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resurrection)
그리스어 아나스타시스의 문자적 의미는 “일으키다, 일어서다”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된다. 사도 바울이 인용한(고첫 15:54, 55) 히브리어 성경 호세아 13:14은 죽음을 없애는 것과 스올(히브리어, 셰올; 그리스어, 하데스)을 무력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셰올은 여러 역본에서 “묘”와 “구덩이”로도 번역되어 있다. 죽은 자가 그리로 간다고 되어 있다. (창 37:35; 왕첫 2:6; 전 9:10)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셰올의 용법과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데스의 용법을 보면, 그 단어가 개개의 묘가 아니라 인류의 일반 무덤, 무덤의 영역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겔 32:21-32; 계 20:13. 스올; 하데스 참조) 스올을 무력하게 한다는 말은 스올로 하여금 그 안에 잡고 있는 자들을 풀어 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무덤의 영역이 텅 비게 됨을 의미한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부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무덤에 있는 자들을 생명 없는 상태인 죽음에서, 무덤에서 일으키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앞서 언급한 내용에서 알려 주듯이 부활 가르침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온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좋은 소식을 통하여 생명과 부패하지 않음에 빛을 비추”시는 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디둘 1:1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습니다.” (요 14:6) 과연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 그에 더하여 일부 사람들의 경우 부패하지 않는 일이 어떻게 있게 되는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좋은 소식을 통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사도는 부활이 확실한 희망임을 확언하면서 이렇게 논증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셨다고 전파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만일 참으로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킴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일으킴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일도 분명히 헛되고 우리의 믿음도 헛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또한 하느님의 거짓 증인들로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그분이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증언한 것이며,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일으킴을 받지 못한다면, 그분이 그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일으킴을 받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쓸모가 없고, 여러분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아 죽어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있게 되었으므로, 죽은 사람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있게 되었습니다.”—고첫 15:12-21.
그리스도 자신이 지상에 계실 때 사람들을 부활시키셨다. (누 7:11-15; 8:49-56; 요 11:38-44) 부활한 후에 영원한 생명이 따르는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요 5:26.
하느님의 확실한 목적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믿지 않는 분파인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소유하고 있고 믿는다고 공언하는 히브리어 성경 내의 모세의 기록에서 부활이 있음을 증명한다고 지적하셨다. 여호와께서 자신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실은 죽어 있는 자들인) 그들을 부활시킬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셨다고 예수는 추리하면서,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할 때 이 사실을 포함시킨다.—마 22:23, 31-33; 로 4:17.
부활시키는 일을 하실 하느님의 능력 완전한 몸을 갖추고 또 인간성 안에 심어진 놀라운 특성을 온전히 표현할 잠재력도 갖춘 존재인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할 역량과 능력을 지닌 분에게 있어서 개인을 부활시키는 일은 큰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하느님이 확립하신 과학적 원리를 과학자들이 사용하여 동영상 형태로 영상과 음성을 보존했다가 나중에 재생할 수 있다면, 위대한 우주 주권자이자 창조주인 분이 새로 지은 몸에 동일한 인간성을 다시 형성하여 개인을 부활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사라가 노년에 출산력을 회복하여 아이를 갖게 되는 일과 관련하여 “여호와에게 너무 벅차서 못 할 일이라도 있느냐?” 하고 천사가 말한 적이 있다.—창 18:14; 렘 32:17, 27.
부활이 필요하게 된 이유 시초에는 부활이 필요치 않았다.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원래 목적에는 부활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죽음이 인간에게 당위적인, 의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하느님은 쇠퇴하고 죽어 가는 인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땅에 충만해지도록 의도하였음을 시사하셨다. 그분의 작품은 완전하였으므로, 결함이나 불완전한 점이나 병이 없었다. (신 32:4) 여호와께서는 첫 인간 부부를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셨다. (창 1:28) 그런 축복에는 확실히 병과 죽음이 포함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수명을 제한해 놓지 않으셨으나, 불순종하면 죽음이 초래될 것이라고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은 사람이 순종할 경우 영원히 살 것임을 의미한다. 불순종하면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잃게 되며 저주를 초래할 것이었다.—창 2:17; 3:17-19.
따라서 아담의 범법으로 인해 인류에게 죽음이 들어온 것이다. (로 5:12) 아담의 자손은 조상의 죄 있는 상태와 그로 인한 불완전성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라는 유산을 받을 수 없었으며, 사실상 영원히 살 희망조차 받지 못하였다.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마 7:17, 18; 욥 14:1, 2) 아담의 자녀들 중 하느님께 순종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이 그런 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부활 마련이 도입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 마련이 덧붙여졌다.
부활의 목적 부활은 여호와의 능력과 지혜의 무한함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자비도 보여 주며 그분이 자신을 섬기는 자들의 보존자임을 입증해 준다. (삼첫 2:6) 부활 능력을 지니고 계시기에 그분은 자신의 종들이 죽기까지 그분에게 충실함을 나타내게 하실 수도 있다. 그분은 사탄의 비난 즉 “가죽은 가죽으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줍니다”라고 단언한 비난에 대해 답변하실 수 있다. (욥 2:4) 여호와께서는 사탄이 극한까지 가도록, 심지어 자신의 거짓 비난을 뒷받침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면서 일부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하도록 허용하실 수 있다. (마 24:9; 계 2:10; 6:11) 여호와의 종들이 그분의 봉사에서 생명 자체도 기꺼이 포기하려 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봉사가 이기적인 속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증거이다. (계 12:11) 그것은 또한 그들이 그분을 전능자, 우주 주권자, 사랑의 하느님, 그들을 부활시킬 수 있는 분으로 인정한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께 전적인 정성을 바치는 이유가 그분의 훌륭한 특성 때문이지 이기적인 물질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로 11:33-36 그리고 계 4:11과 7:12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종들이 표현한 찬사 고려) 부활은 또한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땅에 대한 그분의 목적이 실현되게 하는 수단이다.—창 1:28.
