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관심을 가진 창조주가 있다면, 고통스러운 일이 그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의 시계가 60초를 똑딱거리는 동안, 30명이 넘는 사람이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11명이 암과의 싸움에서 지고, 9명이 심장병으로 죽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이러한 병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질병 가운데 일부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원인들로 인해 고통당하고 죽습니다.
1996년에 뉴욕 시의 국제 연합 빌딩 로비에 있는 시계가 가난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날 때마다 상징적으로 똑딱거렸는데, 1분에 47회나 똑딱거렸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지구가 자전할 때마다 지구 인구의 20퍼센트는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범죄 건수를 계산해 본다면 어떠할 것입니까?
오늘날 우리 주위의 세상에 고통스러운 일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은 우리 주위 도처에서 일어나는 불공정한 일에 무관심한 채 살아갑니다.” 한 전직 경찰관의 말입니다. 하지만 무관심한 듯한 태도는, 우리 자신의 생명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관련되기만 하면 곧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암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을 간호한 적이 있는 마사코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부모가 둘 다 체중이 줄고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동안, 마사코는 무력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또는 샤라다라는 아시아의 한 소녀가 느꼈을 절망감을 생각해 보십시오. 샤라다의 아버지는 샤라다가 아홉살 때 샤라다를 14달러(미화)를 받고 팔아 버렸습니다. 샤라다는 자기가 살던 마을을 떠나 외국의 한 도시로 팔려 가서, 하루에 여섯 명의 남자에게 매춘 행위를 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창조주께서 이러한 일을 막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 때문에, 하느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앞서 언급한 전직 경찰관의 어머니도 한 정신병자에게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느꼈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권자 즉 우주를 관장하는 사랑 많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내 정신 속에서 그토록 멀리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당신도 아마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며, 창조주는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전생이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인가?
세계 도처의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 원인이 그 사람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에 살면서 저지른 일에 대한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우리가 카르마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태어나자마자 과거의 카르마의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이다.”a 이것은 서구 사회에 선(禪)을 대중화시킨 철학자 스즈키 T. 다이세츠가 제시한 견해입니다. 힌두교의 현인들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암중 모색하다가 “카르마의 법칙”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합리적이거나 참으로 만족스럽습니까?
불교를 믿는 한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떤 것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 여자는 고통에 대한 그러한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신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에서는 재생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가르침—인간에게는 몸이 죽어도 살아 남는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교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영혼”이 현생이나 내세의 고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개념이 널리 퍼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타당하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 창조주의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사상이나 강한 신념은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신빙성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첫 인간 부모가 저지른 죄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비극—죽음—을 초래하였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불순종하는, 즉 죄를 짓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3:19)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성서적인 용어로 이 말은 아담이 영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죽자 아담이라는 영혼도 죽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의식이 없었으며 고통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카르마, 윤회, 죽은 후에 고통을 경험할 수 있는 불멸의 영혼과 같은 가르침을 장려하시거나 승인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저지른 죄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늘날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이 겪는 고통의 모든 면을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쌍안경을 사용하면 멀리 있는 물체를 더 명확히 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성서를 사용하면 고통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원인으로, 성서는 “시기와 우연[“예기치 못한 일”]”이 모든 사람에게 닥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전도 9:11, 「신세」 참조) 일례로, 예수께서는 그 당시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사건—탑이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한 죄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누가 13:1-5) 그들이 재난을 당한 것은, 일이 잘못 되려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밖에도 더 자세한 설명을 하여, 고통의 주된 원인에 대한 만족스러운 지식을 알려 줍니다. 어떠한 지식입니까?
첫 인간들이 죄를 짓자, 심판관이신 하느님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고 판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제로 죽을 때까지 여러 해 동안 상당한 고통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고통으로서, 노쇠와 병으로 인한 결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 가정이 질투와 폭력으로 파탄에 이르는 것을 보는 슬픔 등입니다. (창세 3:16-19; 4:1-12) 그 모든 고통의 주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 스스로 그 고통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이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겠지만, 성서는 사실을 올바로 직시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로마 5:12) 첫 인간 부부는 자기들이 해로운 행로를 택한 결과를 거둔 것이지만, 그들의 후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 6:7) 그들의 자손은 불완전성을 유전받아 죽음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지금도 자녀가 부모로부터 질병이나 결함을 유전받을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고려하여, 이러한 설명이 훨씬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유전될 수 있는 질병으로는 혈우병, 탈라세미아(지중해 빈혈), 관상 동맥 질환, 당뇨병 중의 한 종류, 심지어 유방암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직접적인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들은 유전받은 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인류를 통치하는 여호와의 방법을 거부하는 쪽을 택하였습니다.b 당신도 역사를 통해 알다시피, 인간들은 이 땅을 통치하기 위해 온갖 형태의 정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한 노력에 참여한 일부 남자와 여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인간이 스스로 통치해 온 결과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립니까?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이 완화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정책들과 국가들 사이의 전쟁 때문에 고통이 증가해 왔습니다. 약 3000년 전에 한 현명한 통치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지배하여”] 해롭게 하는[도다].”—전도 8:9, 「신세」 참조.
