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잡으라
1, 2. 우리는 왜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잡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기술하였읍니다. (히브리 3:14, 새번역) 그는 또한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을 붙잡”아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도 이야기하였읍니다.—히브리 6:18, 새번역.
2 당신은 아마 최근에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믿는 바를 확신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혹은 수십년 동안 그리스도인 증인으로 활동해 온 사람으로 진리의 길에 확고하게 서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느 경우이든, 우리 각자는 아마 진리의 길에서 행하는 일을 중단한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아는 일부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심지어 제 1세기에도 있었읍니다. (빌립보 3:18; 사도 20:30)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점진적으로 상실하여 물질적인 관심사에 몰두하게 되었거나 혹은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3-5. 「히브리서」는 우리의 희망에 관해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읍니까?
3 우리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읍니까? 「히브리서」에 나오는 충고를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한 충고에 의해 강화되어 온 수많은 현대 ‘여호와의 증인’들의 충실한 인내의 본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얼마나 적절한 교훈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4 「히브리서」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앞서 하늘로 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견고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우리도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희망은 영혼의 닻 같아서 확실하고 견고하였읍니다.’ 계속하여 ‘바울’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을 붙잡”을 필요성에 주의를 환기시켰읍니다. (히브리 3:1; 6:18-20) 그들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다면, 현재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과 임박한 “큰 환난”에서 생존하기를 기대하는 “큰 무리”는 훨씬 더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계시 7:9, 15.
5 「히브리서」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흘러 떠내려 가는 일’, ‘타락하는 일’, ‘게으르게 되는 일’, ‘뒤로 물러가 멸망하는 일’ 혹은 ‘거역하는 일’ 등과 같은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히브리 2:1; 6:6, 12; 10:39; 12:25) 「히브리서」는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나타내 보이고 끝까지 희망에 대하여 충분한 확신을 갖”게 되며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 나타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교훈을 알려 줍니다.—히브리 6:11, 새번역; 10:39.
‘뒤로 물러갈 자가 아님’
6.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직면한 일이 있었으며, 그럼에도 어떻게 할 필요가 있었읍니까?
6 틀림없이 수많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경험하였읍니다. 그들은 ‘로마’의 극장에서 웃음거리가 되거나 또는 투옥된 사람들을 도우려다가 위험에 처한 일과 같은 “고난의 큰 싸움에 참”았었읍니다. (히브리 10:32-3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 신세]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히브리 10:39.
7. (ㄱ) 박해에 대한 전망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읍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까?
7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반대에 대한 두려움을 발전시켜 스스로 “물러가”거나 혹은 타협하게 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학교 급우들이나 직장 동료들로부터 오는 것과 같은 제한적인 형태의 반대를 직면하게 될지 모릅니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믿지 않는 배우자나 부모로부터 오는 신체적 학대를 당하기까지 하였읍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증인’들이 자기들의 믿음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받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격렬한 박해를 대비하는 일에 소홀하게 될 수 있으며 박해가 임하게 될 때 자칫 “뒤로 물러가”기가 더 쉬워질 수 있읍니다. 이렇게 자문해 봅시다. ‘나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집과 직장을 잃고 가족과의 접촉이 두절되거나 혹은 투옥되고 신체적 학대를 받는 등 심각한 위협을 당하게 된다면, 뒤로 물러날 위험성이 있는가?’
8. 박해를 극복하는 문제에 관해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훈계를 합니까?
8 역경하에서 믿음을 고수하는 문제에 관해 설명하면서,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어떻게 인내하셨는지 생각하도록 권고하였읍니다. (히브리 12:2, 3) 그리고 나서 ‘바울’은 혹독한 박해가 임할 때에는 그것을 유익한 징계의 한 형태로 간주해야 함을 상기시켜 주었읍니다. 두말할 나위없이,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가져오시지 않으며 단지 그것을 허용하실 뿐입니다. 여전히 박해는 인내심, 참을성, 여호와께 대한 충성심 및 신뢰심 등 그리스도인 필수의 특성들을 개선하도록 우리를 훈련하거나 혹은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히브리 12:4-11; 야고보 1:2-4.