사람의 행복에 꼭 필요하다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의 표현인 죽은 자의 부활은 인류의 행복에 꼭 필요하며, 인류에게 임한 온갖 해악과 고통과 압제를 제거하여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도 꼭 필요하다. 이런 일들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병, 인간이 저지른 전쟁과 살인 행위, 사탄 마귀의 사주를 받아 악인들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행위의 결과로 인간에게 임한 것이다.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온전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심정을 사도 바울은 이런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에만 희망을 두었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고첫 15:19.
부활 희망은 얼마나 일찍 주어졌는가?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을 자초하고 그로 말미암아 자손들에게도 죽음을 초래한 뒤에 하느님은 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너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둘 것이다. 그는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시초에 죽음을 야기한 장본인이 제거되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반대한 독실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의 욕망을 행하고자 합니다. 그는 시작할 때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안에 굳게 서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 8:44) 이 말은 뱀을 도구로 사용하여 말한 자가 마귀이며 그 자가 거짓말하는 마귀적인 행로를 시작한 이후로 살인자였다는 증언이다. 후에 그리스도는 요한에게 보여 준 환상에서 사탄 마귀가 “원래의 뱀”으로도 불린다고 밝히셨다. (계 12:9) 사탄은 인류의 아버지인 아담을 유인하여 하느님께 반역하게 함으로써 아담의 자녀들에 대한 영향력을 얻어 인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창세기 3:15의 첫 예언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뱀이 제거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셨다. (로 16:20 비교) 사탄의 머리가 부서질 뿐만 아니라 그가 한 모든 일도 분쇄되거나 파멸되거나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요첫 3:8, 「신세」, KJ, AT) 이 예언이 성취되려면 아담이 초래한 죽음을 제거하고 원상 복구하는 일이 꼭 있어야 한다. 이 일에는 아담의 죄의 결과로, 유전받은 죄의 영향으로 스올(하데스)에 가는 아담의 자손들을 부활시켜 돌아오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고첫 15:26.
자유의 희망에는 부활이 수반된다 사도 바울은 인간이 죄에 빠진 이후 하느님이 존재하게 허락하신 상황과 또 그렇게 하신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묘사한다. “창조물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죄 가운데 출생하고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자기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아담의 자녀는 아담이 행한 일에 관여할 수 없었고, 선택의 여지도 없지만, 세상에 출생하여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됨] 자기를 복종시키신 분[지혜로 그렇게 하신 하느님]에 의한 것이며, 희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희망은 창조물 자신도 부패의 종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 8:20, 21; 시 51:5) 영광스러운 자유라는 이 희망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려면 죽은 자들이 부활되어야 하며, 죽음과 무덤에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씨”에 관한 약속으로 인류 앞에 놀라운 희망을 정해 놓으신 것이다.—씨 참조.
아브라함의 믿음의 기초 성서 기록의 증거가 밝혀 주듯이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였을 때 죽은 자를 일으키실 하느님의 능력과 목적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히브리 11:17-19에 기술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예시적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삭을 도로 받은 셈이다. (창 22:1-3, 10-13) “씨”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질 근거가 있었다. (창 3:15) 또한 아브라함과 사라는 출산력이 되살아난 일에서 부활에 비할 만한 것을 이미 체험하였다. (창 18:9-11; 21:1, 2, 12; 로 4:19-21) 욥도 심한 고통을 당할 때 그와 비슷한 믿음을 표현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오, 당신이 저를 스올에 감추시고, ··· 저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저를 기억해 주신다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 당신은 부르시겠고 저는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며,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그리워하실 것입니다.”—욥 14:13-15.
대속이 있기 전의 부활 부활은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있기도 하였다. (왕첫 17:17-24; 왕둘 4:32-37; 13:20, 21) 하지만 이렇게 부활된 사람들은 다시 죽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부활시킨 자들과 또 사도들이 부활시킨 자들 역시 다시 죽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부활되었다고 해서 언제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사로는 친구인 예수에 의해 부활되었으므로 기원 33년 오순절에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성령이 부어져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첫 성원들(히 3:1)은 기름부음을 받고 영으로 출생하였다. (행 2:1-4, 33, 38) 나사로의 부활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행한 부활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나사로에게는 부활로 말미암아 필시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을 받을 기회가 열렸을 것이다. 나사로가 부활되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실로 놀라운 사랑의 행동을 보이신 것이다!—요 11:38-44.
“더 나은 부활” 고대의 충실한 자들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사람을 부활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얼마의 대속물로 석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히 11:35) 이 사람들은 부활 희망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으며, 당시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받게 될 부활은 그리스도가 부활되시어 자신의 대속 희생의 가치를 가지고 하늘에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신 이후에 있게 된다. 그렇게 나타나셨을 때 그리스도는 인류의 생명의 권리를 도로 사서 “영원한 아버지”가 될 역량을 갖추셨다. (히 9:11, 12, 24; 사 9:6)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영”이시다. (고첫 15:45) 그분은 “죽음과 하데스[스올]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시다. (계 1:18) 이제 영원한 생명을 줄 권위를 지닌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정하신 때에 “더 나은 부활”을 행하신다. 그 부활을 받는 자들은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누구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죽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순종한다면 계속 살 것이다.
