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우리도 그러한가?
1, 2. (ㄱ) 니네베에 대한 여호와의 판결에 대해 요나가 나타낸 반응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ㄴ) 하느님의 자비와 생명에 대한 그분의 견해를 검토해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는 기쁘셨습니다. 하지만 그 예언자는 침울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요나 같으면 그들을 멸절시켰을 터인데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적대해 온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생명을 보전해 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2 요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은 때때로 하느님의 관용의 폭을 이해하고 그분처럼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요나에게는 여호와께서 니네베 사람들을 살려 주기로 하신 것이 ‘매우 언짢은 일이었으므로, 화가 나서 격해졌습니다.’ 요나는 자비나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보다 자신의 감정을 더 중시한 것일 수 있습니까? 그는 니네베 사람들을 살려 주면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요나 4:1, 10, 11) 여호와의 심판 날이 급속히 다가오고 있는 우리 시대에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악행에 대해 회개하는 사람이 그분의 너그러우심으로부터 온전히 유익을 얻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바꾸어 말해,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는가?’
생명을 구하는 공의와 자비
3. 하느님의 공의와 그분의 자비는 상충되는 것입니까? 설명하십시오.
3 이 열두 예언서에는 하느님께서 진노해서 사람들을 벌하고 공의를 시행하신다는 내용이 곳곳에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자비가 어떻게 나타나 있단 말인가? 그분이 과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싶어 하시는가?’ 하고 물을지 모릅니다. 사실 하느님의 공의와 그분의 자비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용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공의와 자비는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그분의 고유한 성품의 두 가지 단면입니다. (시 103:6; 112:4; 116:5) 하느님께서 악한 사람들이 끼친 해악을 제거하시는 것은 의로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완전한 공의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온전히 공의로운 분인 여호와께서는 자비로우시게도 불완전한 사람들의 한계를 감안해 주십니다.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필요할 경우 심판을 하시지만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열두 예언자의 소식에는 그러한 완벽한 균형을 확증해 주면서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이제 그 점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을 알아보겠습니다.
4.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4 예언자 요엘은 질책하는 소식을 전하기는 하였지만 하느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분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의 친절이 풍부”하신 분이라는 점도 보증하였습니다. (요엘 2:13)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에 미가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용서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미가는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 누구이겠습니까?”라고 질문한 다음, 여호와를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당신은] 결코 그 분노를 영원히 품고 계시지 않을 것이니, 사랑의 친절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자비를 보이[실 것입니다].” (미가 7:18, 19) 니네베 사람들에 대한 요나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진노하셨다가도 그들이 뉘우치고 있음을 회개에 알맞은 일로 뒷받침하면 처벌하는 것을 기꺼이 재고하십니다.
5.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관심을 쏟으신다는 것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가장 감동적인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자신을 바친 사람들” 참조)
5 지금은 열두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시며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관심을 쏟으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러한 기록은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한 감동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강해지게 하고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도록 도와주는 일에 더욱 관심을 쏟게 해 줍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한 행로를 추구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베드로 둘째 3:9) 여호와께서 그것을 바라신다는 사실이 호세아가 간음한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면서 한 따뜻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해야 할 의무가 없으셨지만 그분 “자신의 자유 의지”로, 기꺼이 용서하셨습니다. (호세아 1:2; 2:13, 14; 3:1-5; 14:4) 이 점에 대한 하느님의 태도와 행동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점은 그리스도인 회중이 수행하는 일을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데, 그 일에는 당신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도록 돕는 활동
6.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근본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공개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주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참 하느님을 알게 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점 한 가지는, 그분은 처벌하시기 전에 분명하게 경고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관심을 쏟으신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이 죽지 않고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열두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행악자들이 길을 바로잡아 그분의 의로운 분노를 피할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비슷한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가오는 하느님의 복수의 날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공포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우리는 반응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보복 심리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주로 얼마의 사람들이 생명의 길에 들어서도록 돕기 위한 것임을 상기하도록 하십시오.—요엘 3:9-12; 스바냐 2:3; 마태 7:13, 14.