9. (ㄱ) 불완전한 인간들도 박해를 인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ㄴ) 1960년대에 한 공산 치하의 나라에 있는 일부 자매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읍니까?
9 예수와 같이 완전한 인간만이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히브리서」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인내한 불완전한 남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읍니다. (히브리 11:35-40; 12:1) 믿음으로 인내해 온 “구름같이 ··· 허다한 증인들”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증가해 왔읍니다. 1982년 8월에 ‘스위스’의 한 신문은 20여년 전에 공산 치하의 한 나라에서 여자 노동 수용소에 감금된 ‘여호와의 증인’들과 관련하여 한 여인의 체험을 실은 일이 있읍니다. 다음은 그 여자의 설명의 일부 요지입니다.
큰 교회들은 그들이 국가에서 허용하는 것만 전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고 있었으나 가정에서 집회를 갖는 소수 집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였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자기 집에서 「파수대」 간행물이 발각된 수많은 ‘증인’들이 10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어렵게 입수한 인쇄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을 때, 수용소 당국자들이 그렇게 진노케 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수용자마다 옷을 벗기우고 발가벗긴 몸으로 수색을 당하였으며, 그들의 옷은 샅샅이 조사당하였다. 또한 들에서 작업하는 모든 수용자들은 무장한 감시병에게 감시를 받았으며 수용소로 돌아올 때 문을 통과하면서 검신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쇄물이 발견되었다. 마치 밤에 천사가 날아와서 그것을 던져주는 것 같았다. ‘증인’들 대다수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처음 투옥되면 5년 내지 7년 형을 받았으나 재범의 경우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용소 내에서 가장 곤욕을 치른 사람들은 다름아닌 ‘증인’들이었다. 그들은 세명 이상만 모이게 되면 분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0.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박해에 관하여 무슨 결심을 하도록 도움이 됩니까?
10 박해하에서의 고대 믿음의 본들에 관하여 「히브리서」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지상 낙원에서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을 알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누가 그 이상을 요구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고대와 현대의 믿음의 본들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자 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히브리 11:38, 40; 10:39, 신세 참조.
‘흘러 떠내려 가지’ 않게 함
11. 잠시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해 온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흘러 떠내려 갈’ 위험성이 있을 수 있읍니까?
11 「히브리서」에서 알려 주고 있는 바와 같이, 또 다른 위험성은 ‘흘러 떠내려 가는 일’입니다. (히브리 2:1)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고려해 보도록 합시다. 어떤 사람—우리들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음—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칭찬받을 정도의 열정으로 불붙게 되었읍니다. 그는 제한적인 성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읍니다. (사도 3:1-9; 8:39; 13:48, 49) 몇해가 지나면서 그의 흥분은 꾸준한 열심과 뿌리깊은 헌신으로 의당 장성했어야만 했읍니다. 그렇게 되었읍니까? 그는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고 자기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합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일상사이며 귀찮은 일이 되어 버렸읍니까? 만일 그에게 자녀가 있다면, 그는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전 시간 봉사자가 되도록 격려합니까? 아니면 단지 우발적으로 언급할 뿐이며, 그것도 자녀들이 학교 공부에서 진보하는 일과 높은 급료를 받는 직장을 얻는 일 혹은 우아한 주택을 마련하는 일 등에 대하여 말할 때보다 부족한 확신감으로 그렇게 합니까?—계시 2:4.
12. (ㄱ)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흘러 떠내려 가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무엇을 추천해 줍니까? (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는 어떠한 질문들이 있읍니까?
12 ‘흘러 떠내려 가는 일’을 피하기 위한 한 가지 단계는 우리가 ‘들은 일들에 대하여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히브리 2:1, 신세) ‘히브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이 점에서 실패하였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기본 교리”를 배운 후에 “장성으로 매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브리 5:12-6:2)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그저 “읽어 치우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까? 아니면 주의를 기울여 개인 연구에 진력합니까? 우리는 성서의 일부를 매일 읽고자 힘쓰고 있읍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 출판물들을 순수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심지어 우리가 배운 새로운 것들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눕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의 젖’을 능가하여 발전하도록 돕고 있읍니까? 그들은 성서로부터 영혼, 부활, 삼위일체, 지상 낙원 등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읍니까? 그들은 지난 해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야외 봉사에서 그렇게 하고 있읍니까?—베드로 전 3:15.