하늘 부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라 불린다. (골 1:18) 그분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된 최초의 분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영으로”, 하늘에서의 생명으로 부활되셨다. (베첫 3:18) 더욱이 그분은 땅으로 오기 전에 하늘에서 지녔던 것보다 더 고등한 형태의 생명으로 그리고 더 높은 위치로 일으킴을 받으셨다. 그분은 불멸성과 부패하지 않음—육체로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것—을 받으셨으며, “하늘들보다 더 높게” 되시어 우주에서 여호와 하느님 바로 다음가는 위치에 있게 되셨다. (히 7:26; 디첫 6:14-16; 빌 2:9-11; 행 2:34, 35; 고첫 15:27) 여호와 하느님이 친히 예수를 부활시키셨다.—행 3:15; 5:30; 로 4:24; 10:9.
하지만 예수는 부활되신 뒤 40일 동안 여러 경우에 다양한 육적인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고대에 천사들이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과 같았다. 그 천사들처럼 예수도 원한다면 그런 육적인 몸을 구성하거나 해체시킬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자신이 부활되었음을 보이게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마 28:8-10, 16-20; 누 24:13-32, 36-43; 요 20:14-29; 창 18:1, 2; 19:1; 수 5:13-15; 판 6:11, 12; 13:3, 13) 그분이 여러 번 나타나고 특히 한 번에 500여 명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일은 그분이 참으로 부활되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고첫 15:3-8) 그분의 부활이 매우 잘 인증되었으므로, 앞으로 결산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이 확실히 있을 것이 “모든 사람에게 보증”된 셈이다.—행 17:31.
그리스도의 “형제들”의 부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충실한” 사람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추종자들, 그분의 “형제들”, 영으로 출생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부활을 받을 것이 약속되어 있다. (계 17:14; 로 6:5; 8:15, 16; 히 2:11) 사도 베드로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찬송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자기의 큰 자비에 따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우리를 새로 나게 하셔서 우리에게 산 희망이 있게 하시고, 부패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예비된 것입니다.”—베첫 1:3, 4.
베드로는 또한 그런 자들이 소유하는 희망이 “귀중하고도 매우 웅대한 약속들”이며 “그 약속들을 통하여 신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베둘 1:4) 그들은 본성을 바꾸어 인간의 본성을 포기하고 “신의” 본성을 얻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영광에 참여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죽어야—충절을 지키고 인간 생명을 영원히 포기해야—한다. 그런 다음 부활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몸인 불멸이자 부패하지 않는 몸을 받는다. (로 6:3-5; 고첫 15:50-57; 고둘 5:1-3) 부활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설명하면서, 그들이 경험할 일을 씨가 심겨 싹이 트는 것에 비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기뻐하시는 대로 몸을 주시”기 때문이다. (고첫 15:35-40) 부활되는 것은 영혼 즉 개인이며, 하느님이 부활시키시는 환경에 맞는 몸을 지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간 생명을 인류의 유익을 위한 대속 희생물로 바치셨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영감받은 필자는 시편 40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며, 예수께서 하느님의 메시아로 “세상에 오”셨을 때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저를 위하여 몸을 예비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히 10:5) 예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입니다.” (요 6:51) 따라서 그리스도가 부활될 때 자신의 몸을 다시 취함으로 인류를 위해 하느님께 바친 희생물을 도로 찾으실 수는 없게 된다. 그에 더하여 그리스도는 더 이상 지상에 거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있는 곳”은 하늘이며, 육체가 아니라 영이신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곳이다. (요 14:3; 4: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불멸이자 부패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받으셨다. “그는 하느님[여호와]의 영광의 반영이요 하느님의 존재 자체의 정확한 표상이며, 모든 것을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천사들[위력 있는 영적 인격체들]보다 더욱 탁월한 이름을 상속받으심으로, 그만큼 그들보다 뛰어나게 되셨습니다.”—히 1:3, 4; 10:12, 13.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형제들은 인간 생명을 포기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재형성된 즉 변화된 새로운 몸을 가져야 한다고 이렇게 알려 준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가지고 계신 능력[의] ··· 작용에 따라, 비천한 우리의 몸을 변화시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빌 3:20, 21.
하늘 부활의 시기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이 하늘로 부활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 자신의 영적 형제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하늘 영광을 지니고 돌아오신 뒤에 시작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죽어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라 불리신다. 이어서 바울은 각자 자기 순위대로 부활될 것이라고, “첫 열매는 그리스도요, 그 후에는 그의 임재 중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고첫 15:20, 23) 오순절의 첫 성원들을 필두로 하여 “하느님의 집”인 이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 인생 행로 중에 심판을 받아 왔다. (베첫 4:17) 그들은 “일종의[문자적으로 ‘얼마의’] 첫 열매”이다. (야 1:18, Int; 계 14:4)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니산월 16일에 바친 보리 첫 열매(“첫 열매는 그리스도”)에 비해질 수 있고, “첫 열매”(“일종의 첫 열매”)인 그분의 영적 형제들은 니산월 16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바쳐진 밀 첫 열매에 비해질 수 있다.—레 23:4-12, 15-20.
