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있는 양심의 소리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방 사람들도 인간 본성에 따라 율법대로 행한다면 ··· 그들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 속에 씌어져 있다는 것을 ··· 보이고 있읍니다. 그들의 양심이 그 행위를 증언[합니다].”—로마 2:14, 15, 새번역.
1, 2. (ㄱ) 도덕 표준에 있어서 오늘날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ㄴ) 왜 특히 1914년 이래 도덕적 지침이 필요하게 되었읍니까?
오늘날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 항상 변하는 상태입니다. ‘이매뉴얼 뎀비’ 박사는 “공중 도덕”에 대하여 연설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정확한 도덕적 특성을 결정적으로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시대가 커다란 변천기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만 해도 널리 인정된 표준이 변경 혹은 대치되었읍니다. 생활은 더욱 더 복잡해지는데, 새로운 표준이 얼마나 확고한지 혹은 얼마 동안이나 지속할 것인지 누가 말할 수 있겠읍니까? 사람에게는 어떠한 지침이 있읍니까?
2 1914년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가 특히 이러한 사태를 직면하고 있읍니다. 왜 특히 그 때부터입니까? ‘아치볼도 키스홈’ 박사는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사상과 도덕에 발생한 격변은 너무나 커서 일부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 전쟁 기원[61년]에 살고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임을 나타낸다.” 1914년 이래 사상과 도덕에 그러한 격변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지침이 되는 소리, 올바른 지도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3. 양심을 의지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3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많은 사람들은, 결국 각 사람은 자기의 양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그들은 “양심을 지침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양심”이라는 말로서 그들은 각 사람의 속에 있는 “소리” 곧 그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리는 내적 감각이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경우에 사실입니까? 당신은 양심의 근원이 무엇이며 양심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알고 있읍니까? 또한 이 내적 감각은 얼마나 신뢰성이 있읍니까? 다른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의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도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양심—그 근원은 무엇인가?
4. 일부 세상 권위자들에 의하면, 양심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4 지식인들과 철학자들에게 양심의 근원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다면 양심은 단순히 진화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진화론자 ‘차알스 다아윈’의 의견은 이러하였읍니다. “두드러진 사회적 본능을 부여받은 동물은 무엇이나 ··· 그 동물의 지성적 능력이 좋아지거나 거의 인간의 경우와 같이 발전되기만 하면 도덕감 혹은 양심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리고 ‘시그먼드 프로이드’는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원래의—혹은, 선천적인—능력의 암시를 배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5. 성서는 인간의 양심에 대한 그러한 견해를 옹호합니까?
5 그러나 그러한 견해가 참다운 설명입니까? 인간 역사와 행적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일관성있고 믿음직한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우선, 성서는 정확하게도, 정직한 과학적 관찰에 의하여 입증된 사실 즉 모든 생물은 ‘종류에 따라’ 번식한다는 사실을 진술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며 양심도 그러합니다. (창세 1:21-26) 더우기, 성서는 사람 속에 있는 소리 곧 사람의 양심의 근원을 정확히 밟혀 줍니다. 성서는, “나는 소위 양심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괴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겠다”고 호언한 ‘히틀러’와 같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 땅의 사람들이 계속 양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성서는 우리가 양심을 사용하고 양심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읍니다.
6, 7. (ㄱ)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의 근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알려 줍니까? (ㄴ) ‘아담’의 양심은 무엇이었읍니까?
6 성경은 창조주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알려 줍니다. 즉 하나님 자신도 가지고 계시는 지성과 도덕감을 인간에게 주셨읍니다. (창세 1:27) 그리고 처음부터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가 성장해 감에 따라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의 ‘아담’의 행동과 태도에 대한 기록에서 알 수 있읍니다. (창세 2:17) 기록을 보면, 그 때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읍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을 때 즉시 응답하지 않았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그는 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속에, 자기를 단죄하며 자기를 고발하며 자기가 범죄하였다고 증언하는 소리가 있는 것과 같았읍니다—창세 3:7-10.