당신은 상황이 현재 매우 달라졌다고, 아마 더 나아졌다고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많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유전받은 죄와 불완전성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한 행동 때문에도 고통을 당합니다. 인간들이 흔히 탐욕 때문에, 땅을 잘못 관리해 온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또한 오염을 일으키고, 가난을 초래하고, 굶주림이나 유행병을 발생시킨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처사라고 부르는 일부 자연재해도 인간이 자초한 것입니다. 대개 간과되는 고통의 주된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고통의 배후 원인이 되는 자
성서의 한 책은 고통의 주된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관심을 가진 창조주께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특별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욥기라고 하는 이 책은 고통 문제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명확히 밝혀 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영역을 통찰하게 해주는데, 그 곳에서 매우 중요한 특정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모세가 성서의 첫 부분을 장식한 책들을 쓰기 직전인 약 3500년 전에, 욥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아라비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욥기는 욥이 정직하고 인정 많고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다고 알려 줍니다. 욥은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부자로서,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욥은 아내와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욥 1:1-3; 29:7-9, 12-16) 하루는 사자가 급히 달려 들어와, 욥의 소중한 소와 나귀 떼의 일부가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곧 이어 또 다른 사자가 욥의 양 떼를 잃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갈대아 사람들이 3000마리나 되는 욥의 약대를 빼앗아 가고, 한 종만 빼고 다른 종들은 모두 죽였다는 보고가 들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나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대풍이 맏아들의 집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 곳에 모여 있던 욥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에 직면한 욥은 하느님을 원망할 것입니까? 당신이 욥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느꼈을 것입니까?—욥 1:13-19.
하지만 닥칠 재난이 더 있었습니다. 욥이 끔찍한 질병에 걸려, 온 몸에 악성 종기가 났습니다.c 욥의 병이 매우 심하여 혐오감이 일 정도가 되자, 욥의 아내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자기에게 고통이 닥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러한 고통을 초래한 분이 하느님이라고 비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6-10.
욥이 고통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틀림없이 악한 행동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욥기 4장, 5장) 그는 욥에게 은밀히 지은 죄가 있다고 비난했는데, 심지어 궁핍한 사람들에게 빵을 주지 않았거나 과부나 고아를 학대한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욥기 15장, 22장) 다른 두 명의 엉터리 위로자 역시, 마치 욥에게 고통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욥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옳았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욥기는 욥이 고통을 당한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하느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장과 2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영계에서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사탄d이라고 하는 반역적인 영자가 하느님 앞에서의 모임에 다른 영자들과 함께 참석해 있었습니다. 욥의 흠 없는 행로에 대한 언급이 있자, 사탄은 다음과 같이 도전적으로 응수하였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2.
달리 말하면, 사탄은 하느님이 욥에게 뇌물을 주고 있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 도전적인 영적 피조물은, 욥에게서 부와 건강을 빼앗으면 그가 여호와를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말을 확대 적용하면, 고통에 직면하면 인간은 아무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충성을 지키지도 않을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도전적인 주장은 온 땅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탄이 제기한 쟁점은 해결되어야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대적하여 행동할 자유를 주셨고, 사탄은 욥에게 그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고통을 가하였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욥은 하늘에서 제기된 우주적인 쟁점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였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탄은 욥에게 닥친 모든 재난이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것처럼 보이게 일들을 꾸몄습니다. 예를 들면, 번개가 욥의 양 떼를 쳤을 때, 살아 남은 종은 그것이 “하나님의 불”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욥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를 몰랐지만, 여호와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배척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욥 1:16, 19, 21.
