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양떼”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는 일
“여러분 자신과 온 양떼에 유의하십시오.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임명하여 하나님의 회중, 즉 그분이 자기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치게 하였읍니다.”—사도 20:28, 신세.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양으로 비유하신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큰 염려를 나타내셨읍니까?
세상에서 위대한 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인간 가족 성원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분은 또 없읍니다. 그분은 자기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양”으로 비유하셨읍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목자로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 즉 생명을 바치셨읍니다. (요한 10:11, 27) 예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되신 후에 자기의 사도 ‘시몬 베드로’에게 이들 “양떼”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을 인상깊게 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하셨읍니까? 참으로 ‘베드로’가 그의 나머지 생애 전체를 통하여 자극을 받을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2. (ㄱ) 요한 복음 21:15-17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께서 물으신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읍니까? (ㄴ) 이 때 예수께서는 무엇을 강조하셨읍니까? 어떻게?
2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하셨읍니다. 그분은 두번이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애정, 신세)하느냐?”고 물으셨읍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받고나서 걱정이 되어 주께 이렇게 강조하였읍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애정, 신세)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과 애정을 잘 알고 계셨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도가 그것을 오랜 세월을 통하여 증명하는 것이었읍니다. 어떻게? “양들”에 대한 염려를 나타냄으로써입니다. 매번 ‘베드로’가 예수의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한 후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하셨읍니다. (1) “내 어린 양을 먹이라.” (2) “내 양을 치라.” (3) “내 양을 먹이라.” (요한 21:15-17) 이렇게 해서 예수께서는 “양들”에 대한 자기의 개인적 염려뿐 아니라 그들을 돌보아야 할 ‘베드로’의 미래의 무거운 책임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그렇게도 강조하신 점을 이행해야 하였읍니다.
3. (ㄱ) ‘베드로’는 “선한 목자”에 대한 그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냈읍니까? (ㄴ) “양떼”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베드로’만이 아니었음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읍니까?
3 그것은 ‘베드로’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읍니다. 예수의 말씀이 그 사도의 마음 깊숙히 새겨진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읍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증거로서 “양떼”를 먹이는 일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그리고 성실하게 “양떼”를 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약 30년 후에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읍니다. “하나님의 양떼”의 일부인 그들에게 그는 열매 없는 그들의 이전 행실로부터 구출된 점을 상기시켰읍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읍니까? 은이나 금과 같은 일반적인 것을 근거로 산 것이 아니라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근거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 전 1:1, 18, 19) ‘베드로’는 그것이 얼마나 비싼 값인가를 인식하였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속하도록 이 땅에 독생자를 보내시어 희생시키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마태 20:28; 요한 3:16) ‘베드로’가 그의 첫째 편지를 썼을 때에는 “양떼”의 구속(救續)된 성원들의 수가 수천명으로 증가하였었읍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베드로’가 자기의 힘으로 돌볼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양들”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함께 “양떼”를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다른 자격있는 사람들이 생겼읍니다. 이들도 “양떼”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인식하였읍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고 치도록 책임을 받은 수만명에 달하는 영적 아랫목자들도 이 점을 온전히 인정합니다.
4.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회중에 있는 연로자들에게 편지할 때 양치는 일에 대하여 어떠한 적절한 충고를 하였읍니까?
4 ‘베드로’가 영감을 받아 첫째 편지를 쓸 때 그는 틀림없이 예수께서 “양떼”를 치는 데 대하여 자기의 머리와 마음에 그렇게도 인상 깊게 하신 것을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의 교훈이 다만 제 일세기 아랫목자들에게 뿐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영적 연로자들에게 한 것으로 분명히 알 수 있읍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썼읍니다. “나는 여러분 중의 장로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을 같이 누릴 자로서 권합니다. 여러분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떼를 먹이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부정직한 이득, 신세]을 탐해서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시오. 여러분이 맡은 자들을 지배하러 들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될 것입니다.”—베드로 전 5:1-4, 새번역.
“하나님의 양떼”를 사랑으로 돌봄
5. (ㄱ) 그리스도인 감독자가 “양떼”에 대한 그의 책임을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ㄴ) 오늘날의 감독자도 왜 ‘베드로’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읍니까?