7 그러므로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은 인간의 양심은 바로 처음부터 뚜렷하였음을 시사합니다. 흥미롭게도, 기원 제 1세기에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퍼스’는 희랍어로 저술하면서 ‘아담’이 하나님께 대답하기를 꺼린 것은 그의 “악한 양심”의 증거였다고 지적하였읍니다. “양심”이라는 말에 대하여 ‘요세퍼스’는 희랍어 ‘시네이데시스’를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문자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짐” 혹은 “공통 지식”을 의미합니다. ‘아담’의 양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읍니다. 그것은 내적인 도덕감이었으며 그것은 지성적인 정신과 관계가 있었읍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특성 혹은 계시된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였을 때에 그는 내적 갈등을 느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감정 및 행동과 어떻게 관계가 있읍니까? 양심은 ‘아담’의 후손에게 전달되었읍니까? 그렇습니다. 성서와 성서 외의 증거는 양심이 심지어 오늘날 우리 각자에게까지 전달되었음을 증명합니다.
8. 그 후 어떠한 성서 기록이 유전된 도덕감을 반영합니까?
8 ‘아담’이 범죄한지 2천여년 후에 ‘요셉’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역사적 기록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요셉’은 ‘애굽’의 궁중관리 ‘보디발’의 집의 노예였읍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아마 ‘요셉’의 남성미에 이끌렸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을 유혹하려고 하였읍니다. ‘요셉’은 단순한 노예였기 때문에 아마 더 나은 지위를 얻으려고 그 여자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느끼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고 말하면서 그의 부도덕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읍니다. (창세 39:1-9) 간음을 하나님께 대한 죄로 보도록 ‘요셉’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9. 왜 ‘요셉’은 간음을 ‘하나님게 대한 죄’로 배척하였읍니까?
9 그가 그와 같이 행동한 것은 간음을 금하는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 때문이 아니었읍니다. 그러한 기록된 율법은 후에 십계명에 비로소 나타났읍니다. (출애굽 20:14) 그리고 이 때에 ‘요셉’은 가족의 어떠한 압력이나 족장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않는 ‘애굽’에 있었읍니다. ‘요셉’의 양심이 작용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간음은 그의 도덕감을 어기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아마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잘못임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 곧 ‘아담’이 잘 알고 있던 사실을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이 감정은 강화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 2:24; 마태 19:4, 5) 또한, 그는 간음이 승인되지 않았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험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창세 20:1-18; 26:7-11) 그러므로, 간음을 금하는 법이 없이도 ‘요셉’의 양심은 그로 하여금 간음을 배척하도록 자극하였읍니다.
10. 다른 사람들도 양심의 기능을 유전받았음을 알리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10 그러나 만일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 어느 정도의 양심을 전달하였다면 ‘보디발’의 아내 역시 간음이 잘못이라는 것을 느꼈어야 하지 않았겠읍니까? 그렇습니다. 다만 그는 정욕을 억제하지 못했을 뿐일 것입니다. 온 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애굽’인들도 간음이 심각한 도덕적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종교 교본은 마지막 심판을, “마음”을 신중히 검토하는 것과 결부시켰읍니다.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심판을 받았읍니까? 고대 ‘애굽’의 “죽은 자의 책”은 죽은 사람이 ‘나는 강탈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사람의 아내도 더럽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심에 의하여 간음이 그릇됨을 알았음이 분명합니다. 역사가 ‘요세퍼스’는 후에 양심 문제를 등장시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후회와 고통을 가져올 육욕을 피하고 남편에게 충실하여 “선한 양심”을 즐기라고 권고한 것을 기술하였읍니다.
11. 어떻게 성서와 성서 외의 전거는 기능을 발휘하는 양심을 예시합니까?