이들은 심판을 받아 왔으므로,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는 그분의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자들인 그들에게 상이 주어질 때이다. 이는 그분이 죽기 전 저녁에 열한 명의 충실한 사도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바와 같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장소를 준비하러 갑니다. 또한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맞이하여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요 14:2, 3; 누 19:12-23. 디둘 4:1, 8; 계 11:17, 18 비교.
“‘어린 양’의 결혼” 이들은 하나의 집합체로서 예수의 (장래) “신부”라 불린다. (계 21:9) 그들은 그분과 결혼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며, 그들은 “‘어린 양’의 결혼”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늘로 부활되어야 한다. (고둘 11:2; 계 19:7, 8) 사도 바울은 하늘 부활을 받기를 고대하였다. (디둘 4:8) 그리스도의 “임재”가 시작되면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그분의 영적 형제들 중에 지상에 살아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부활을 통해 먼저 주의가 기울여지게 된다. (계 19:9) 이 사실이 데살로니가 첫째 4:15, 16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주의 임재 때까지 살아남는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결코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느님의 나팔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며,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죽어 있는 사람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여 말한다. “그 후에, 살아남아 있는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에 싸여 이끌려 가서 공중에서 주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첫 4:17) 그러므로 “‘어린 양’의 결혼 만찬”에 초대를 받은 남아 있는 자들은 충실한 상태로 죽어 지상 행로를 마치자마자 즉시 부활되어 하늘에서 신부 반열에 속한 동료 성원들과 연합하게 된다. 그들은 사도들과는 달리 긴 잠을 자며 기다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죽어 잠들”지 않을 것이며, 죽자마자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동안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에 변화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들이 부패하지 않을 것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고첫 15:51, 52) 그런데 “‘어린 양’의 결혼”은 “큰 바빌론”에 심판이 집행된 후에야 거행될 것이다. (계 18장) 이 “큰 창녀”가 멸망되는 일이 묘사된 후에 계시록 19:7은 이렇게 말한다. “함께 기뻐하고 기쁨에 넘쳐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결혼날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14만 4000명 모두가 마침내 충실한 자들로서 승인을 받고 ‘인장이 찍히고’ 하늘로 부활되었을 때 결혼식이 거행될 수 있다.
첫째 부활 계시록 20:5, 6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자들의 부활을 “첫째 부활”이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은 이 첫째 부활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른 부활[문자적 의미는 ‘죽은 (자들) 밖으로 밖의 부활’]”이라고도 묘사한다. (빌 3:11, 「신세」, Ro, Int)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에 대하여 로버트슨의 「신약 단어 해설」(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1931년, 4권, 454면)은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신자들의 부활만을 염두에 두었기에 에크[밖](텐 엑사나스타신 텐 에크 네크론)를 겹쳐 사용하였을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은 일반 부활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의 부활을 강조하는 말이다.” 찰스 엘리콧의 「주석」(Commentaries, 1865년, 2권, 87면)에서는 빌립보 3:11에 대해 이렇게 기술한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 즉 문맥에서 시사하듯이 첫째 부활(계 20:5). 이때는 주께서 오시어 그분 안에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데첫 4:16), 살아 있는 자들은 구름 속에서 그분을 만나기 위하여 이끌려 가는 때(데첫 4:17)이다. 누가 20:35 비교. 첫째 부활은 참 신자들만 포함하며, 시기상 둘째 부활 즉 불신자들과 비신자들의 부활보다 앞설 것으로 보인다. ··· 여기서 단지 윤리적 의미의 부활과 연관 지으려는 어떤 시도도(콕세이우스) 논점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다.” 엑사나스타시스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 중 하나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일찍 있는 부활, 달리 말해서 “첫째 부활”이라 불리는 부활을 잘 나타낼 수 있다. 로더럼의 번역판은 빌립보 3:11을 이렇게 옮긴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오는 이른 부활로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지상 부활 예수께서 기둥에 달려 계실 때 곁에 달린 한 행악자는 예수께서 처벌받으셔야 할 분이 아님을 알아차리고서 “예수여, 당신의 왕국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진실로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말하는데,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변하셨다. (누 23:42, 43) 사실상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왕국에 대한 나의 주장이 외견상 도무지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이 암울한 날에 당신은 믿음을 표현하는군요. 진실로 내가 왕국에 들어갈 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낙원 참조) 이렇게 되려면 행악자가 부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추종자가 아니었다. 그는 범죄 행위에 빠져 법을 어김으로 사형을 당해야 할 사람이었다. (누 23:40, 41)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첫째 부활을 받을 자 중에 속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었다. 그에 더하여 그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40일 전에 죽었으므로 오순절 이전에 죽은 것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10일 후인 오순절에 하느님은 하늘 부활을 받을 자들의 첫 성원들에게 예수를 통하여 기름부음을 행하셨다.—행 1:3; 2:1-4, 33.
예수께서는 그 행악자가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낙원이란 말은 “공원이나 유원지”를 의미한다. 「칠십인역」은 창세기 2:8에 나오는 “동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간)를 그리스어 파라데이소스로 옮겼다. 행악자가 있게 될 낙원은 계시록 2:7에서 “이기는 사람”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낙원”이 아닐 것이다. 행악자는 예수 그리스도와는 달리 세상을 이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요 16:33) 따라서 행악자는 하늘 왕국의 성원으로서 하늘에 있지 않고(누 22:28-30), “첫째 부활”을 받는 자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왕들로서 왕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할 때 왕국의 신민이 될 것이다.—계 20:4, 6.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 역시 부활 희망을 품고 있던 일단의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말을 하였다.—행 24:15.