욥이 체험한 일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상황을 분석해 본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은 쟁점이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고난이 닥쳐도 사랑에서 우러나와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욥은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오직 하느님에 대한 참 사랑만이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도록 감동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욥은 바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탄의 거짓 비난을 무색하게 하는 참으로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당시에 욥으로 시작해서 욥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고통을 목격하거나 고통에 직면할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은 욥의 시대에 제기된 쟁점을 모르고 있을지 모르며, 사탄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도 믿지 않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그들은 흔히, 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거나 고통에 대해 창조주를 원망합니다. 당신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창조주에 대해 당신이 알게 된 사실로 볼 때, 성서 필자 야고보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까? 그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습니다. “시련 아래 있을 때에, 아무도 ‘내가 하느님에게 시련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악한 일로 시련을 받으실 수도 없으며, 또한 그분 자신은 아무에게도 시련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보 1:13.
현명한 견해를 갖는 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있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즉 예수의 경우를 고려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통찰력과 지식과 가르치는 자로서의 능력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탄이나 고통에 대한 그분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사탄 마귀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욥의 충절을 깨뜨리려고 했던 사탄은 예수에게도 공공연하게 동일한 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탄이 실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욥의 시대에 제기된 도전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도 욥처럼, 부와 권세를 희생하면서까지 창조주께 충실함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고통의 기둥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였는데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경우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인간이 하느님께 충성을 지킬 것임을 인간 스스로 증명하도록 하느님께서 여전히 허락하고 계셨음을 알려 줍니다.—누가 4:1-13; 8:27-34; 11:14-22; 요한 19:1-30.
시간을 허락하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고통을 이해하는 면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사고, 인간의 죄 짓는 경향, 인간이 땅을 잘못 관리하는 일, 사탄 마귀 등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당하면 누구나 고대의 예언자 하박국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괴로움을 그저 보고만 계십니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하박국 1:2, 3, 「신세」 참조)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보고만 계”시고 조처를 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분으로서 그분에게는, 고통을 끝나게 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공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언제 조처를 취하실 것입니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인간 부부가 완전히 독립하는 쪽을 택하였을 때, 창조주께서는 그들의 후손 중 일부는 그들과 다르게 행동할 것임을 확신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지혜로우시게도,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조주로부터 독립한 통치는 불행으로 인도할 뿐이며, 반대로 창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며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동안 하느님께서는 이 땅이 알맞게 유쾌한 환경을 이루도록 관리해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추리하였습니다. “지나간 세대들에는 그분이 모든 이방 사람들로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증언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로부터 여러분에게 비와 열매 맺는 계절을 주시는 선한 일을 하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음식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사도 14:16, 17) 창조주께서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분은 단지 매우 중요한 쟁점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허락해 오신 것뿐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언제 올 것인가?
사실, 인간의 고통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끝날 시간이 가까웠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서는 욥의 시대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 주는데, 우리 시대와 관련해서도 다시 한 번 그 점을 알려 줍니다.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에게 주어진 계시는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사탄이 악귀들의 무리와 함께 “땅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이 성서의 책에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아, 기뻐하여라! 땅과 바다에는 화가 있다. 마귀가 자기에게 남은 기간이 짧은 줄을 알고 몹시 화내어 너희에게 내려갔기 때문이다.”—계시 12:7-12.
성서의 예언을 자세히 고려해 보면, 금세기가 그러한 일이 일어난 시기라고 지적합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존경받는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이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인정합니다.e 그 때 이래로 고통과 화가 증가해 왔습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의 가까운 제자들이 “[그분의] 임재와 사물의 제도의 종결의 표징”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이 동일한 시기를 지적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왕국이 왕국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큰 지진이 있을 것이며, 곳곳에 역병과 식량 부족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두려운 광경과 하늘로부터 큰 표징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 24:3-14; 누가 21:5-19) 큰 고통이 있을 것임을 알려 주는 이러한 말씀이 지금, 그야말로 역사상 처음으로 온전한 규모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며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큰 환난’의 서곡에 불과하다고 묘사합니다. (마태 24:21) 하느님께서는 이 환난으로 인간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고통을 초래해 온 악한 사물의 제도가 끝나게 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를 파멸시킬 핵 참사로 인한 ‘세상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존자들이 있을 것임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모든 나라와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큰 무리가’ 그 환난에서 살아서 나올 것입니다.—계시 7:9-15.
완전한 이해를 얻기 위해, 그 후에 있을 일에 대해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을 고려해 보십시오. 인류의 거처가 원래 목적했던 대로 정원 같은 거주지로 회복될 것입니다. (누가 23:43) 집 없는 사람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65:21-25.
개인적으로 겪던 고통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전쟁이나 폭력이나 범죄가 없을 것입니다. (시 46:8, 9; 잠언 2:22; 이사야 2:4) 인간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는 순종하는 사람들이 완전한 건강을 얻고 그것을 누리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25:8; 33:24) 땅이 생태학적 균형을 되찾아 풍부하게 생산할 것이기 때문에, 굶주리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시 72:16) 참으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고통의 원인들은 옛일이 될 것입니다.—이사야 14:7.
