍니다. (요한 3:16; 사도 4:12; 히브리 5:9; 계시 7:10) 예수의 대속 희생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일 및 ‘모세’의 율법 하의 제물에 의해 예언적으로 전영되었읍니다. 그것은 또한 예언자들에 의해 예언되기도 하였읍니다. 그래서 ‘성경 연구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하신 일을 크게 강조하였읍니다.—누가 24:25-27, 44.
8. (ㄱ) 그 다음에 무엇이 더 큰 중요성을 띠고 있음이 밝혀졌읍니까? (ㄴ) 이로 인하여 어떠한 일이 있게 되었으며, 그 후 수십년 동안 어떠한 조정이 있게 되었읍니까?
8 그러나, 성서는 우리 개인의 구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사단’이 ‘에덴’에서 반역했을 때 의문을 불러 일으킨 여호와의 우주 주권과 관련된 큰 쟁점입니다. (창세 3:15; 고린도 전 15:24, 25; 계시 11:15; 12:10)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의 입증을 요합니다. 참으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전체 주제는 ‘메시야’ 왕국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 영광스러운 이름은 영원토록 입증되고 드높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되고야 말리라’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을 약 75회나 읽게 됩니다.a 때가 되어 그분의 증인들은 피조물들이 그분의 이름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기초로 여호와 하나님께 탄원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로마 10:13, 신세 참조; 요엘 2:32; 스바냐 3:9) 그래서 수년 동안 여호와의 이름과 그 이름의 입증이 매우 두드러지게 되었기 때문에 ‘증인’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과도한 강조로 인한 문제에 불과하였읍니다. 최근 수십년간 「파수대」를 정기적으로 읽어 온 독자라면 잘 인식하듯이,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 있어서의 예수의 역할에 합당한 영예를 돌려 왔읍니다. 참으로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수석 대행자’이신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히브리 2:10, 신세; 12:2; 계시 19:10.
9. 과학적인 발전을 지배하는 어떠한 원칙이 여기에 적용된 것 같습니까?
9 그러한 조정들은 과학적 진리의 발전을 지배한다고 일컬어진 하나의 원칙을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원칙은 이렇게 작용합니다. 먼저, 쉽사리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명제가 정해집니다. 그것은 계몽 혹은 실질적인 적용을 위한 큰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후 때가 되어 그것에 어떤 결함이나 약점이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에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명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읍니다. 그 후, 그 쪽 역시 전체 진리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양편에서 근거가 확실한 점들을 결합시키는 일이 있게 됩니다. 이 원칙이 잠언 4:18이 성취되어 온 방법에도 재삼재사 적용되어 왔읍니다.b
행실과 전파 활동
10, 11. 순서적으로 어떠한 두가지 입장이 강조되었으며,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10 점진적인 이해의 또 다른 예를 고려해 보십시오. 약 40년 동안 ‘성경 연구생’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 성품을 배양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읍니다. 그들은 그러한 배양을 “인격 개발”이라고 불렀읍니다. 그 점이 그토록 강력하게 강조된 이유는 그 점이 그리스도교국 내에서 무시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함으로써 증거하는 일도 해야 하였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부차적인 것이었읍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의 이름의 중요성과 그분의 이름 및 왕국을 위해 증거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이제 그 점을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배양하는 일에는 주의를 보다 덜 기울이게 되었읍니다. 예수께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증거하기 위해 오셨으므로 전파 사업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이 있게 되었읍니다. 두가지 입장 사이에 균형을 잡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읍니다.—로마 10:10; 갈라디아 5:22, 23.
11 오래지 않아, 적절하게도 그러한 균형을 잡게 되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배양하는 일과 여호와를 위해 담대하고 충실하게 증거하는 일 두가지를 다 해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이 두가지 요구 조건은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 일을 행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른 한쪽을 경시할 수 없읍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는 또 이렇게도 말하였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린도 전 9:16, 27.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한 복종
12, 13. (ㄱ) 로마서 13:1의 “더 높은 권력들”에 대해 처음에는 어떠한 견해를 취하였읍니까? (ㄴ) 이로 말미암아 어떠한 정 반대의 견해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렇지만 어떠한 뚜렷한 유익이 있었읍니까?