5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양떼”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는 중요성을 강조하도록 감동되었읍니다.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지로 그러한 염려를 나타내신 것처럼 “양떼”를 치는 모든 사람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억지로 섬긴다고 느끼는 그리스도인 감독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 오늘날 임명받은 어떤 장로도 그가 압력을 받아 섬긴다고 느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특권받은 책임을 이행하는 데는 많은 일이 관련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랑을 가진 아랫목자는 도움을 베풀고 섬기려는 욕망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겸손함과 고난을 견디려는 자진성을 나타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지셨던 같은 정신적 태도를 가졌을 때에만 그러한 정신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 2:5-8; 베드로 전 4:1) 만일 장로가 자신도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양떼”의 일부이며 어떤 인간 앞이 아니라 그분과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는 열심히 아무런 불평 없이 섬길 것입니다. (베드로 전 2:25) 오늘날의 감독자들은 그들이 ‘베드로’처럼 예수께서 고통당하시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생애와 전도 봉사에 관한 자세한 성서 기록을 갖는 은혜를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베드로’와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있고 “양떼”를 치는 문제에 관한 한 그 사도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읍니다.
6. 감독자들은 “양떼”를 다루는 데 있어서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까?
6 그리스도인 아랫 목자가 올바른 본이 되기 위하여는 부정직한 즉 이기적인 이득을 얻으려고 하거나 부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장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형제들과 어울려서 접근하기 쉽고 그들의 영적 관심사를 섬김으로 오게 됩니다. 본이 되는 장로들은 “양떼”가 아들의 피로 사신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앎으로 “맡은 자들[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들, 신세]을 지배하러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 아랫목자들은 “양떼”를 부드럽게 보호하는 손길로 다루어서 선한 목자의 충고와 본을 따릅니다.—마태 20:25-27; 디도 1:7; 대조 에스겔 34:2-4; 유다 16.
7. 많은 감독자들은 어떠한 면으로 “양떼”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나타냅니까?
7 오늘날 그리스도인 감독자들 절대 다수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양떼”에 대한 올바른 염려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각자에게 개인적 관심을 기울이고 회중 집회를 주재함으로 “양들”을 먹이는 데 바치는 시간과 노력은 그들을 동료 신자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게 합니다. (디모데 전 5:17) 또한 성실한 아랫목자들이 양같은 사람들을 찾아서 제자를 삼기 위하여 야외 활동에서 훌륭한 본을 보이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보십시오. (마태 28:19, 20; 디모데 후 4:5) 또한 세상적 요소와 “양떼”를 약탈하려는 자들로부터 “양떼”를 보호함으로 나타내는 염려는 어떠합니까? (에베소 4:11-14; 골로새 2:8; 유다 22, 23) 이러한 면으로 그리고 그외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양떼”는 그들의 영적 복지를 위하여 사랑의 염려로 그들을 치는 자들로부터 유익을 얻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가치있는 교훈
8. 사도 ‘바울’은 영적 격려가 되게 하기 위하여 ‘에베소’의 연로자들을 위하여 어떠한 마련을 하였읍니까?
8 제1세기 감독자들이 “양떼”의 유익을 위하여 수행한 일들에 관한 성서 기록을 읽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훌륭한 본으로 감명을 받게 됩니다. 그도 ‘베드로’가 한 바와 같이 연로자들을 격려하였읍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로부터 연로자들을 소집하였읍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바울’과 함께 얼마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마치도 오늘날의 감독자들이 주기적으로 모여서 도움이 되는 경험담을 나누고 서로 믿음을 강화하며 성경적 교훈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9. 사도 행전 20:18-21의 기록은 ‘바울’이 어떻게 자기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알려 줍니까?
9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의 감독자들과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얼마의 가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읍니다. 사도 행전 20:17-38의 기록은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연로자들을 포함해서 형제들에게 세워 놓은 본의 종류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갖게 합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역 여러 곳을 여행하는 것만 즐기는 한가한 봉사자였읍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겸손과 눈물”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자기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었읍니다. (사도 20:18, 19) 그는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 없이 가르쳤으며,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는 이웃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두려워하거나 반대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바울’은 그 구역에서 철저히 증거하였읍니다.—사도 20:20, 21; 비교 사도 19:1-20:1; 고린도 후 1:8-11.
박해하에서 양을 치는 일
10. 오늘날 많은 감독자들은 어떻게 ‘바울’의 본을 따라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양떼”를 돕기 위하여 기꺼이 노력합니까?