이 정도면 틀림없이 가장 좋은 소식이 될 만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두 개의 먹구름이 끼어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람이 단지 70년이나 80년을 산 후 죽게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다면, 사람이 누리는 그러한 축복은 제한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주께서 인간의 고통이 끝나게 하시기 전에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간은 슬픔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고통을 없앰
창조주께서는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주와 이 곳 지상에 있는 인간 생명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일이나 인간이 이제 겨우 가능함을 깨닫기 시작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를 두 가지만 고려해 봅시다.
우리에게는 끝없이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을 전망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 줍니다. (요한 3:16; 17:3) 마이클 포슬 박사는 인간 세포 내의 유전자를 연구한 후에, 남성의 생식 세포는 나이가 들어도 그 질이 저하되지 않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형질 표현을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포를 늙지 않도록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제4장에서 살펴본 점과 일치합니다. 즉 우리의 뇌는 현재의 수명으로는 극히 일부분밖에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용량을 가지고 있다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뇌는 끝없이 활동하도록 설계된 것 같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점은 단지 부가적인 사실로서, 성서에서 직접 말하는 내용—여호와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는 점—을 보충해 줄 뿐입니다. 성서의 마지막 책에서 여호와께서 약속하시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계시 21:4.
창조주께서는 고통을 당하다 죽은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즉 그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나사로가 바로 부활되는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요한 11:17-45; 158-60면 참조) 도널드 매케이 교수는 컴퓨터 파일을 예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컴퓨터가 파괴된다고 해서 반드시 컴퓨터에 들어 있던 방정식이나 프로그램도 영영히 못쓰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수학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일한 방정식이나 프로그램을 새 컴퓨터에 입력시켜 거기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매케이 교수는 이어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기계론적 관점으로 뇌를 연구하는 과학은, 독특하게 ‘부활’을 강조하며 [성서]에 언급된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대해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창조주께서는 후에 그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에게, 예수가 나사로에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매케이는 “우리의 창조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이 그 사람이 새로운 몸으로 부활되어 생명을 누리는 것에 조금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궁극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만이 고통을 온전히 제거하고, 죄의 결과를 역전시키고, 죽음을 없애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이루어질 놀라운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요한 5:28, 29.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신 분께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시 생명을 얻게 해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할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이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디모데 첫째 6:19; 사도 24:15.
하지만 인간이 겪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이 현재 우리의 삶을 한층 더 뜻 깊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각주]
a 카르마 혹은 갈마는 “개인이 과거에 한 행동이 미래의 삶에 미치는 영향, 즉 윤회”로 알려져 있다.
b 창세기 2:17은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알려 준다. 「신 예루살렘 성서」(1985년판)에서는 이 성구에 대한 각주에서, 선악을 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며, 완전한 도덕적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자기의 위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이사[야] 5:20 참조. 최초의 죄는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공격이었다.”
c 다른 성구들을 보면, 욥이 어느 정도로 고통을 당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온 몸에 구더기가 덮였고, 피부에는 딱지가 앉았고, 숨쉴 때 역겨운 냄새가 났다. 욥은 통증으로 괴로워하였고, 살갗이 검게 변하여 떨어졌다.—욥 7:5; 19:17; 30:17, 30.
d “한 책에서 창조주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앞장에서,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하는 데 사탄 마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려하였다.
e 이 예언에 대해 다룬 내용을 보고 싶으면, 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 제11장 참조.
[168면 네모]
영혼은 불멸이 아니다
성서는 각 사람이 인간 영혼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 에스겔 18:4은 이렇게 말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으며, 어느 곳에도 살아 있지 않다. 솔로몬은 이렇게 썼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느니라].” (전도 9:5, 10) 원래 유대인이나 초기 그리스도인은 영혼이 불멸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구약에 나오는 영혼은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사람 전체, 즉 살아 있는 사람 자신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영혼은 인간 생명을 의미한다. ··· 성서는 불멸의 영혼이 살아 남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신 가톨릭 백과 사전」.
“영혼불멸이라는 사상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개념이다.”—「도포 라 모르테: 임모르탈리타 오 레수레치오네?」 신학자 필립 H. 머누 저.
“어떤 사람 전체가 죄를 짓는 것이므로, 그 사람이 죽을 때 몸과 영혼도 함께 완전히 죽는다(완전한 죽음). ···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루터교의 교리 문답집 「에판겔리셔 에르바크세넨카테히스무스」.
