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우리가 문제들을 바로잡자’
1, 2.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통치자들과 백성을 누구에 비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사야 1:1-9에 기록되어 있는 질책을 듣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여호와께 바치는 그 모든 희생에 대해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10절로 15절에는, 그러한 태도를 움츠러들게 하는 여호와의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대답은 이러한 말로 시작됩니다. “너희 소돔의 지배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라.”—이사야 1:10.
2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된 것은 성도착 행위 때문만 아니라 마음이 완고하고 거만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창세 18:20, 21; 19:4, 5, 23-25; 에스겔 16:49, 50) 이사야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들을 그 저주받은 도시들의 백성에 비하는 것을 듣고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a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고 계시며, 이사야는 하느님의 소식을 부드럽게 하여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디모데 둘째 4:3.
3. 여호와께서는 무슨 의미로 유다 백성의 희생이 ‘내게 족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의 형식적인 숭배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너희의 많은 희생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숫양의 번제물과 잘 먹인 동물의 기름은 내게 족하였고, 어린 수소와 어린 숫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사야 1:11) 그 백성은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바치는 희생에 의존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시 50:8-13)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바치는 것은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반뿐인 마음으로 바치는 제물을 통해 자기들이 여호와께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백성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강력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내게 족하였다’는 표현은 ‘내가 물리도록 먹었다’ 또는 ‘내가 싫증나도록 먹었다’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음식을 질리도록 먹어서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은 느낌을 이해합니까? 여호와께서 그 제물들에 대해 바로 그렇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으신 것입니다!
4. 이사야 1:12은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참석하는 것이 헛된 일임을 어떻게 밝혀 줍니까?
4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계속 내 얼굴을 보러 오는데, 누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요구하였기에 내 뜰을 짓밟느냐?” (이사야 1:12) 유다 백성에게 ‘여호와의 얼굴을 보러 오’라고,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분의 성전에 참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법이 아닙니까? (탈출 34:23, 24)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전히 형식적인 태도로 성전에 와서 순결한 숭배를 드리는 척만 할 뿐이지 순수한 동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뜰에 수없이 왔다 간다 해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그 뜰을 ‘짓밟는’ 것에 불과해서 바닥만 닳게 할 뿐입니다.
5. 유대인들이 한 숭배 행위 가운데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러한 숭배 행위들은 왜 여호와께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까?
5 여호와께서 이제 다음과 같이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무가치한 곡식 제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아라. 향—그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다. 신월과 안식일, 대회 소집—장엄한 모임과 아울러 괴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너희 신월과 축제 철을 내 영혼이 싫어하였다. 나에게 그것들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내가 그것들을 짊어지는 데 지쳤다.” (이사야 1:13, 14) 곡식 제물, 향, 안식일, 장엄한 모임—이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가운데 언급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신월”의 경우, 율법에서는 단지 신월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점차 신월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건전한 전통들이 세워졌습니다. (민수 10:10; 28:11) 신월은 매달 지키는 안식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때가 되면 백성은 일을 쉴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에게서 교훈을 듣기 위해 모이기까지 합니다. (열왕 둘째 4:23; 에스겔 46:3; 아모스 8:5)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일을 단지 과시하기 위해 하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에 더하여 “괴이한 능력” 즉 영매술 행위에 의존하기까지 합니다.b 따라서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숭배 행위는 여호와께 “무거운 짐”이 됩니다.
6. 여호와께서는 어떤 의미로 ‘지치셨’습니까?
6 하지만 여호와께서 어떻게 ‘지치실’ 수가 있습니까? 사실, 그분은 “활력이 풍부하시[어] ··· 피곤하거나 지치지 않으”시는 분인데 말입니다. (이사야 40:26, 28)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생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은 무거운 짐을 너무 오래 져서 완전히 지치게 되어 그 짐을 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도 자신의 백성의 위선적인 숭배 행위에 대해 바로 그렇게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7.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의 기도를 더는 듣지 않으시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여호와께서는 이제 모든 숭배 행위 가운데서도 가장 친밀하고 개인적인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손바닥을 펼 때에, 나는 너희에게서 내 눈을 가린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나는 듣지 않겠다. 피흘림이 너희 손에 가득하다.” (이사야 1:15) 손바닥을 펴서 위로 향한 채 양손을 뻗치는 것은 간구의 기도를 하는 몸짓입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는, 그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백성의 손에 피흘림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땅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으며, 약한 사람들을 압제하는 일도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남을 학대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여호와께 기도하며 축복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일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는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8.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그와 비슷한 함정에 빠집니까?