성서는 “의로운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려 준다. 우선, 하늘 부활을 받게 되는 자들은 의롭다고 선언된다.—로 8:28-30.
또한 성서는 아브라함 같은 고대의 충실한 자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창 15:6; 야 2:21) 이 사람들 중 다수는 히브리 11장에 열거되어 있으며, 그들에 대해 히브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모두 자기 믿음을 통하여 증언을 얻었지만, 약속의 성취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바울처럼 영으로 출생하고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를 위하여 더 나은 것을 내다보시고, 그들이 우리를 떠나서는 완전해지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 11:39, 40) 그러므로 그들을 완전하게 하는 일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을 완전하게 하는 일이 있은 후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계시록 7장에 묘사된 “큰 무리”가 있다. 이들은 ‘인장이 찍힌’ 14만 4000명의 성원이 아니므로 영으로 출생했다는 영의 “증표”가 없는 사람들이다. (엡 1:13, 14; 고둘 5:5)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생존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이 집단을 모으는 일이 큰 환난 바로 전인 마지막 날에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이들은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고,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긴옷을 입고 있다. (계 7:1, 9-17) 한 반열로서 그들은 부활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의 충실한 자들 중에 큰 환난 전에 죽는 이는 하느님이 정하신 때에 부활될 것이다.
또한 인류의 일반 무덤인 스올(하데스)에 또는 수중 무덤인 “바다”에 장사된 “불의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지상에 부활된 “의로운 사람들”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심판이 계시록 20:12, 13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또 나는 죽은 사람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왕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두루마리들이 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두루마리가 펴 있었는데, 그것은 생명의 두루마리이다. 죽은 사람들이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따라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주고 죽음과 하데스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주어, 그들이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았다.”
지상 부활의 시기 유의할 만하게도 이 심판은 그리스도가 보조 왕 겸 제사장들과 더불어 다스릴 천년 통치 중에 있을 사건들에 관한 성서 기록 가운데 나온다. 이들이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고첫 6:2) “큰 자나 작은 자” 즉 온갖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어 공정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그때에 펴 있을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이 두루마리가 그들의 과거 삶에 대한 기록이나 그들의 과거 삶을 근거로 그들을 심판하는 법규집을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이므로, 그들은 죽었을 때 과거의 죄의 삯을 받은 것이다. (로 6:7, 23) 이제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나타내고 모두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의 혜택을 받고 싶어 하는지의 여부를 나타낼 수 있도록 부활된 것이다. (마 20:28; 요 3:16) 그들은 과거의 죄로 문책받지는 않으나, 완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대속물이 필요하다. 그들은 이전의 생활 방식과 사고방식에서 정신을 변화시켜 땅과 그 거주자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규정과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 두루마리들”은 심판 날 중에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법을 제시할 것이며, 그런 것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 심판의 근거가 되고 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도록, 마침내 “생명의 두루마리”에 기록되게 할 근거가 될 것이다.
생명에 이르는 부활과 심판에 이르는 부활 예수께서는 위안이 되는 보증을 인류에게 주셨다. “죽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유의한 사람들이 살 시간이 오고 있는데, 그 시간은 지금입니다. ··· 이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기념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시간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에, 사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에 이를 것입니다.”—요 5:25-29.
정죄의 심판 예수의 이 말씀 가운데 “심판”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크리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파크허스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I. 심판. ··· II. 심판, 공의. 마 23:23. 12:20 비교. ··· III. 정죄의 심판, 정죄, 단죄. 막 3:29. 요 5:24, 29. ··· IV. 정죄나 처벌의 이유 또는 근거. 요 3:19. V. 유대인의 특정 법정, ··· 마 5:21, 22.”—「신약 희영 사전」(A Greek and English Lexicon to the New Testament), 런던, 1845년, 342면.
예수께서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재판 결과가 생명인 재판을 가리키신 것이라면 이것과 “생명의 부활”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맥에서 시사하듯이, 예수께서 “심판”이라고 하신 것은 정죄의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지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죽은 사람들” 예수의 말씀을 고려하면 “죽은 사람들” 중 일부가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베드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이런 목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선포되었으니, 곧 그들이 육으로는 사람의 관점에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베첫 4:6)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자들이 그 말씀을 듣기 전에는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좋은 소식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엡 2:1. 마 8:22; 디첫 5:6 비교.
요한 5:29은 심판기의 끝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매우 중요한 점 즉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에 관한 예수의 말씀에서 가리키는 시기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점은 그분이 같은 문맥에서 조금 앞서 당시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점이다(‘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감’ 부제 아래 설명됨). “죽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유의한 사람들[문자적 의미는 “들은 (자들)”]이 살 시간이 오고 있는데, 그 시간은 지금입니다.” (요 5:25, Int) 이로 보건대, 예수의 말씀은 단순히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들은” 자들 즉 말씀을 들은 뒤에 들은 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듣다’, ‘잘 듣다’라는 단어는 성서에서 ‘유의하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로 매우 자주 사용된다. (순종 참조) 순종하는 자로 증명된 사람들은 살 것이다. (요 6:60; 8:43, 47; 10:3, 27에서 ‘듣다’ 또는 ‘잘 듣다’로 번역된 동일한 그리스어[아쿠오]의 용법 비교) 그들은 그분의 음성을 듣기 전에 한 일이 아니라 들은 후에 하는 일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과 “사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때에 대해 비슷한 입장을 취하신 것 같다. 말하자면 부활된 그들이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기회를 가진 후에 심판기의 끝에 그들이 나타낸 행동을 되돌아보거나 검토하는 입장이다. 심판기의 끝이어야만 누가 선행을 하고 누가 악행을 했는지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따라) “선한 일을 행한 사람들”의 결과는 생명의 상이고, “사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의 결과는 정죄의 심판일 것이다. 부활은 결국 생명에 이른 부활이 되거나 정죄에 이른 부활이 될 것이다.
