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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취해야 할 행동파수대—1982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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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심판관에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집권하신 왕국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입증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지체하지 말고, ‘사단’의 통치가 아직 이 땅에 군림하고 있는 동안 단계를 밟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사랑에 있어 엄밀한 시험이 될 것입니다.—베드로 전 1:6, 7.
15. (ㄱ) 당신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어떠한 질문에 답변할 수 있읍니까? (ㄴ) 시편 146편에서 알려 주는 바와 같이, 당신의 어떠한 행동이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할 것입니까?
15 당신은 살아남은 그 행복한 무리들 가운데 들어 있을 것입니까? 당신은 ‘사단’과 모든 불의에 대항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을 함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한 그분의 왕국 편에 설 것입니까? 당신은 동료 인간들에게 경고하는 데 참여함으로 그들이 악한 세대의 멸망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출할 기회를 갖게 할 것입니까? 그것이 당신의 축복된 몫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음성이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께 대한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합창에 영원히 함께 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시 146:1, 2,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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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하시오’파수대—1982 |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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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하시오’
“침울한 기분이 한번 들더니, 이 기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더군요. 꼼짝도 하기 싫었고 정신을 집중할 수도 없었읍니다. 나는 낙담에 빠져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으며, 나의 전 생애와 하나님께 대한 좋은 봉사 기록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양 생각되기 시작했읍니다. 나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읍니다.” 여러 해 동안 선교인 자매로 일한 바 있는 48세된 ‘증인’은 자기가 겪었던 감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그 때까지는 영육간에 항상 건강했읍니다만, 갑자기 다시는 정상을 회복할 수 없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읍니다.”
장성한 형제 한 사람도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직장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읍니다. 낙담할 대로 낙담해 가지고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식사조차 하지 못하곤 하였읍니다. 나는 식탁을 떠나 내 방으로 들어가 눈물을 흘리곤 했읍니다. 정말이지 나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읍니다. 나는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냈읍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읍니다. 이런 상태가 6개월 동안 계속되었읍니다.”
위의 사람들은 중우울증을 겪었다. 다른 보고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도 여전히 “우울한 영혼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 5:14, 신세) 전세계적인 통계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놀랍게 증가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우울증을 유발하는 상황의 영향을 덜 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 병에서 면제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충실한 종들이 그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나는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예루살렘’의 충실한 왕 ‘다윗’은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다. 자기 자신의 몇가지 잘못 또는 어리석음으로 인한 결과를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종일토록 애곡하며 다닙니다.” (시 38:6, 드위트 역) 다음 ‘페이지’의 별항(别項)에는 수많은 충실한 종들이 때때로 느꼈던 감정 및 그 원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별항에 열거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그들 모두는 충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계속했다.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중에는 환자로서는 거의 속수무책인 것들도 있다. 최근의 의학 연구는 일부 중우울증은 뇌 속의 화학적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뇌의 화학적 불균형은 수많은 신체적 원인들a로 말미암아 유발될 수 있다. 반면에, 우리의 생각만으로도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다. 성서의 한 예는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열렬한 후원자 ‘에바브로 디도’는 우울증에 걸렸다. ‘바울’은 이 종을 ‘로마’에서 그가 이전에 있던 ‘빌립보’ 회중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자기[에바브로 디도]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우울해, 신세)한지라”라는 내용이 특별히 언급된 편지는 아마도 그를 통하여 보내어졌을 것이다. 그가 병에 걸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는 완쾌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의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기 병든 것을 너희[빌립보 회중]가 들은 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우울하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빌립보 2:25-30.
이 헌신한 종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자기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회중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 크게 마음에 걸렸다. 그들을 안심시키고 싶은 열망—그러나 절망적이게도 거리가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이 우울증을 유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에바브로 디도’처럼 주의 사업에 전심전력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 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간절한 염려와 관심 또는, 아마도 다른 사람을 낙심시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다.
‘위안의 말을 하시오’
우울증에 걸린 한 그리스도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전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전 이렇게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불신자인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참는 수밖에 없지 않소!” 이 여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날 자살할 뻔했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명령을 청종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참으로 중요하다! “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하[시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 때로는 복구 불능의 손상이 초래될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를 원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경우가 흔히 있을 수 있다.—데살로니가 전 5:14, 신세.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안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는 말로써 자신이 ‘침울감’에 빠진 적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훌륭한 보고가 그를 위로해 주었다. ‘디도’는 ‘고린도’ 회중의 영적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것과 ‘바울’에 대해 그들이 “열심” 즉 염려, 그리고 “사모함”을 나타내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자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대해 듣고 ‘바울’의 마음은 상쾌해졌다. (고린도 후 7:5-7)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던 한 그리스도인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한 인간으로서 우리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는 이해합니다. 곧 좋아질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얼마만큼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며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겁습니다’라는 말은 들을 필요가 있읍니다.”