8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국도 헛된 기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을 비롯한 여러가지 종교적인 “일들”을 해 왔지만, 유다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혜를 얻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마태 7:21-23) 우리도 그와 동일한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따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숨기고 그리스도인 회중 활동을 증가시키면 자기의 행위로 인해 어떤 방법으로인가 자기의 죄가 상쇄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추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처럼 겉치레에 불과한 행위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합니다. 영적인 병에는, 이사야서의 다음 성구들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단 한 가지 치료법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병에 대한 치료법
9, 10. 여호와께 드리는 숭배에 있어서 깨끗함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9 동정심 많으신 하느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좀더 따뜻하고 호소력 있는 어조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눈앞에서 너희 행위의 악을 제거하고, 악을 행하기를 그만두어라. 선을 행하기를 배우고 공의를 찾으며, 압제자를 바로잡고 아버지 없는 소년을 위해 재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여 주어라.” (이사야 1:16, 17) 여기서 우리는 아홉 가지 명령이 연달아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 네 가지 명령은 죄를 없애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어서 소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나중의 다섯 가지 명령은 여호와의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는 적극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10 씻는 일과 깨끗함은 순결한 숭배에서 언제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탈출 19:10, 11; 30:20; 고린도 둘째 7:1)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깨끗하게 하는 일이 좀더 깊숙이, 숭배자들의 마음 속까지 진행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영적 깨끗함이며, 여호와께서는 바로 이것을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16절에 언급된 처음 두 가지 명령은 똑같은 말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히브리어 문법학자가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너희 자신을 씻으라’라는 첫 번째 명령은 깨끗하게 하기 위한 처음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반면에,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라는 두 번째 명령은 그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바치는 노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1.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1 우리는 여호와께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욥 34:22; 잠언 15:3; 히브리 4:13) 그러므로 “내 눈앞에서 너희 행위의 악을 제거”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악을 행하기를 그만두라는 의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명령에는 심각한 죄를 숨기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8:13에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기의 범법을 덮어 가리는 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고백하고 버리는 자는 자비를 받는다.”
12. (ㄱ) ‘선을 행하기를 배우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특히 장로들은 ‘공의를 찾으라’는 명령과 ‘압제자를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12 여호와께서 이사야 1장 17절에서 명령하시는 적극적인 행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단순히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하느님의 눈에 선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선을 행하기를 원하게 되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공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공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경험 많은 장로들이라 할지라도 일부 복잡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공의로운 처리 방법을 알아내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히 찾아보아야 즉 연구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장로들의 책임 가운데에는 또한,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명령하시는 대로, “압제자를 바로잡”는 일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목자들은 양 떼를 “압제적인 이리들”로부터 보호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명령은 그들에게 중요합니다.—사도 20:28-30.
13.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 없는 소년과 과부에 관한 명령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13 마지막으로 언급된 두 가지 명령에는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좀더 약한 사람들—고아와 과부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이용하려고 들지만,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는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 많은 장로들은 회중 내의 아버지 없는 소년과 소녀를 위해 “재판하”여, 그들을 이용하고 타락시키려고 하는 세상에서 그들이 공정한 대우와 보호를 받도록 도와 줍니다. 장로들은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여” 줍니다. 또는 히브리어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대로, 과부를 위하여 “싸워” 줍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가운데 있는 빈궁한 사람들에게 도피와 위로와 공의의 근원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들도 여호와께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미가 6:8; 야고보 1:27.
14. 이사야 1:16, 17에서는 어떤 적극적인 소식을 전합니까?