10 이제 이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하였으며, 그곳에서는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운을 잃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기의 충실한 길을 마치고 자기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봉사를 마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생명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읍니다. (사도 20:22-24) 이것은 ‘에베소’ 감독자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본이 되었겠읍니까! ‘바울’이 염려한 것은 “좋은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줄 책임을 가진 각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였읍니다. 이것이 오늘날 임명받은 그리스도인 장로들 모두가 또한 가져야 할 염려가 아닙니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바울’의 본을 따라 “좋은 소식”을 위하여 그리고 형제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격렬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충실한 많은 아랫목자들은 “양떼”와 함께 충성스럽게 머물러 왔읍니다. 이러한 책임있는 자들이 그러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나라들로 이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였읍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이미 여러 해 동안의 투옥 생활의 경험을 가졌고 잔인한 고통을 당한 일이 있는 한 장로가 ‘왙취 타워’ 협회 지부 임원을 위한 강습을 받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에게 현재 박해가 없는 나라로 갈 기회가 열렸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돌아가면 투옥과 격렬한 박해가 있을 것이 분명한, 이전에 그가 섬기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였읍니다. 그는 그렇게도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 아랫목자들이 느끼는 것처럼 “양떼”를 돌보는 것을 자기 개인의 자유보다도 더 귀중한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러한 감독자들은 칭찬을 받을 만합니다. 그들이 계속 ‘고난당하는 양들’을 돌보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비교 이사야 32:1, 2.
11. (ㄱ) 사도 행전 20:25-27의 내용으로 볼 때 피흘리는 죄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어떠하였으며, 오늘날 감독자들은 어떻게 비슷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읍니까? (ㄴ) 이해할 만하게도 감독자들은 그들이 처음에 도와서 제자가 되게 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느낍니까?
11 ‘에베소’에서 ‘바울’의 ‘왕국 전파’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는 이제 감독자들이 되었읍니다. 그들은 직접 ‘바울’의 입술로부터 소식을 들었읍니다. 그는 그들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선포하는 데 그의 마음을 온전히 쏟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양심은 깨끗하였읍니다. 그가 증거하는 일을 소홀히 하여 피흘린 죄를 지었다는 고발을 당할 이유가 없었읍니다. (사도 20:25-27) 그러므로 오늘날 널리 선포되어야 할 왕국 증거 사업을 완수함에 있어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이 때에 감독자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오늘날 감독자들은 많은 일이 그들의 솔선 인도의 열성스러운 본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도 피흘리는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깨끗함을 지키려고 합니다. 회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악인들에게 경고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찾아내는 일에 솔선수범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러한 동료 신자들은 그들의 훌륭한 본을 따르도록 격려를 받습니다. ‘바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처럼 오늘날 “양떼”를 형성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구역에서 증거하던 감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전도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제는 회중 안에 있으며, 감독자들은 그들에 대하여 더욱 더 큰 염려를 나타냅니다.—데살로니가 전 1:5, 6; 2:7, 8.
12. 우리는 사도 행전 20:28에 있는 ‘바울’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2 ‘에베소’의 연로자들과 그들이 돌보아야 할 “양떼”에 대한 ‘바울’의 큰 염려를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 알 수 있읍니다. “여러분 자신과 온 양떼에 유의하십시오. 그들 가운데서 성령이 여러분을 감독자로 임명하여 하나님의 회중, 즉 그분이 자기의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치게 하였읍니다.” (사도 20:28, 신세) 이들 각자는 “양떼”를 치는 일과 관련된 심각한 책임을 생각할 때 반성의 필요성을 분명히 느꼈읍니다. 또한 이들 감독자들은 연로자의 회로서 ‘바울’의 충고를 적용할 필요가 있었읍니다. 그들은 “양떼”를 돌보는 데 협력하고 함께 일해야 하였읍니다.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그들 사이에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연합이 있어야 하였읍니다. 이것 자체가 그들이 “양떼”에 대하여 깊은 염려를 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3. 오늘날 사도 행전 20:28을 적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13 오늘날 그리스도인 연로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바울’의 훈계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입니다! 흔히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회중 장로들과 모임을 가질 때 사도 행전 20:28에 기록된 말씀이 건전한 충고의 기초가 되어 왔읍니다. 그 내용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만 유의하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각 회중에 있는 장로들의 회 전체가 “양떼”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을 돌볼 책임을 가지고 있읍니다. 각 장로에게 이 총괄적인 목적에 기여하는 특정한 임명이 있는데도 그러합니다. 감독자들은 “양떼”가 여호와께서 참으로 비싼 값을 치루고 사신 매우 귀중한 것임을 인정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사랑의 염려로써 그들의 양치는 책임을 성취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에베소 1:7.
배교적 “이리”를 경계하는 일
14. (ㄱ) 사도 행전 20:29, 30에는 어떠한 경고가 있읍니까? (ㄴ) ‘바울’이 ‘에베소’ 감독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왜 시기적으로 적합한 것이었읍니까?