12 로마서 13:1-7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된 일도 정확한 견해를 향한 “항해”의 또 다른 예가 됩니다. 초기의 ‘성경 연구생’들은 “더 높은 권력들” 즉 “위에 있는 권세들”이란 이 세상 정부의 통치자들을 말한다고 올바로 이해하였읍니다.—흠정역과 개역 한글판 비교.
13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 생겼읍니다. 즉 그러면, “더 높은 권력들”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는가? 한동안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그 혼란스러웠던 수년간의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것은 적어도 그들로 ‘사람보다 통치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강화시켜 주었으며, 동시에 전세계에서 담대한 그리스도인 중립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게 해 주었읍니다. (사도 5:28, 29)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첫째가는 충성을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와 그분의 ‘메시야’ 왕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분들이 우리가 ‘공세와 국세를 바치고 존경해야’ 할 “위에 있는 권세들”이십니까?—로마 13:7.
14. 세상의 정부 권세들에 대한 복종의 문제가 어떻게 최종적으로 참다운 빛 가운데 밝혀지게 되었읍니까?
14 다행히도, 1962년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상대적 복종의 원칙에 대한 이해를 얻도록 인도하셨읍니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통치자들을 “위에 있는 권세들”로 순종해야 하며, 이들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자” 즉 종임을 기꺼이 인정해야 함이 밝혀졌읍니다. (로마 13:4) 그러나, 이들 “권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할 것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당시까지만해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13:1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 복음 22:21에 기록된 예수의 이러한 말씀에 의해 제한을 받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러므로, “가이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들을 하도록 요구할 때 그들은 언제나 “‘가이사’의 것”보다 여호와의 법을 앞세워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국 내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것과는 반대됩니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가이사’가 하라고 명령할 때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한 애국자는 그 점을 이렇게까지 표현하였읍니다. “내 조국! ··· 조국은 언제나 올바를찐저. 그러나 옳든 그르든 내 조국.” 그러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들은 예수의 사도들처럼 “우리는 사람보다 통치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마땅합니다”라고 말합니다.—사도 5:29, 신세.
누가 봉사자들 즉 ‘미니스터’들인가?
15, 16. (ㄱ) 누가 하나님의 봉사자들인가에 대한 이해는 오래도록 어떠하였읍니까? (ㄴ) 어떠한 조정이 있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ㄷ) 그러나 이 조정에는 어떠한 결함들이 있었읍니까?
15 점진적인 계몽의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면,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헌신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다 봉사자 즉 ‘미니스터’들인가에 대한 질문이 있읍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회개하고 전환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실천하고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신 대로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그분께 헌신하고 침례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참으로 봉사자 즉 ‘미니스터’들이라는 견해를 가졌읍니다. 그러나 그 후 일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였읍니다. 정부 권세들이 종종 이러한 신분을 인정해 주지 않았읍니다. 또한 많은 언어에는 “미니스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으므로 그 단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었읍니다. 또한, 침례를 적절한 ‘미니스터’ 임명식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이 과연 “미니스터”라는 칭호를 회중 내의 직책에 임명된 사람들 즉 장로들과 “집사” 곧 봉사의 종들에게만 국한시키게 하는 확고한 이유들이었읍니까?
16 사실상, 나라의 법은 대개 각 종교 조직에게 어떤 사람을 그 조직의 봉사자 즉 ‘미니스터’로 삼는 데 필요한 요구 조건들을 결정하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신분을 인정해 주지 않거나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언어에 “미니스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는 점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실로 인하여 그러한 단어가 있는 언어들—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것이 온당한 목적에 쓰인다면, 그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안됩니다.
17, 18. 누가 참으로 “미니스터”라고 불리울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어떻게 여겨야 합니까?