14 여호와께서는 이 아홉 가지 명령을 통해 참으로 단호하면서도 적극적인 소식을 전하십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들에게는 옳은 일을 할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고 스스로 단정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용기를 잃게 만드는 생각일 뿐만 아니라 옳은 생각도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도와 주시기만 하면 어떤 죄인도 죄의 행로를 따라가던 일을 멈추고 돌아서서 오히려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알고 계시며, 여호와께서는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동정심 있으면서도 공의로운 호소
15. “우리가 우리 사이에 문제들을 바로잡자”라는 표현을 때때로 어떤 식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으며, 이 표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15 여호와께서는 이제 훨씬 더 따뜻하고 동정심 있는 어조를 띠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너라. 우리가 우리 사이에 문제들을 바로잡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의 죄가 진홍색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심홍색 천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될 것이다.’” (이사야 1:18) 이 아름다운 성구의 서두에 나와 있는 초대를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 영어 성서」에서는 “우리가 서로 따져 보자”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마치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양편이 서로 양보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반역적이고 위선적인 백성에 대해 여호와께서 하신 행동에는 아무런 잘못도, 털끝만큼의 잘못도 없습니다. (신명 32:4, 5) 이 성구는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그에 대해 논박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공의를 확립하려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법정에서 재판을 벌이자고 요구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16, 17. 여호와께서는 심지어 심각한 죄까지도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6 여호와와 재판을 벌인다는 생각만 해도 겁이 날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가장 자비롭고 동정심이 많으신 재판관이십니다. 용서를 잘 하시는 그분의 도량은 어찌나 넓은지 그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시 86:5) 그분만이 “진홍색 같”은 이스라엘의 죄를 가져다가 깨끗하게 하여 “눈과 같이 희”게 하실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어떠한 행위나 희생이나 기도도, 죄로 인해 생긴 더러운 얼룩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용서만 죄를 씻어 없앨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이 정하신 조건에 따라 그러한 용서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러한 조건에는 진실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회개도 포함됩니다.
17 이러한 진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시적 표현 변화법을 사용하시어 그 진리를 반복하십니다. 즉 “심홍색” 죄가, 새로 깎아 염색하지 않은 하얀 양털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으신 점은,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진실하게 회개하였음을 아시기만 하면 참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며, 심지어 몹시 심각한 죄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경우에도 과연 그렇게 해 주실 것인지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므낫세의 경우와 같은 예를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는 끔찍한 죄를, 그것도 여러 해 동안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회개한 후 용서를 받았습니다. (역대 둘째 33:9-16) 심각한 죄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여호와께서 알려 주고 싶으신 점은, 그분 앞에서 “문제들을 바로잡”기에 너무 늦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18.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반역적인 백성에게 어떤 선택의 기회를 주십니까?
18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켜 주십니다. “너희가 기꺼이 잘 들으면, 땅의 좋은 것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거절하고 거역하면, 칼에 삼켜질 것이다. 바로 여호와의 입이 그것을 말한다.” (이사야 1:19, 20)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태도를 강조하시며, 요점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또 하나의 생생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유다 백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먹느냐 아니면 삼켜지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이 기꺼이 잘 듣는 태도를 가지고 여호와께 순종하면 그 땅에서 나온 좋은 것들을 먹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거역하는 태도를 나타내면 적들의 칼에 삼켜질 것입니다!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느님이 약속하시는 자비와 풍부 대신 적들의 칼을 선택하는 민족이 있으리라고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다음 성구들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예루살렘은 바로 그러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사랑받던 도시에 대한 비가
19, 20. (ㄱ)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느끼시는 배신감을 어떻게 표현하십니까? (ㄴ) 어떤 면에서 ‘예루살렘 가운데 의가 머물러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19 이사야 1:21-23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의 악이 이번에는 극도에 달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는 이제 영감받은 시를, 비가(悲歌) 즉 슬프고 애절한 노래의 형태로 시작합니다. “오, 어찌 충실하던 성읍이 매춘부가 되었는가! 그에게 공의가 가득하였고, 의도 그 가운데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는 살인자들이로구나.”—이사야 1:21.
20 예루살렘 도시는 참으로 타락하였습니다! 한때는 충실한 아내였던 이 도시가 이제 매춘부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느끼시는 배신감과 실망감을 이보다 더 어떻게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도시 ‘가운데 의가 머물러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언제 그러하였습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하기도 전, 그 옛날 아브라함 시대에, 이 도시는 살렘이라고 불렸습니다. 왕이자 제사장이기도 한 사람이 이 도시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라는 뜻이며, 필시 그 사람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 7:2; 창세 14:18-20) 멜기세덱의 시대로부터 1000년쯤 지난 뒤에, 예루살렘은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아래 전성기에 달하였습니다. “의[가] 그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왕들이 여호와의 길로 걸음으로 백성을 위해 모범을 세우고 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시절이 먼 옛날의 추억으로만 떠오르고 있을 뿐입니다.