14 ‘바울’은 자기와 그외 사도들이 죽은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경고를 하였읍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 20:29, 30) 나중에 사도 ‘베드로’는 기회주의자들과 그리고 방심한 자들, 무지한 자들, 주관이 없는 자들을 끌어내어 분파를 조장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경고하였읍니다. (베드로 후 2:1-3; 3:15, 16) 사도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들이 그러한 경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였었읍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된 배교를 명백히 예언하였고 사실상 그런 일이 일어났읍니다. 그것은 아직도 그리스도교국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읍니다.—데살로니가 후 2:6-10.
15. (ㄱ) 지금 “양떼”를 치는 자들은 왜 깨어 살펴야 합니까? (ㄴ) 때때로 왜 장로들은 로마서 16:17-19에 제시된 지침에 따라 행동할 필요가 있읍니까?
15 이 “마지막 때”에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배교 혹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직접적인 경고를 받고 있읍니다. (다니엘 12:4; 마태 24:9-13) 그러므로 충실한 그리스도인 아랫목자들은 깨어 살피므로 “양떼”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들은 깨어서 “양떼”의 성원들이 나쁜 교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 15:33) 불결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력을 생각할 때 건전한 영적 사고와 태도를 지속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중의 각 성원은 다음과 같은 훈계를 청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브리 13:7) 때때로 연로자가 성경적 충고를 해서 동료 신자들로 하여금, 전체적으로 “양떼”의 영적 유익보다도 이기적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읍니다. ‘바울’이 로마서 16:17-19에서 제시한 굳건한 지침이 그런 경우에 적용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양떼”의 유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
16. (ㄱ) ‘바울’이 때로는 눈물로써 훈계하였다는 사실로 무엇을 알 수 있읍니까? (ㄴ) 오늘날 감독자들은 염려를 나타냄으로 “양떼”를 위하여 무슨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까?
16 ‘바울’은 널리 여행을 하였으므로 그 당시 회중내의 일들에 대한 넓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는 여러가지 문제들과 위험한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그가 ‘에베소’의 연로자들에게 계속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촉구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바울’은 3년 이상이나 눈물로써 계속 그들을 훈계함으로써 그의 사랑과 염려를 나타냈읍니다. (사도 20:31) 그러한 양치는 일에는 감정적 긴장이 관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깨어 살피고 사랑으로써 유의하는 데는 무엇인가 그만한 희생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감독자들도 때때로 특히 처리해야 할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때에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비교 고린도 후 2:4)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가져야할 첫째 염려는 “양떼”를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양떼”가 영적으로 깨끗하고 건강하며 누룩으로부터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히 힘씁니다.—고린도 전 5:6; 갈라디아 5:7-10; 디도 2:1.
17. (ㄱ) 사도 행전 20:32에 있는 ‘바울’의 말에서 어떠한 중요한 점을 배워야 합니까? (ㄴ) 여호와께 사람들과 그들의 관심사를 맡기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얻게 합니까?
17 ‘바울’은 ‘에베소’ 감독자들을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과분하신 친절, 신세] 말씀”에 부탁함으로 그들이 가장 좋은 입장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읍니다. (사도 20:32, 새번역) 오늘날에도 역시 감독자들은 최선을 다하여 충고하고 도움을 베풀고 또는 성경적으로 바람직한 기타 징계를 한 후에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읍니다. 믿음에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심각한 문제를 당하고 있는 환경이라면 기도로 그들과 그들의 유익을 여호와께 맡기고, 그분의 말씀과 영 그리고 조직을 통해 필요한 방향으로 지도를 받게 한다면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임을 알게 되고 이것은 언제나 위안이 됩니다. 그러한 환경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일 것입니다. (비교 베드로 전 2:23) 이것도 또한 “양떼”에 대한 염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실 수 있는 분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8. (ㄱ) 물질적 필수품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본을 따름으로 감독자들은 “양떼”에 대한 염려를 어떻게 나타냅니까?
18 ‘바울’은 명백한 양심으로 자기가 형제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지적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손으로 일을 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자기의 필수품을 돌보는 데 만족하였읍니다. (사도 20:33, 34) 그에게 부족함이 있었을 때 ‘빌립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구한 것은 그러한 선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는 일과 관련된 열매입니다. (빌립보 4:14-17) ‘바울’은 부지런하였으며 부정직한 이득을 위하여 봉사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감독자들도 그들이 게으르거나 어떻게든지 적게 일하려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음으로 훌륭한 본을 세울 수 있읍니다. “양떼”에 대한 그들의 염려는 그들이 회중에 짐이 되는 일이 없게 합니다.—데살로니가 후 3:6-10.