11 또한, 우리는 기능을 발휘하는 양심을 예시하는 성서와 성서 외의 묘사를 발견할 수 있읍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국민에 대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읍니다. 성서는 ‘다윗’이 범죄하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다윗’의 반응을 묘사합니다. 성서는 양심의 작용을 지적하여 “[‘다윗’이] 마음에 자책”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4:1-10) 가책받는 양심의 비슷한 영향이 범죄한 한 ‘바벨론’인의 기도가 기록된 고대 설형문자 토판에 언급되어 있읍니다. 그는 그의 신에게 “울리는 피리와 같이 불평하는 나의 가슴으로 인하여” 들어줄 것을 탄원하였읍니다.
12. (ㄱ)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지적하였듯이, 양심의 기능에 정확히 무엇이 포함될 수 있읍니까? (ㄴ) 모든 사람은 양심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12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지성과 도덕감으로 인하여 양심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을 전혀 몰랐던 나라들이 도둑질, 거짓말, 근친상간, 살인 및 간음을 금하였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본성에 따라 율법대로 행”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도덕 표준에 대한 기초를 강조하여 “그들의 양심[희랍어, ‘시네이데시스’]이 그 행위을 증언하고 그들의 이성이 그 행위를 서로 고발도 하고 변명도” 한다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2:14, 15, 새번역)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기능은 만인 공통이기 때문에 한 「백과 사전」은 “양심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은 문화는 아직껏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양심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개인들에 대하여 ‘기오프리스테펜슨’ 박사는 “그것은 진정한 형태의 정신 이상 혹은 정신병으로 간주되었고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간주한다”고 기술하였읍니다.—디도 1:15 비교.
양심—그 작용과 훈련
13. 왜 단순히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13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본성으로 율법대로 행”한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아닙니다.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양심의 참 근원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그 기능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이해한다고 하여 반드시 우리가 양심으로부터 온전히 유익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애굽’인들이 양심의 효능을 나타낸 특정한 도덕 표준을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그것 자체로 충분하였읍니까? 그것 한 가지만으로 모든 부당한 일이 방지되었읍니까? 그들이 불쾌하게도 동물을 숭배하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한 것은 단순히 어느 정도의 양심을 가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증명합니다. (로마 1:20-25)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 이상을 알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양심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훈련받을 수 있으며, 우리가 양심을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14. 인간의 양심이 작용하는 한 가지 면은 무엇입니까?
14 우리가 고려한 성서의 예들은 인간의 양심이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할 두 가지 필수적인 면들을 예시합니다.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양심의 기능은 과거를 돌이켜 보고 자신의 지나간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이 범죄한 경우와 ‘다윗’이 부당한 행동을 한 후의 경험에서 이러한 기능에 유의하였읍니다. 그들의 양심이 찔렸던 것입니다. 당신은 양심이 이러한 면으로 작용하는 것을 느껴보지 않았읍니까? 그릇된 행동을 한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이러한 양심의 내적 음성은 매우 끈질길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양심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과감한 행동을 하거나 혹은 여러 해 동안 양심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을 수 있읍니다.
15. 이것은 어떠한 중요한 면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읍니까?
15 그러나 이 양심의 작용의 훨씬 더 중요한 효능은 그것이 사람을 경건히 회개하도록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3, 5) 그러므로, 기능을 발휘하는 우리의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장차 그의 길을 따르도록 도울 수 있읍니다.—시 51:1-4, 9, 13-15.
16. 우리의 양심은 그 외에 어떠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까?
16 양심의 다른 기능은 도덕적인 선택 혹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는 사람을 인도하고 충고하는 면에서 미리 작용하는 것입니다. 강사 ‘에릭 다아시’는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이교 저술가들의 글에는 행위가 있은 후에 비로소 양심이 등장하였고 그 역할은 순전히 사법적이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양심이 입법 기능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요셉’이 간음을 행해서는 안된다고 미리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양심의 이 면이었읍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도덕감을 거스르는 행로를 배척하였읍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러한 면으로 기능을 발휘해 왔읍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도움이 되어야 할 만큼 도움이 되고 있읍니까?