7. (ㄱ) 반드시 증거 활동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냉담에 직면할 때 여호와께서 나타내시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7 호별 방문에서 혹은 학교나 직장과 같은 곳에서 성서 진리를 전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11:3, 4) 물론 냉담과 무관심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끈기를 나타낸다면, 우리는 자신의 빗나간 백성에게 “부디 너희의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아오너라”라고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신 자비로운 하느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스가랴 1:4) 우리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명의 길을 알려 주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반복하거니와, 우리가 전파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시고 우리 역시 그것을 바라기 때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8. 하느님의 자비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의욕이 솟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하느님의 소식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거의 언제나 있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의욕이 솟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세아는 ‘여호와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의로운 사람들은 그 길로 걸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호세아 14:9) 많은 세월이 흘러 내려오면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너라’라는 하느님의 권고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왔습니다. (요엘 2:12) 그 말씀은 여호와를 이미 알고 있는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그 말씀에는 그분에 관해 이제 막 배우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과거의 그릇된 행로에 대해 후회하고 회개하며 돌이켜서 옳은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보전할 대열에 서게 됩니다.—디모데 첫째 4:16.
9. 니네베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을 볼 때 무엇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까?
9 여호와께서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신 데에는 또 다른 요인도 있었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그 사람들은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소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요나 3:5) 생명을 보전하려면 단순히 심판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회개하여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전파자가 되어 사람들이 선택의 기회를 갖도록 도와주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니네베 사람들에 관해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참 하느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그들이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선 것을 보시게 되었다. 그래서 참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던 재앙에 대해 한탄하시고, 재앙을 일으키지 않으셨다.” (요나 3:10) 여호와는 그저 말 잘하는 것이나 겉치레뿐인 행동에 속을 분이 아니십니다. 필시 니네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음을 행동을 통해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달라졌으며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회개했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신 어떤 예들이 있습니까?
10 여호와께서 생명을 구하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유익을 얻은 사람들은 니네베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바댜와 나훔과 하박국이 그들의 직무를 마친 후인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순종한 예레미야와 그의 충실한 동료들의 무리에게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39:16-18) 그리고 하느님의 예언자들은 회개한 남은 자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와 순결한 숭배를 회복시킬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 7:8-10; 스바냐 3:10-20) 그러한 예언은 현대에 웅대하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상당수가 참 숭배에 대해 느슨해져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회복되어 열심히 활동함으로 여호와의 은혜를 받게 되었으며 생명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여호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2:11) 그들에게는 이 사물의 제도의 다가오는 끝을 생존할 전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의 직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기 때문에 수행하는 단순한 순종 행위가 아닙니다. 단지 예언을 성취시키려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마태 24:14; 28:19, 20) 우리의 공개 봉사의 직무의 주안점은 사람들이 여호와에 관해 배우고 믿음을 나타내어 생명을 보전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11, 12. 하느님의 자비는 한때 그분의 숭배자였던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유익할 수 있습니까?
11 여호와께서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시지만, 이미 그분을 섬겨 온 사람들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생명의 길에 머물러 있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실질적인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12 여호와에 관해 배워 그분에게 믿음을 나타내고 참 숭배에 열심이었는데 지금은 그분을 섬기고 있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열두 예언자를 통해 전하신 소식에서는 한때 그분의 백성에 속해 있었지만 참 숭배에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분이 기꺼이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분은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십니다. 떠내려간 사람에게든, 스스로 떠나간 사람에게든, 범죄에 빠져 회개할 필요가 있게 된 사람에게든 기꺼이 자비를 베푸십니다. (히브리 2:1; 3:12) 그들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있으면 행복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들은 돌아오는 것도 어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렇게 말한다. ‘내게로 돌아오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다.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스가랴 1:3) 호세아의 말도 참으로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너라. 네가 네 잘못으로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너라. 너희 모두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잘못을 사하여 주시고 좋은 것을 받아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더라도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용서를 받고 온전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호세아 6:1; 14:1, 2; 시 103:8-10) 그 예언자들의 시대에 그러하였고 우리 시대에도 그러합니다.