19. 사도 행전 20:35에 있는 원칙과 일치하게 행동함으로 감독자들과 회중 전체에 어떠한 영향이 있읍니까?
19 ‘에베소’ 감독자들은 ‘바울’이 나타낸 그의 생활과 봉사를 살펴보았으므로 약한 자들을 돕고 회중을 세워나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데 본이 되었읍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원칙과 일치하게 행동함으로 현대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본이 되고 있읍니다. (사도 20:35) 그들은 참으로 많이 줄 뿐만 아니라 아낌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들의 끊임없이 주는 일은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성원 모두의 행복에 기여합니다.
‘모든 회중을 위한 염려’
20. ‘베드로’와 ‘바울’은 어느 정도로 “양떼”를 염려하였읍니까?
20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충실한 사도들이 세워 놓은 훌륭한 본은 탁월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들을 바쳤고 다만 한 회중만이 아니라 그들의 형제 전체를 위하여 깊은 염려를 나타냈읍니다. (베드로 전 2:17) 많은 불편과 문제들 및 시련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들은 “양떼”의 영적 복지를 첫째로 염두에 두었읍니다.
21. (ㄱ) 고린도 후서 11:23-28에 의하면 ‘바울’이 경험한 얼마의 “이 외의 일”들이란 무엇이었읍니까? (ㄴ) ‘바울’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염려를 나타냈읍니까?
21 ‘고린도’에 있는 동료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기가 봉사자로서 일하면서 직면했던 일들 즉 매맞고, 투옥당하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여러가지 위험에 처했었던 것을 열거하였읍니다. 그 다음 이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회중, 신세)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린도 후 11:23-28) 우리는 ‘바울’이 당하였던 압력과 “모든 회중”을 위해 그가 느낀 염려를 다만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계속 많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후 4:9-13) 그는 선교 여행길에서 방방곡곡을 다녔고 여러 번 회중들을 다시 방문하였읍니다. (사도 15:36)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그의 활동은 꼭 필요한 것이었읍니다. 그는 긴 시간 연설을 하였고, 정기적으로 회당에서, 공중 장소에서 그리고 집집으로 증거를 하였읍니다. (사도 17:2; 19:9, 10; 10:20) 자기의 물질적 필수품을 돌보고 회중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바울’은 세속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읍니다. (사도 18:1-3; 데살로니가 후 3:8, 9) 이 사도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바쳤으며, 그가 얻은 지식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구성하는 27권의 책들 중 14권의 책을 영감을 받아 기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바울’은 바쁜 사람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였으며 항상 “양떼”에 대한 큰 염려를 나타냈읍니다.
22, 23 (ㄱ)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양떼”를 위하여 어떠한 마련들이 있는지 말하십시오. (ㄴ) 이러한 모든 마련은 무엇의 증거이며, 우리는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아야 합니까?
22 오늘날 “하나님의 양떼”의 유익을 위하여 수행되어야 할 거대한 분량의 일이 있읍니다. 42,000개가 넘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돌보는 데 얼마나 유의해야 하겠읍니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 의하여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이 마련되어 공급되고 있읍니다. (마태 24:45-47)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세움을 받도록 배우고, 숭배하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함께 모이기 위한 회중 집회, 순회 대회 및 지역 대회를 위한 순서가 정기적으로 마련되고 있읍니다. (히브리 10:23-25) 모든 회중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을 돌보도록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보냄을 받아 방문합니다. (비교 사도 16:4, 5) 충고와 격려의 말이 들어 있는 통신문들이 회중과 장로의 회에게 보내집니다. (비교 빌립보 1:1; 베드로 전 5:12; 유다 3) 영적으로 또는 그 외의 “하나님의 양떼”의 유익을 위한 그외 마련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정도입니다.
23 이 일을 하는 데는 굉장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의 증거입니까?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 선한 목자를 통하여 탁월한 양치는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이사야 40:10, 11) 수만명의 아랫목자들이 성령에 의하여 임명되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일에 참여하고 있읍니다. 이 모든 것은 “양떼” 전체에 대하여 또한 “양떼”를 이루는 개개인에 대하여 사랑의 염려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위대하신 목자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드럽게 돌보시기 위하여 나타내신 사랑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함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14면 삽화]
“내 양을 먹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