17, 18. (ㄱ) 사람이 자기의 양심을 억누르면 어떠한 위험이 있읍니까? (ㄴ) 이것은 사람을 어떠한 상태에 있게 할 것입니까?
17 우리가 양심의 인도를 받고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양심의 이러한 두 가지 기능에 주의를 돌리고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어느 면도 무시하거나 억누를 수 없다는 것은 그렇게 했을 때에 나타나는 일로 보아 분명합니다. 보통의 경우, ‘아담’으로부터 양심을 유전받은 결과로, 사람의 양심은 거짓말 혹은 도둑질이 잘못이라고 그를 찌르거나 신호를 보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손이 불길 가까이 갈 때에 우리가 받는 신호와 비슷합니다. 체내의 감각 기관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며 우리는 손을 치울 수 있읍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손의 부분에 이미 두꺼운 굳은 살이 있거나 우리의 손이 이전에 화상을 입어 커다란 흉터가 있다면 어떠하겠읍니까? 그러한 경우라면 우리의 감각은 무딜 수 있읍니다. 굳은 살이나 흉터의 세포 조직으로 인하여 그 부분은 무감각하고 반응이 둔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양심이 만일 반복적으로 무시되고 억눌린다면 무감각해질 수 있읍니다. 사도 ‘바울’은 “마비된 살과 같이 양심이 죽은” 사람들에 대하여 기술하였읍니다. (디모데 전 4:2, ‘제이. 비. 필립스’) ‘바울’의 말과 같이, 그러한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위선적으로 행동하고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도 양심의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있읍니다.
18 따라서, 무시된 혹은 억눌린 양심은, 그릇된 일을 행한 후에도 그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으며 사전에 신뢰성 있는 인도를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에베소 4:19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읍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그들의 감각이 일단 둔화되자 그들은 자신을 성욕에 내맡겨 온갖 외설적인 생애를 열렬히 추구합니다.” (‘예루살렘’ 성서) ‘히틀러’가 사람들을 그러한 상태로 이끌어 들이기를 원한 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양심은 그들을 전혀 견제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비열한 명령을 받아도 순응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그와 같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우리의 양심의 기능과 감응력을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19. 성서는 사람이 기능을 발휘하는 양심을 가지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19 성서는 이 점에 있어서 무한히 가치있는 도움이 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특성과 길에 대하여 우리가 가진 최대의 지식을 제공해 주므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조화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시편 필자는 이렇게 노래하였읍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시 143:10) 우리가 하나님의 행적과 뜻을 더 많이 배워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우리 생활에서 경건한 양심의 영향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시 119:1-16) 내적 음성은 더 강해지고 더 분명하여집니다. 그것은 연마와 훈련을 통하여 독창가가 음성과 청취력을 더 정확히 하고 시계 제조인이 자기의 시력을 예리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20. 양심이 유전되었는데도 왜 성서에는 특정한 도덕적 범죄를 금하는 율법이 들어 있읍니까?
20 성서에는 도둑질, 거짓말, 간음 및 살인과 같은 심각한 도덕적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금하는 명백한 율법 혹은 명령이 들어 있읍니다. 그러한 그릇된 행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가운데서 금지되었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조언에도 그러한 금지 조항이 반복되었읍니다. (출애굽 20:13-16; 에베소 4:28; 골로새 3:9; 고린도 전 6:9, 10; 계시 21:8) 그러므로, 가정교육이나 생활 경험에 의하여 양심이 이러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졌을지라도, 성서를 통하여 사람은 그러한 행동이 그릇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읍니다. ‘나의 양심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았다’고 말할 근거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회중의 책임자들은 죄를 반복하는 사람으로부터 회중 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제명 즉 끊어짐을 당할 것입니다.—고린도 전 5:11-13.
21. 성서 원칙은 어떠한 부가적 가치가 있읍니까?