“나는 감정이입을 배웠읍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을 한 가지 배웠읍니다.” 우울증에 걸렸던 한 그리스도인 어머니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감정이입을 배웠읍니다. 이전에, 나는 기운을 내어 부지런히 활동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픈 사람들에 대해 동료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읍니다.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나에게 ‘훌훌 털고 일어나’라는 말을 했을 때,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그 당시에 나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읍니다. 그들의 말은 정말 마음을 아프게 했읍니다.” 우울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동료감”을 필요로 한다.—베드로 전 3:8, 신세.
가족과 친구들은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는 40세된 어머니는 이렇게 회고했다.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가족을 위해 하던 일들을 못하는 데 따른 죄책감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이렇게 권고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그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말해 주도록 하십시오. 그를 격려하여 힘을 잃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고무적인 말을 필요로 하고 또 이를 고맙게 여기게 마련이지만,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많은 도움을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자들을 지원해 주시오
‘바울’은 ‘데살로니가’ 회중에게 “우울한 영혼들에게 위안의 말을 하[시오]”라고 했을 뿐 아니라 “약한 자들을 지원해 주고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시오”라고 역설했다. “지원해 주다”라는 말에는 행동이 내포되어 있는데 원 희랍어b의 주된 의미는 다른 사람을 북돋워 주기 위해서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데살로니가 전 5:14, 신세.
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어느 연구 보고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울증을 물리치는 데는 열의나 강한 의지 및 쾌활한 성품보다도 친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친구와 가족이 더 필요할 수 있다.” 유명한 심리학자 ‘L. 캐머’ 박사의 말도 이와 일치한다. “설교조의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참을성 있는 사람이 우울한 사람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그렇다, 전화나 잠간의 방문 등으로, 돕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우울한 사람들은 크게 고맙게 여길 수 있다.
한 그리스도인 여인은 어떠한 치료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답은 이러하였다. “가장 큰 도움은 영적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는 회복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증인’ 회중에는 사랑과 관심 그리고 이해심이 감돌았읍니다. 그것은 마치 보호의 벽과도 같았읍니다.”
물론 우울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때로 정다우면서도 확고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그는 생각이 혼란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함께 산보를 하자는, 어떤 다른 운동을 하자는, 약을 복용하라는, 또는 영적 활동을 계속하라는 등의 부드러운 권고가 필요할지 모른다.
신체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사람에게는 흔히 몇번의 분량 많은 식사가 아니라 적은 분량의 식사가 여러 번 주어진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영적 음식을 주는 데 있어서도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우울한 사람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 줄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에 긴 성서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영적인 ‘좋은 것들’을 간단히 토론하려면 배우자나 관심가진 친구는 진정한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병든 사람이 권고에 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에게 베푼 사랑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병이 자연적으로 치유되거나 의학적 치료가 효험을 나타내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계속 인내와 이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어떠한 의학적 치료도 효과가 없어 보이는 상황이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정신적 및 신체적인 모든 질병을 다가오는 새 질서에서 고치시기까지 이들 병든 자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과 더불어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계시 21:3, 4.
회중의 장로들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인 “교육받은 혀—‘지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가 앞으로 실리게 될 것이다.
[각주]
a 「깰 때이다」 1981년 12월 15일호에서 “그것은 순전히 정신 문제인가?” 기사를 참조할 것.
b ‘안테케스테’—“마주 보고 있으라.”
[22면 네모]
느꼈던 감정 이유
야곱 위로받기를 거절함. ‘계속하여 울었다.’ ‘나는 음부로 아들의,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내려가고 싶다.’—창세 37:35, 신세 참조. 죽음에 대한 슬픔
한나 ‘울고 먹지 않았다.’ ‘마음이 괴로와서 통곡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한 데 대한 심한 실망
—사무엘 상 1:7, 10.
바울 “안으로는 두려움”을 느꼈으며 “실의에 차” 있었다. 반대 및 휴식의 부족
—고린도 후 7:5, 6, 공동 번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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