[175면 네모]
정말 그렇게 긴 기간인가?
욥의 시대로부터 예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600년은 고통이 지속되기에는 매우 긴 기간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인간에게는 100년도, 고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치고는 매우 긴 기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제기한 주요 쟁점들이 창조주에게 불명예를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느님의 관점에서 볼 때, 쟁점이 제기된 이후 고통과 악이 허락된 기간은 짧은 기간이었다. 그분은 ‘천년을 지나간 어제 같이’ 여기시는 “영원하신 왕”이시다. (디모데 첫째 1:17; 시 90:4)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존재했던 이 역사 기간은 대단히 짧게 느껴질 것이다.
[178면 네모]
역사의 전환점
“현재의 유리한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의미 있는 표현대로—20세기 ‘고난의 시대’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오늘날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우리의 문명은 그 ‘고난의 시대’에서 아직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왕조들의 몰락」(The Fall of the Dynasties), 에드먼드 테일러 저.
“참으로, 우리 시대의 전환점이 된 해는 히로시마 사건이 있었던 해가 아니라 1914년이다. 지금도 우리는 ··· 제1차 세계 대전이 혼란스러운 과도기로 통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도 그 혼란스러운 과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바너드 대학교의 레네 알브레히트-카리에 박사.
“1914년에 세계는 한데 뭉칠 수 있는 힘을 상실하였고, 그 후로는 그 힘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였다. ··· 금세기는 무질서와 폭력이 국가들 간에는 물론 국가 내에서도 두드러진 시대였다.”—「이코노미스트」지.
[181면 네모]
사람의 부활이 가능한가?
신경학자인 리처드 M. 레스택은 인간의 뇌와 뉴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500억 개의 신경 세포에 자리 잡고 있는 접합부와 회로를 보고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에 관한 모든 사실과 우리가 행해 온 모든 일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랑 많으신 우리의 창조주께서 자신이 가지고 계신 정보를 사용하여 사람을 재구성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182면 네모]
우리의 접합부는 세어져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의 머리털까지도 모두 세어져 있습니다.” (마태 10:29-31) 그러면 우리의 머리 속에 있는 회백질은 어떠한가? 뇌 세포(뉴런이라고 부름)는 매우 작아서 해상력이 뛰어난 현미경을 사용해야만 볼 수 있다. 당신이 뉴런만이 아니라 뉴런보다 더 작은 상호 접합부(시냅스)까지도 세려고 시도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일부 뉴런의 경우에는 접합부가 25만 개까지 있을 수 있다.
피터 후튼로허 박사는 태아나 죽은 아기나 노인의 검시 과정에서 해상력이 뛰어난 전자 현미경을 사용하여 뉴런의 접합부를 세는 일을 최초로 시도하였다. 놀랍게도, 각각 핀 머리만한 모든 샘플에 대략 동일한 수의 뉴런이 있었는데, 약 7만 개의 뉴런이었다.
그런 다음 후튼로허 박사는 그처럼 작은 샘플에 들어 있는 뉴런의 접합부 즉 뇌 세포의 접합부의 수를 세기 시작하였다. 태아의 뉴런에는 1억 2400만 개의 접합부가 있었고, 신생아의 뉴런에는 2억 5300만 개의 접합부가 있었으며, 8개월 된 아기의 뉴런에는 5억 7200만 개의 접합부가 있었다. 그 후로는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그 수가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을 후튼로허 박사는 알아냈다.
성서에서 부활에 대해 알려 주는 내용을 생각해 볼 때, 새로 발견된 이러한 사실은 흥미를 끈다. (요한 5:28, 29) 성인 한 사람이 뇌 전체에 가지고 있는 뉴런의 접합부는 약 1000조 개, 즉 1에다 0을 15개 붙인 수가 된다. 창조주께서는 이 접합부를 셀 능력뿐 아니라 재구성할 능력도 가지고 계신가?
「월드 북 백과 사전」에서는 우주에 있는 별들의 수가 2만경 개, 즉 2에다 0을 20개 붙인 수라고 말한다. 창조주께서는 그 모든 별의 이름을 아신다. (이사야 40:26) 따라서 그분은 자신이 부활시키기로 정하신 사람의 뉴런의 접합부를 상기하고 재구성하여 그 사람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리는 일을 능히 하실 수 있다.
[166면 삽화]
많은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카르마의 순환을 믿는다
[171면 삽화]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알렉세이는 혈우병을 유전받았다. 우리도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불완전성을 유전받았다
[179면 삽화]
창조주께서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동안에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느낄 만한 것들을 많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