사물을 결과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말하는 관행 즉 되돌아보듯이 고려하면서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말하는 관행은 성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느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알려 주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오래 전부터 알려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 46:10) 유다 역시 이와 동일한 관점을 사용하여, 회중에 몰래 들어온 부패한 자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에게는 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카인의 길로 갔고, 대가를 위하여 발람의 잘못된 행로로 돌진해 갔으며, 고라의 반역적인 말로 망하였기[문자적으로 ‘그들은 자멸하였기’] 때문입니다!” (유 11) 일부 예언들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사 40:1, 2; 46:1; 렘 48:1-4 비교.
그러므로 요한 5:29에 나오는 관점은 사도행전 24:15에 나오는 관점과 다른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분명히 현재의 생애 중에 하느님 앞에서 의롭거나 불의한 입장에 있다가 부활될 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념 무덤에 있는 사람들’이다. (요 5:28. 기념 무덤 참조) 요한 5:29에서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기념 무덤에서 나온 이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보조 왕 겸 제사장들의 통치 중에 순종하여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만한지, 불순종하여 하느님의 “심판[정죄]”을 받아 마땅한지를 그들 자신의 행로로 증명한 이후의 그들을 보고 계신 것이다.
스올에서 회복된 영혼 이스라엘의 다윗 왕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주를 항상 내 얼굴 앞에 두고 뵈었도다.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 내 육신도 희망 가운데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지옥[스올]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이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5:8-10, LXX, 백스터[16:8-11, 「신세」]) 기원 33년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이 시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임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였다. (행 2:25-31)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부활되었음을 알려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으나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베첫 3:18) “살과 피는 하느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고첫 15:50) 그 왕국에는 살과 뼈도 제외될 것이다. 살과 뼈에는 피가 없으면 생명도 없다. 피는 “영혼”을 함유하거나 육적 피조물의 생명에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창 9:4.
성경 전체에 걸쳐 몸과 구별된 별개의 “비물질인 영혼”이란 없음이 분명하다. 몸이 죽을 때 영혼도 죽는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가 자기 영혼을 쏟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영혼은 스올에 있었다. 그 기간에 그분은 영혼 또는 개체로서 존재하시지 않았다. (사 53:12; 행 2:27. 겔 18:4 비교. 영혼 참조) 따라서 부활될 때 영혼과 몸이 다시 결합하는 일이란 없다. 하지만 영적인 존재이든 육적인 존재이든 개체에게는 몸 또는 유기체가 있어야 한다. 인격체는 누구나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몸이 있기 때문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인격체가 되려면 육적인 몸이든 영적인 몸이든 몸을 가져야 한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육적인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고첫 15:44.
그러나 부활될 때 이전의 몸이 다시 모아지는가? 부활된 몸은 그 사람이 죽을 때의 몸과 똑같이 만들어진 정확한 복제물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답변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은 형제들이 하늘 생명으로 부활되는 일을 설명하는 것을 볼 때 그러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일으킴을 받습니까? 도대체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비합리적인 사람이여! 당신이 뿌리는 그것은 먼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뿌리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앞으로 될 몸이 아니라 단지 낟알, 아마 밀이나 다른 어떤 것의 낟알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기뻐하시는 대로 몸을 주시는데, 씨마다 그 자체의 몸을 주십니다.”—고첫 15:35-38.
하늘로 부활되는 자들은 영적인 몸을 받는다. 그들이 하늘 환경에 적합한 몸을 받는 것을 하느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지상 부활로 일으키기를 기뻐하시는 자들에게는 어떤 몸을 주시는가? 정확하게 이전과 같은 원자들로 이루어진 같은 몸일 수는 없다. 사람이 죽어 장사되면 그 몸은 분해되면서 화학 물질로 바뀌어 식물에 흡수될 수 있다. 그 식물을 사람들이 먹게 될 수 있다. 본래 그 사람의 몸의 성분이었던 원자들은 이제 여러 사람의 몸속에 있다. 부활될 때 동일한 원자가 본래의 그 사람에게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을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또한 부활된 몸이 죽을 때의 몸과 똑같은 복제물로 구성되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수족이 잘린 불구였다면 같은 형태로 돌아올 것인가? 그것은 합리적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을 듣고 행할 여건이 못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 20:12) 몸에서 피가 흘러 나가 죽은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피가 없는 상태로 돌아올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피가 없이는 지상의 몸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레 17:11, 14) 그와는 달리 그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몸을 받을 것이다. 부활된 자가 “그 두루마리들에 기록된 것”에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자 즐거움이므로 성한 몸, 모든 기능을 갖춘 몸이어야 할 것이다. (나사로의 몸이 부분적으로 분해된 상태였지만,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온전히 성한 몸으로 부활시키셨다. [요 11:39]) 이렇게 되어야 각자는 심판기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올바로 정당하게 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활되는 개인이 완전한 상태로 부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 겸 제사장”의 제사장 봉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베첫 2:9; 계 5:10; 20:6.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감’ 믿음과 순종으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에 대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 각자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도리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죽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유의한 사람들이 살 시간이 오고 있는데, 그 시간은 지금입니다.”—요 5:24, 25.