21 그러나 심각한 잘못을 금하는 율법에 부가하여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길과 표준을 반영하는 많은 원칙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의 형상과 같을 수 있는지를 알리는 명료한 것들입니다. 성서 원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예들을 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편애적이 아닌 분이심을 알리는 명백한 사실에 유의하십시오. 우선, 우리는 직접 그러한 말씀을 듣고 있읍니다. (신명 32:4; 욥 34:10, 12; 사도 10:34, 35) 그리고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특성을 나타내신 예들로써 뒷받침되고 있읍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기름부음받은 왕이 범죄하여 그의 신민중 일부에게 부당하게 행동하였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행로의 잘못을 명백히 설명하셨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일치하게 그분은 왕이라 할지라도 벌받는 일을 면하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사무엘 하 11, 12장) 그러한 행실의 원칙과 하나님의 성품을 알리는 것들을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인상깊게 새김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신뢰성있게 행동하도록 강화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이 있읍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6; 시 16:8.
22. 중요한 성서 원칙의 예를 드십시오. 이것은 사람의 양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개인에게 어떠한 유익을 줄 수 있읍니까?
22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고 편애적이 아닌 분이심을 알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양심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불공평이나 편애에 대하여 더 예민하게 감응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아마 우리는 특정한 배경을 가진 어떤 사람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자랐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을 차별하였을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상점에서 손님을 돌보고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무시하거나 별로 관심이나 친절을 보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공의롭고 편애하는 일이 없도록 촉구하신다는 것을 배워 알게 되었읍니다. (미가 6:8; 잠언 24:23)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최초의 인간 부모 즉 ‘아담’과 ‘하와’의 후손임을 인식하게 되었읍니다. (사도 17:26; 창세 3:20) 이전에는 우리가 불공정하게 행동하였을 같은 처지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양심의 “소리”는 이제 우리에게 공의롭고 편애없는 행동을 하도록 촉구합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계속 이전의 편견대로 행한다면, 후에 아마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한 것을 단죄하는 속에 있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훈련을 받았고 예리하여졌고 더욱 민감하여졌음을 알 수 있읍니다. 이제 양심은 우리에게 더 나은 지침이 되며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더욱 가깝게 이끌어 줍니다.
23. 오늘날 문제를 결정하는 일이 왜 점점 어려워집니까?
23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만연된 도덕적 변천과 붕괴에 직면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양심의 소리와 협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어려움을 주고 있읍니다. 또한 생활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결정을 내릴 때에 고려해야 할 요인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미국 대심원의 ‘펠릭스 프랭크퍼터’ 판사는 한때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소위 원칙이 하나 외에 더 관련되어 있지 않는 문제는 법정에서 진정으로 어려울 것이 없다. 단지 하나의 원칙이 논란이 된다면 그 문제는 누구라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24, 25. (ㄱ) 우리는 복잡한 결정에 직면할 때에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ㄴ) 그러면 우리의 양심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까?
24 그러나 성서에 있는 하나님의 원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사물을 고려하고 결정하는 우리의 능력이 개선됩니다. 문제 혹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우리는 적용되는 것같이 보이는 성서 원칙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읍니다. 문제의 성격에 따라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일 수 있읍니다. 머리 직분을 존경하는 일(골로새 3:18, 20); 모든 일에서의 정직성(히브리 13:18); 악을 미워하는 일(시 97:10); 평화를 추구하는 일(로마 14:19); 정부 권세에 순종하는 일(로마 13:1; 마태 22:21);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드리는 일(마태 4:10); 악한 교제를 피하는 일(고린도 전 15:33);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일(빌립보 1:9, 10). 원칙 자체가 우리를 도와 주는 한편 하나님의 원칙과 길에 대한 지식과 인식을 증가시킴으로써 우리의 양심의 소리는 더욱 신빙성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양심이 ‘증거하는 자’라고 말하였읍니다. (로마 9:1) 우리의 양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훈련받은 우리의 양심의 자극은 우리를 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을 우리의 결정에 반영하게 할 것입니다.
25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양심,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양심이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성과 원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킴에 따라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결정을 내리는 면에서 더욱 가치있게 될 수 있읍니다.
[321면 삽화]
‘요셉’은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로부터 도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