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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정의와 공의의 하나님파수대—1976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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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식에 의하여 그 감사함이 증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면으로,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그분은 그분의 풍부한 지식과 지혜와 사랑과 일치하게 완전한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니이다]” 하고 말할 수 있읍니다.—시 119:75; 로마 11:33-36.
3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분야를 고려할 것입니까?
32 이에 대한 확신은 왕국 전파의 범위, 새 질서에서의 부활 및 결혼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된 일과 같은 하나님의 미래사에 대한 질문을 대하는 우리의 견해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기사에서, 성서에 비추어서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는 온전한 확신을 근거로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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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라파수대—1976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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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라
1, 2. 친지들은 왜 당신을 어떤 부당한 활동에 초대하지 않을 것입니까?
당신의 직장이나 학교나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부도덕한 영화를 구경하러 가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언급하면서 당신도 그들과 함께 가기를 원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당신을 아는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그들은 ‘그 사람은 초대해도 소용없어. 그런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통하질 않아’ 하고 응답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관심사와 추구하는 일은 마땅히 그러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디모데 후 2:19.
2 그러나 무엇이 이들, 친지들에게 그러한 반응을 보이게 하였읍니까? 그들은 당신의 행동 원칙을 잘 알고 있고 당신이 과거에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관찰하였기 때문에 당신이 그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를 훤히 알 수 있게 하였읍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행로가 항상 의롭고 공의로울 것임을 무엇을 기초로 확신합니까?
3 만일 관찰력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행로를 알 수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하실 것인지를 우리는 더욱 확신할 수 있읍니다. ‘에덴’에서 여호와의 우주 주권과 인류를 다루시는 그의 방법의 의로움에 대한 도덕적 쟁점이 일어났읍니다. 그 쟁점은 해결되어야 합니다. 성서 역사의 지면은 그분께서 그 쟁점을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전진해 오시는 동안 점진적으로 일을 처리해 오신 일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록은 그분께서 언제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알려 줍니다. 또한 그 기록은 여호와께서 따르시는 행로가 항상 의롭고 공의로울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속적인 최선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보증하여 줍니다.
4. 여호와께서 인류가 고통을 겪게 허락하시는 것은 정의와 공의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까?
4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피조물[‘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온 인류]이 허무한 데[죄 가운데 태어나 사망을 직면하는 것]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우리 인간들은 우리에게 죄와 불안전성을 가져다 준 ‘아담’의 죄를 어찌할 수 없다]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아담’이 후손을 낳도록 허락하심으로] 하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 8:20, 2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태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비록 인간들이 생애에서 고통과 애로를 겪을지라도—결코 정의와 공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합당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이 낙원에서 완전한 생명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그들 앞에 제시하였읍니다.
5. 오늘날 우리는 인류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과 관련하여 어떻게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읍니까?
5 오늘날 우리는 특히 은총을 받고 있읍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순종하는 인류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될 하나님의 새 질서의 문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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