21, 22. 찌끼와 묽어져 있는 곡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묘사가 적합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1 백성 가운데 있는 지도자들이 문제의 주된 원인인 것 같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비가를 다음과 같이 계속합니다. “너의 은은 뜬 찌끼가 되었다. 밀로 빚은 너의 곡주는 물로 묽어져 있다. 너의 방백들은 고집이 세고 도둑의 짝이다. 그들은 모두 뇌물을 사랑하는 자이고 선물을 뒤쫓는 자이다. 아버지 없는 소년을 위해서는 재판하지 않으며, 과부의 소송은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사야 1:22, 23) 잇달아 언급된 두 가지 생생한 예가, 뒤이어 어떤 얘기가 전개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는 용해된 은에 뜨는 찌끼를 걷어내서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재판관들은 은이 아니라 찌끼 같습니다. 그들은 버려져야 합니다. 그들은 물로 묽어져 제 맛이 나지 않는 곡주처럼 아무 소용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술은 하수구에나 쏟아 버려야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22 23절에서는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묘사가 적합한 이유를 알려 줍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느님의 백성의 품격을 높여 주어 이방 민족들과 구별되게 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들을 보호하라고 명령함으로써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탈출 22:22-24)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 아버지 없는 소년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재판을 받을 희망이 거의 없습니다. 과부의 경우에도, 그를 위해 싸워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의 하소연을 들어 줄 사람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재판관들과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도 너무나 바쁠 지경입니다. 뇌물을 밝히고, 선물을 뒤쫓고, 도둑들의 짝이 되어 아마 범죄자들은 보호해 주고 피해자들은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는 일 등을 하느라고 몹시 바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고집이 세”게 즉 완고하게 악행의 행로에 머무릅니다. 참으로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정련하실 것이다
23.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적대자들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표현하십니까?
23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영원히 관용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강력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아하! 내가 나의 적대자들에게 원한을 풀 것이며, 나의 적들에게 복수하겠다.’” (이사야 1:24) 여기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정당한 주권과 막강한 권능을 강조하는 세 가지 칭호로 언급됩니다. “아하!”라는 탄성은, 불쌍히 여기시던 마음에 이제 진노에 따라 행동하시려는 결의가 뒤섞인 여호와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결의를 품으실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24.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어떤 정련 과정을 겪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까?
24 다름 아닌 여호와의 백성이 바로 그분의 적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복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원한을 푸’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 대한 원한의 짐을 벗어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지닌 백성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멸하시는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손을 네게 돌려서, 잿물로 정련하듯 하여 너의 뜬 찌끼를 없앨 것이며, 너의 모든 찌꺼기를 제거하겠다.” (이사야 1:25) 여호와께서는 이제 정련 과정을 예로 사용하십니다. 고대에 정련하는 사람들은 귀금속에서 찌끼를 분리해 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흔히 잿물을 첨가하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백성이 모두 다 악하다고 보지는 않으시는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적절한 정도로 징벌’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 가운데서 “찌꺼기”만, 즉 배우고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고집 세고 바람직하지 않은 자들만 제거하실 것입니다.c (예레미야 46:28) 이사야는 바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역사를 미리 기록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25. (ㄱ) 여호와께서는 기원전 607년에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정련하셨습니까? (ㄴ) 여호와께서 현대에 자신의 백성을 정련하신 때는 언제입니까?
25 여호와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백성을 정련하시어, 뜬 찌끼 같은 부패한 지도자들과 기타 반역자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가 지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인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은 멸망되고 그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훨씬 후에 하느님께서 취하신 조처와 몇 가지 면에서 유사합니다. 바빌론에서의 유배 생활이 끝나고 오랜 기간이 흐른 뒤에 기록된 말라기 3:1-5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또다시 정련하는 일을 하실 것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예언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계약의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동반하고 자신의 영적 성전에 오실 때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갈 무렵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검사하여 참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가려내셨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26-28. (ㄱ) 이사야 1:26은 첫 번째로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ㄴ)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ㄷ) 이 예언은 오늘날 장로들에게 어떤 면으로 유익을 줄 수 있습니까?
26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한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너를 위한 조언자들을 시초와 같이 회복시키겠다. 그 후에는 네가 ‘의의 도시’, ‘충실한 성읍’이라 불릴 것이다. 시온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오는 사람들은 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1:26, 27) 고대 예루살렘에서 이 예언이 첫 번째로 성취되었습니다.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기원전 537년에 자기들이 사랑하던 도시로 돌아오자, 이제 또다시 예전처럼 충실한 재판관들과 조언자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 제사장 여호수아, 서기관 에스라, 총독 스룹바벨—이들 모두는 돌아온 충실한 남은 자들이 하느님의 길로 걷도록 인도하고 지시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성취는 20세기에 있었습니다.