‘지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자들은 정말로 죽어 실제의 무덤에 있던 자들이 아닐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당시, 온 인류는 모두의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서 죽음의 정죄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언급하신 자들은 지상에서 영적인 의미로 죽어 있던 자들일 것이다. 어떤 유대인 아들이 먼저 집에 가서 자기 아버지를 장사 지내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나를 계속 따르십시오.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네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이 분명하다.—마 8:21, 22.
참된 신앙을 갖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도 한때 세상에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회중에게 일깨워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범죄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그 가운데서 이 세상 사물의 제도에 따라 ··· 걸었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으니, 우리가 범죄 가운데 죽어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여러분은 과분한 친절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결합하여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함께 앉히셨습니다.”—엡 2:1, 2, 4-6.
이와 같이 그들이 더는 하느님에 대한 범죄와 죄 가운데 걷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서 정죄를 거두셨다. 그분은 그들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주셨다. (베첫 4:3-6) 범죄와 죄 가운데 죽었다가 이처럼 영적 생명으로 변화된 것을 사도 요한은 이런 말로 묘사한다. “형제들이여,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간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요첫 3:13, 14.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 인류를 위한 부활 마련은 참으로 여호와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이다. 그분에게는 부활을 마련하실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류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를 주심으로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 없이 죽은 수백만 명, 아니 수억 명이 그분을 알고 사랑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이 이 희망과 격려를 통해 심지어 죽기까지 하더라도 충실하게 인내할 수 있게 하셨다. (요 3:16)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중에게 그 회중 성원 중 죽어서 하늘 부활의 희망을 지닌 자들에 대해 편지하면서 부활 희망으로 동료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위로하였다. “더욱이,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이 죽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모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희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통하여 죽어 잠들어 있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 데려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데첫 4:13, 14.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충실한 가운데 하느님의 메시아 왕국 아래 지상 생명의 희망을 갖고 죽은 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죽은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 희망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스올(하데스)이 열릴 때 그곳에 있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성서는 그리로 간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는데, 그중에는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엘람, 메섹, 두발, 에돔, 시돈 사람들이 포함된다. (겔 32:18-31) 예수께서는 벳새다와 고라신과 가버나움의 회개하지 않던 사람들 중에서도 적어도 일부는 ‘심판 날’에 있을 자들 가운데 포함될 것임을 시사하셨다. 그들은 과거의 태도 때문에 회개하기가 매우 어려울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받을 것이다.—마 11:20-24; 누 10:13-15.
대속이 주어진 모두에게 대속은 적용된다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을 주시어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생명을 얻게’ 하신 일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과 과분한 친절은 위대하고 폭넓은 것이므로 대속은 하늘의 부르심을 위해 하느님이 택하시는 자들에게만 국한하여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요 3: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이 하늘 왕국 성원이 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 희생이 온전히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대속을 마련하신 온전한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목적은 지상에 왕국의 신민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함께 있는 보조 제사장들의 대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보조자들이 왕 겸 제사장으로 그분과 함께 다스릴 때 살아 있을 인류 세상의 대제사장이기도 하시다. (계 20:4, 6) 그분은 “우리[그분의 영적 형제들]와 마찬가지로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느님을 섬기려고 양심적으로 노력하는 자들의 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으며, 그분의 보조 왕 겸 제사장들도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받았다. (히 4:15, 16; 베첫 4:12, 13) 천년 통치와 심판 기간 중에 부활된 자들을 포함한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이 누구를 위해 제사장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종들은 부활이 그 일을 완료할 날을 열렬히 고대해 왔다. 하느님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에 적합한 때를 정확히 정해 놓으셨다. 이 일에서 그분의 지혜와 오래 참음이 충분히 입증될 것이다. (전 3:1-8) 부활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기꺼이 행하실 분들로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은 그 정해진 때에 부활을 완료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기쁜 마음으로 고대하시는 부활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은 틀림없이 크나큰 기쁨으로 그 일을 완수하기를 고대하실 것이다. 이런 자진성과 열망을 예수께서 나타내신 적이 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간청하여 “‘당신이 원하기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분[예수]은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내가 원합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사라지고 그는 깨끗해졌다.”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친절을 분명히 보여 주는 이 가슴 뭉클한 장면을 복음서 필자들 중 세 명이 기록하였다. (막 1:40-42; 마 8:2, 3; 누 5:12, 13) 그리고 인류를 돕고자 하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자진성에 대해 우리는 충실한 욥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 당신은 부르시겠고 저는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며,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그리워하실 것입니다.”—욥 14:14, 15.
부활되지 않을 사람들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이 일반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께서는 대속 희생의 실제 적용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말씀을 이렇게 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고 또 자기 영혼을 많은 사람들과 교환하는 대속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 (마 20:28) 여호와 하느님은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시는 자에 관한 대속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개인이 죄 많은 아담의 자녀이기 때문에 지닌 죄를 덮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고의적이고 고집스러운 죄의 행로를 따름으로 죄를 가중시킬 수 있고 그렇게 하여 대속으로 덮을 수 없는 그런 죄 때문에 죽을 수 있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사람은 현 사물의 제도에서도, 오게 될 사물의 제도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 (마 12:31, 32) 그러므로 현 사물의 제도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것으로 하느님이 심판하신 자는 부활의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서 그에게는 부활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가리옷 유다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심으로 그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에게는 대속이 적용되지 않으며, 그의 멸망은 사법적으로 이미 확정된 심판이므로 그는 부활을 받지 못할 것이다.—요 17:12.