13. 투옥된 우리의 자매들은 연구하는 일에 관해 우리에게 무슨 본을 세워놓았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제안해 줍니까?
13 투옥된 ‘증인’들에 관하여 그 기사는 이렇게 진술하였읍니다.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성경 귀절들을 암기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또한 그들은 외국어 특히 영어, ‘프랑스’어 및 독일어를 배우는 일에 힘썼다. 그들이 입수한 인쇄물은 종종 이런 언어들로 되어 있었으며 그리하여 외국어를 배운 증인들이 다른 자매들을 위하여 그 내용들을 번역할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제한된 식량을 지급받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던 그들처럼 강박한 상태하에 있지 않는데, “들은 일들에 대하여 보통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여가 시간을 온전히 활용하고 있읍니까?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라
14.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해 온 사람들에게도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읍니까?
14 우리가 계속 진보할 것을 촉구한 뒤에 「히브리서」는 “한번 빛을 받”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갈’ 수 있으며 아마 회개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히브리 6:4-8, 공동 번역)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온 그리스도인들 심지어는 “성령을 나누어 받은” 기름부음받은 자들까지도 현 제도의 유혹적인 것들에 휘말려들 수 있읍니다.
15. 일부 사람들은 성적 및 상업적인 것과 관련하여 어떻게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었읍니까?
15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정욕이나 부에 대한 갈망 때문에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었읍니다. (요한 1서 2:16) 물론, 성적 욕망 때문에 젊은이들은 혼전 성 관계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읍니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부면이 있읍니다. 일부 결혼한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 배우자에게 싫증을 느낀 나머지 좀더 매력적인 사람이나 보다 흥미있는 대화의 상대자 혹은 현 세상에서 더욱 성공한 또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일이 있었읍니다. 서글프게도, 이러한 일은 이혼과 부도덕한 재혼으로 인도하였읍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질을 추구하는 일로 떨어져 나가 명백히 부정직한 상행위나 또는 정부의 인가 및 납세 의무를 묵살하는 일에 빠져드는 일이 있었읍니다. (마태 22:21) 혹은 ‘피라밋’형으로 돈을 버는 투기를 조장하거나 또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벼락 부자의 꿈을 안고 동료 형제들을 탐욕적으로 이용해 온 사람들도 있었읍니다. (사도 20:33; 데살로니가 후 3:10, 11 비교) 이런 행위들은 흔히 그들의 왕국 관심사를 흐리게 함은 물론, 사기 행위를 했다는 비난을 받지는 않는다 할찌라도 때때로 복잡한 감정 문제나 분쟁을 야기시켰읍니다. 다음과 같은 성서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어 왔읍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 ··· 에 떨어지[느니라.]”—디모데 전 6:9.
16. 투옥된 자매들은 유혹을 저항하는 일에 어떤 훌륭한 본을 세워놓았읍니까?
16 우리가 떨어져 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시인한다면, 우리는 유혹이나 범죄에 말려드는 일에 가담하지 않고자 결심해야 합니다. (로마 12:3; 고린도 전 10:12)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그 자매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본이 됩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 증인들은 상점, 영화관 및 기타 오락 시설들이 있는 대 도시로 한 사람씩 불려 나갔다. 예를 들어, 두명의 비밀 경찰이 한 자매를 많은 식품이 진열되어 있는 어느 상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그 자매에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고르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여러 해 동안 굶주려 허기진 사람에게 먹음직스럽게 진열된 빵과 과자를 보여준 것은 마음을 산란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와 유사한 유혹하는 일들이 백화점이나 영화관에서도 시도되었다. 비밀 경찰은 그 자매를 몇주 동안이나 그곳에 거하게 하면서 만일 그가 믿음을 포기하기만 한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들은 단 한 자매만 타협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몇 개월이 지나서 그 자매는 수용소로 되돌아왔는데, 이제 몸이 좋아졌으며 좋은 옷까지 입고 있었다. 그는 자기에게 심지어 인사조차도 하지 않는 이전 자매들에게 두 시간에 걸쳐 연설을 하였다. 분명히 비밀 경찰은 이것이야말로 기발한 착상이며 자매들이 너도나도 이에 가담하여 그들의 믿음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였다.