17 “미니스터”라는 말은 유용한 단어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유의 “종” 즉 숭고하고 특별한 봉사의 임명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자기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대한 좋은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고, 자신의 생활을 성서의 원칙과 일치하게 틀잡았고, 또한, 마태 복음 28:19, 20의 예수의 명령과 일치하게 헌신하고 침례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으로 하나님의 봉사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사람이 신학교에 다녔지만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고 자기의 생활을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 조건과 일치하게 틀잡지 않은 사람들 중의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변호할 자격을 더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나는 나의 봉사의 직무를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하고 말할 수 있읍니다.—로마 11:13, 신세.
18 “미니스터”라는 단어가 어떤 직함이 아니라 묘사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마태 20:28, 비교)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침례받기 위한 단계들을 밟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개개인은 자신의 봉사의 직무 즉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거룩한 봉사”를 자기 인생의 첫째가는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가 자기로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봉사의 직무에 바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봉사자라고 부르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봉사자들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은 부당할 것입니다.—로마 12:1, 신세; 디모데 후 4:5.
19. (ㄱ) 그러한 이해의 발전으로 인한 결과로 어떠한 일이 있게 되었으며,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어떠한 축복을 받았읍니까? (ㄴ)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여호와의 마련은 어떠한 것이며, 우리는 왜 반드시 그것을 택해야 합니까?
19 물론, 말하자면, “태킹”과 관련된 이러한 이해의 발전은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과 연합한 사람들에게 종종 충성의 시험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과 그것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보다 온전한 인식을 향한 발전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조직에 밀접히 머물러 온 사람들은 의문들 및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언제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명확해졌음을 경험해 왔읍니다. 그리고 빛이 점점 더 뚜렷이 비추임에 따라, 그 방법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케 하고 만족스러운 것임이 증명됩니다! ‘베드로’는 일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실족하였을 때,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하였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한 6:6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계시며 오늘날 지상에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의 조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으로 묘사하신 “좋은 나무”와 같습니다. (마태 7:17) 이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택할 수 있는 길이란 오직 ‘사단’의 정치적 “짐승” 및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벨론’”과 연합하는 것뿐입니다. (계시 13:1; 17:5) 그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헌신한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베드로 후 2:22; 요한 14:6.
20. (ㄱ)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돋는 ··· 빛”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점증하는 빛의 길을 선택한 모든 사람들 앞에는 어떠한 행복한 장래가 놓여 있읍니까?
20 참으로, ‘의인을 위하여 빛은 뿌려’졌읍니다. (시 97:11) 잠언 4:18의 “의인의 길”은 점점 더 밝게 비추이는 빛과 같다는 면도 성취되고 있읍니다. 때때로 얼마간 조정이 있게 되면, 그 결과로 언제나 상태가 개선됩니다. 연단은 헛된 적이 없읍니다. 지금 통치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백성이 즐기고 있는 계몽은 “돋는 해 아침 빛 같”습니다. (사무엘 하 23:3, 4; 마태 25:31) 여호와의 보이는 통신 대행 도구인 “충실하고 사려깊은 종”과 함께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으로 은총을 받고 있읍니다! 그들은 현명한 선택을 하였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길은 귀중한 목표인, 여호와께서 창조하고 계시는 새질서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이사야 65:17, 18; 66:22.
[각주]
a 「에스겔」서에만도 약 60회; 또한 출애굽 6:7; 신명 29:6; 이사야 49:23; 요엘 3:17 및 기타의 성귀들에도 나온다.
b 이것은 ‘테제’(명제), ‘안티테제’(반대 명제) 및 ‘진테제’(둘을 결합한 것)라 일컬어져 왔다.
[24면 네모]
현재 여호와의 종들은 연구와 경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올바로 균형잡힌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의 입증은 피조물의 구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
증거 활동에 열심을 나타내는 것과 영의 열매를 맺는 것은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
세속 권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상대적인 복종이라는 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여기든 참으로 여호와를 대표하는 봉사자들로서의 그들의 신분이 영광스럽다는 점.
[21면 도해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바람 머리로 향하는 ‘태킹’ 항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