13.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사람들에게 우리도 자비로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이것은 생명의 길에 머물러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사람들을 여호와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봉사를 일시적으로 중단한 사람들에게도 자비로울 것을 기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바라시는 바를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사랑의 친절을 기뻐하고 희생을 기뻐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언급하여 그 사상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십시오.” (호세아 6:6; 마태 9:13) 그러한 자비를 나타내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을 본받는 것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사도 바울이 한 이러한 말에도 유의하십시오. “도리어 서로 친절하게 대하고, 부드러운 동정심을 나타내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기꺼이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기꺼이 용서하십시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계속 걸으십시오.” (에베소 4:32-5:2) 우리는 이 점에서 과연 하느님을 본받고 있습니까?
14, 15. 여호와의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 상황에서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14 심각한 죄를 지은 형제가 회개하지 않아서 회중에서 추방된 경우라면 어떠합니까? 과거 일 세기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제명되어야 하였습니다. 예수의 사도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오늘날 그런 일이 때때로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경우에 회중 내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추방된 사람과 교제하지 말라는 성서의 지침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충성을 지킬 때 범죄한 사람은 자신의 그릇된 행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수 있으며, 마음이 움직여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는 고린도에서 한 남자가 추방되었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켜서 복귀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 첫째 5:11-13; 고린도 둘째 2:5-8) 오늘날 그러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느낍니까?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15 범죄하였다가 회개한 사람은 부끄럽고 낙심해서, 하느님과 형제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대에 회개하려고 한 자신의 백성을 이러한 말로 매우 부드럽게 안심시켜 주셨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내가 충실함으로 너와 약혼하리니, 네가 반드시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호세아 2:20) 하느님의 마음이 그러하므로, 우리도 스가랴가 ‘자비를 보이시는’ 분으로 묘사한 하느님과 같은 마음임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스가랴 10:6.
16. 우리는 복귀하는 사람이 있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까?
16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이 회개하거나 이전에 무활동이었던 종이 열심을 되찾으면 기뻐하십니다.a (누가 5:32) 앞서 언급된 고린도의 복귀한 남자와 관련하여, 바울은 회중에게 그를 용서하고 격려하여 그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준 꾸짖음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 그를 친절하게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삼켜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그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을 확증하도록 권고합니다.” (고린도 둘째 2:6-8) 이전에 죄인이었던 사람들에 관해 호세아가 인용한 여호와의 말씀 즉 “내가 그들의 불충실을 고쳐 주고, 내 자신의 자유 의지로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는 말씀도 기억하십시오. (호세아 14:4) 우리는 여호와를 본받아 그처럼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일을 기꺼이 도울 것입니까?
17, 18. 여호와께 돌아온 사람이나 제명된 사람의 가족 성원들을 어떻게 사랑으로 도울 수 있습니까?
17 호세아가 이전에 불충실했던 아내를 기꺼이 다시 받아들였던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돌아오는 자들을 존귀하게 대하여 다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온전한 사랑을 받게 하실 것임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어떻게 자신의 종들을 대했는지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턱에 있는 멍에를 들어올려 주는 자들처럼 되었으며, 부드럽게 각 사람에게 양식을 가져다 주었다.” (호세아 11:4) 그러한 돌아오는 자들을 부드럽게 이끄시는 여호와의 애정은 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우리도 경건한 방식으로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을 엄하거나 냉랭하게 대하지 않음으로 그분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이 회중 내로 받아들여졌다면 그의 과거의 잘못 때문에 그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내거나 싫어할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위안의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데살로니가 첫째 5:14.