17.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직면하는 유혹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17 당신이라면, 그러한 유혹을 직면했을 때 단호하게 행동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당신이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유혹들에 대하여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오. 날마다 오늘이라 부르는 동안에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기만적인 힘, 신세]에 빠져 완고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히브리 3:12, 13, 새번역) 떨어져 나가거나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믿음을 나타냄
18.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읍니까?
18 ‘바울’이 말한 “오늘”이라는 논거는 시편 95:7-11에서 인용한 것이었읍니다. (히브리 3:7-11, 새번역 참조) 이 내용이 알려 주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시대에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였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관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들은 뒤에 믿음의 부족을 드러냈읍니다. (민수 13:17-14:38) 그들은 그곳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안식일에 평화와 축복을 누릴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마음과 불신에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 들어가 살기를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하셨읍니다.—히브리 3:17-19.
19.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여호와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읍니까?
19 하나님의 큰 ‘안식일’ 즉 쉬는 날은 계속되고 있읍니다. (창세 1:31-2:3) ‘바울’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고 기술하였읍니다. (히브리 4:1, 9)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 “안식”에 들어가거나 “안식”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읍니다. 어떻게? 고대의 ‘여호수아’가 아니라 더 큰 ‘여호수아’이신 우리의 인도자 예수에 대한 믿음을 실천함으로써입니다. 우리 역시 새 질서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낸 바와 같은, 믿음이 결핍된 행위를 중지해야 합니다. 그들의 생활은 오락이나 쾌락에 집중해 있읍니다. 그들은 지위나 칭호 등을 획득함으로써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할지 모릅니다. 혹은 “좋은” 사람이 된다는 철학을 추구할지도 모릅니다.
20, 21. (ㄱ) 우리는 어떤 행위들을 피해야 합니까? (ㄴ) 투옥된 자매들이 보여준 본과 같이, 우리는 무슨 선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까?
20 우리가 예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점을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브리 4:10) 그러므로 믿음이 결핍된 행위 또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행위를 중지하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1 그리스도인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관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잡”을 것을 촉구하였읍니다. (히브리 4:14, 새번역) 논리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희망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 10:23-25) 하지만 “공개적 선포”에는 외부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과 희망을 고백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실로 우리는 “찬미의 제사” 즉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신세] 입술의 열매”를 드리는 일을 의무로 여겨야 합니다. (히브리 13:15; 고린도 전 9:16) 앞에서 언급한 기사의 필자는 한 자매와의 대담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국자들이 그들 모두를 투옥시킨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때문임을 말하였다. 만일 그들이 집에 앉아서 혼자 조용히 기도나 하고 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고 새로운 형제 자매들을 얻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죠.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 되어서 천년기에 지상에서 누리게 될 생명을 위해 우리 자신만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모든 사람들은 그 때 즐기게 될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22. 우리는 「히브리서」에 근거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읍니까?
22 「히브리서」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 것이며 아무도 ··· 불순종[에] ···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4:11, 새번역) 우리는 지금 그 안식에 들어가 있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지상에서 생존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숭배하게 될 때 그것이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된 희망에 대하여 깊은 만족감을 가질 수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현재 믿음과 순종으로 자기의 안식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축복하시고 보존하실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문도 있을 수 없읍니다. 그분은 “자기를 [열렬히, 신세]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십니다. (히브리 11:6) 굳이 의문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까지도 의문에 잠겨 있을 이유가 없읍니다. 우리의 믿음과 인내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으로써 우리는 “앞에 놓여 있는 희망을 붙잡”을 수 있읍니다.—히브리 6:18, 새번역.
당신은 유익을 받았는가?
◻ 우리는 「히브리서」에서 무슨 특정한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 우리는 투옥된 일부 자매들의 본으로부터 무슨 유익을 받을 수 있는가?
◻ 히브리서 2:1은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는 일을 피하도록 무엇을 촉구하는가?
◻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가?
[17면 삽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들었으나 믿음의 결핍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의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