예수는 반대자인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당신들이 어떻게 게헨나[영원한 멸망의 상징]의 심판을 피하겠소?”라고 말씀하셨다. (마 23:33. 게헨나 참조) 그분의 말씀은 그런 자들이 죽기 전에 하느님께 향하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최종적으로 자신들에게 내려지는 불리한 심판을 받게 됨을 시사한다. 그럴 경우 그들에게는 부활이 아무 일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은 “불법의 사람”의 경우에도 참될 것으로 보인다.—데둘 2:3, 8. 불법의 사람 참조.
진리를 알고 성령에 참여하는 자가 된 다음에 떨어져 나간 자들의 경우 “다시 회개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거듭 기둥에 못박아 공개적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대속이 더는 도움이 될 수 없으므로, 그들은 부활을 받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가시나무와 엉겅퀴만을 내기 때문에 버림받고 불타 버리고 마는 밭에 비한다. 이것은 그들 앞에 놓인 장래 즉 온전한 멸절을 예시한다.—히 6:4-8.
다시금 바울은 “진리의 정확한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로 거듭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를 위한 희생이 남아 있지 않고, 도리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찬 예상과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불타는 질투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 사람은 누구나 두세 사람의 증언에 근거하여 동정을 받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계약의 피를 예사로운 것으로 여기고, 과분한 친절의 영을 멸시하여 모욕한 사람에게 합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처벌은 얼마나 더 엄하리라고 생각합니까? ···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들과는 달리 단순히 죽임을 당해 스올에 묻히는 것이 아니므로 심판이 더 엄하다. 그들은 부활이 없는 게헨나로 들어간다.—히 10:26-31.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하느님의 집”으로서 심판 아래 있음을 지적한 다음 잠언 11:31(LXX)을 인용하여 불순종의 위험을 경고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들에 대한 현재의 심판이 영원한 멸망의 심판으로 끝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베첫 4:17, 18.
또한 사도 바울은 “주의 앞과 그분의 힘의 영광에서 떠나 영원한 멸망의 사법적 처벌을 받을” 자들에 대해 말한다. “그때에 그분은 오셔서 자기의 거룩한 자들과 관련하여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데둘 1:9, 10) 그러므로 그때에 처벌을 받을 자들은 생존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멸망은 “영원한” 것이므로 부활되지 못할 것이다.
천년기 중의 부활 땅에 살아온 사람의 정확한 수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200억 명을 부활시키신다고 가정해도 그들이 살 공간과 식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현재 육지 면적은 약 1억 4800만 제곱킬로미터, 약 148억 헥타르이다. 그 면적의 절반을 다른 용도로 떼어 놓는다 해도, 일인당 삼분의 일 헥타르 이상이 돌아갈 것이다. 식품을 생산해 낼 지구의 잠재력으로 말하자면, 삼분의 일 헥타르는 사실상 한 사람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식품을 제공해 줄 것이다. 특히 하느님이 이스라엘 나라의 경우에 분명히 보여 주셨듯이,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로 풍부한 식품이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왕첫 4:20; 겔 34:27.
지구의 식량 생산력 문제에 대해 국제 연합 식량 농업 기구에서 주장하는 바로는, 농경법을 적절하게 개선하기만 해도, 개발 도상 지역에서도 지구는 과학자들이 2000년도 인구로 추산한 수의 아홉 배를 너끈히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토지, 식량, 사람」(Land, Food and People), 로마, 1984년, 16, 17면.
하지만 부활될 수십억 명 중 대다수가 과거에 하느님을 몰랐으므로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법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어떻게 그들을 적절히 돌볼 수 있겠는가? 우선 성서는 세상 왕국이 “우리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었고, 그분은 왕으로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신다고 알려 준다. (계 11:15) 그리고 “당신[여호와]으로부터 땅에 대한 심판이 있을 때에, 생산적인 땅의 주민들이 틀림없이 의를 배울 것”이라는 것이 성서 원칙이다. (사 26:9) 하느님은 자신이 정한 때에 자신의 종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을 때에 이 일을 어떻게 수행하실 것인지를 밝혀 주실 것이다.—암 3:7.
지금 무덤에 있는 수십억을 부활시키고 교육하는 일이 어떻게 1000년 내에 가능할 것인가?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인류를 위해 염두에 두고 계신 일이 참으로 간단하고 실제적인 것임을 보여 주는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예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예를 들어 보기 위해서, 이 사물의 제도에서 살다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의로운 사람들의 “큰 무리”(계 7:9, 14)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수가 약 600만(현재 지상 인구의 약 천분의 일)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제 이들을 훈련시키고 땅의 일부를 “정복”(창 1:28)하는 일에 100년 정도를 사용하게 한 후에, 하느님이 그 숫자의 3퍼센트를 부활시키기로 하신다면 새로 부활되어 나온 각 사람은 훈련받은 33명의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해마다 3퍼센트가 증가하는 것을 복리법으로 가산하면, 대략 24년마다 그 수는 곱절이 되므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중 400년이 지나기 전에 총 200억이 부활되어, 지상의 조화와 질서를 방해하는 일 없이 부활된 자들을 훈련하고 판단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은 전능한 능력과 지혜로, 시초부터 인류를 위하여 만드신 법과 마련의 틀 안에서 부활이라는 과분한 친절을 더하시어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영광스럽게 마무리하실 수 있다.—로 11: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