18 회중의 제명 처분 마련과 관련하여 여호와를 본받는 방법이 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추방되어야 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충성스러운 가족 성원들, 이를테면 충실한 배우자나 자녀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그들은 변함없이 집회에 참석하고 봉사에 참여하려고 고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할 각별한 지원을 베풀 것입니까? 부드러운 자비를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은 ‘선한 말, 위로의 말’을 통해 그러한 충실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대화를 솔선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1:13) 집회 전후나 함께 봉사할 때를 비롯하여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습니다. 그들은 회중 성원들이 멀리한다거나 따돌린다는 느낌을 받아서는 안 될 동료 일꾼들이며 회중의 소중한 성원들입니다. 때로는 부모가 제명되어 자녀들만 여호와를 섬기려고 애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아버지 없는 소년에게도 자비를’
19. 스바냐는 “아버지 없는 소년”이라고 할 만한 한 왕에게 어떤 영적 도움을 베풀었습니까?
19 기원전 7세기 중반에 활동한 스바냐의 봉사를 살펴보면 도움을 베푸는 일을 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는 유다의 왕족으로 아마도 요시야 왕의 먼 친척이었을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아버지가 암살되어 여덟 살 때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만만찮은 것이었습니다. 나라가 우상 숭배와 가증한 행위들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1-7) 그 빗나간 나라를 다스리려면 아버지 없는 어린 요시야는 노련한 지도와 건전한 조언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책 앞부분의 장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스바냐를 비롯한 예언자들을 통해 현명한 인도를 베푸셨습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통해 유다의 “방백들”을 책망하실 때 요시야 왕은 비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1:8; 3:3) 이것은 어린 요시야 왕이 순결한 숭배를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이미 나타냈음을 알려 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스바냐의 훈계는 틀림없이 요시야가 유다에서 불결한 숭배를 일소하려는 결의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20. 회중의 “아버지 없는” 청소년들을 영적으로 지도해 주는 일은 그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20 스바냐가 요시야에게 관심을 기울인 일은, 제명된 부모와 사는 자녀들처럼 도움이 필요하고 해를 입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여호와께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을 예시해 줍니다. 호세아는 “아버지 없는 소년이 [하느님에] 의해서 자비를 받”는다고 단언하였습니다. (호세아 14:3) 영적인 생활과 실생활에서 지도해 줄 사람이 필요한, “아버지 없는” 소년 소녀가 그 외에 또 있습니까? 영적인 고아나 홀어버이 가정의 자녀, 가족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청소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느냐의 여부가 그러한 청소년들이 얼마나 회중과 밀접히 연합하여 영적으로 장성해 나갈 것인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많은 “아버지 없는 소년”들은 회중의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기울여 준 사랑에 찬 관심에 힘입어 균형 잡힌 영적인 성인으로 발전하였습니다.—시 82:3.
21.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은 청소년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21 예를 들어, 홀어머니라면 장성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때 고마워할 것입니다. (야고보 1:27) 감독자들을 비롯하여 회중 성원들은 머리 직분을 합당히 존중하고 과도한 행동을 삼가면서 불우한 가정에 속한 사람들에게 영적 지원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의 배우자가 혹은 우리의 가족이 아버지 없는 소년이나 소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을지 모르는 청소년들에게 사려 깊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그들은 감정 이입을 해 줄 사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할지 모르는데, 우리는 공개 봉사의 직무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바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청소년에게 상당한 기간 그러한 도움을 정기적으로 베푸는 것은 우리의 “사랑의 진실함을 시험”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둘째 8:8)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얼마나 바라는지를 보여 줍니다.
22.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느낍니까?
22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그들이 영원히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분이 바라시는 바는 굳이 구제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영원히 살기에 부적합한 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노여움을 표현하시는 것보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그들이 생명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의 날을 열렬히 기다리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길에 들어서도록 도움으로 그분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a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빗나간 자들을 깊이 염려하신다는 사실이 가슴 뭉클하게 하는 세 가지 예, 즉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주화, 탕자의 예에 나타나 있다.—누가 15: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