27 1919년에, 여호와의 현대 백성은 시험 기간을 견디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인 큰 바빌론에 영적으로 속박되어 있던 상태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은 배도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뚜렷이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백성을 축복하시어, ‘그들을 위해 재판관들과 조언자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백성에게 조언을 베푸는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수가 줄어들고 있는 “적은 무리”와 수가 늘어나고 있는 그들의 동료인 수백만의 “다른 양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누가 12:32; 요한 10:16; 이사야 32:1, 2; 60:17; 61:3, 4.
28 장로들은 회중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깨끗하게 유지하고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기 위하여 이따금 회중에서 실제로 “재판관들”로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로들은 일들을 하느님의 방식대로 하며, 자비로우시면서도 균형 잡히게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공의를 본받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로들은 대부분의 경우, “조언자들”로 일합니다. 이것은 물론 통치자나 폭군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따라서 장로들은 “하느님의 상속 재산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듯한 모습 또한 보이지 않으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베드로 첫째 5:3.
29, 30. (ㄱ) 정련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는 무엇이라고 선언하십니까? (ㄴ) 유다 백성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들의 나무들과 동산들을 “부끄러워하”게 됩니까?
29 그러면 이사야의 예언에 언급된 “찌끼”는 어떻게 됩니까? 하느님의 정련 과정으로부터 유익을 얻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들과 죄 많은 자들은 동시에 파멸되고, 여호와를 버리는 자들은 끝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너희가 사모하던 강대한 나무들을 부끄러워하고, 너희는 너희가 택한 동산들 때문에 창피를 당할 것이다.” (이사야 1:28, 29) 여호와의 예언자들이 전하는 경고의 소식을, 너무 늦어 돌이킬 수 없을 때까지 무시하며 여호와를 거역하고 그분에게 죄를 짓는 사람들은 실제로 “파멸되”고 ‘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한 일은 기원전 607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나무들과 동산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0 유다 백성은 지속적으로 우상 숭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들, 동산들, 작은 숲들은 그들의 타락한 행위와 관련하여 종종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바알과 그의 아내 아스도렛의 숭배자들은, 건기에는 그 두 신이 죽어서 묻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신이 깨어나서 성관계를 가져 유다 땅에 풍작이 들게 하는 일을 촉진하기 위해서, 우상 숭배자들은 함께 모여 작은 숲이나 동산에 있는 “신성한” 나무들 밑에서 성도착 행위를 합니다. 유다 땅에 비가 오고 풍작이 들면 그 거짓 신들에게 영예가 돌려지며,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미신을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반역적인 우상 숭배자들을 파멸시켜 끝에 이르게 하실 때, 어떠한 우상 신도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그 반역적인 사람들은 그 무능한 나무들과 동산들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31. 우상 숭배자들은 부끄러움보다 더 심한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31 하지만 우상 숭배를 좋아하는 유다 백성은 부끄러움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를 바꾸어 이제 우상 숭배자 자신을 나무에 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잎이 시들어 가는 큰 나무처럼 되고, 물 없는 동산처럼 될 것이다.” (이사야 1:30) 중동 지방의 덥고 건조한 기후에서는 이 예가 아주 적절합니다. 물을 꾸준히 공급받지 못하면, 어떠한 나무나 동산도 오래 존속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곳에 있는 초목은 바싹 마르게 되면 특히 불붙기가 쉽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31절의 예가 이어집니다.
32. (ㄱ) 31절에 언급된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ㄴ) 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삼 가닥”처럼 될 것이며, 어떤 “불티”가 그 사람에게 불을 붙일 것이며,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을 것입니까?
32 “정녕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삼 가닥이 되고 그의 활동의 산물은 불티가 되어, 이 둘이 동시에 타오를 것이나 끌 자가 없을 것이다.” (이사야 1:31) 이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힘과 부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 단어는 아마 번영을 누리며 자만에 찬, 거짓 신 추종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사야 시대에도 여호와와 그분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삼 가닥”처럼 될 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불 냄새만 맡아도 툭 끊어질 것 같은 매우 약하고 바싹 마른 거친 아마 섬유처럼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재판관 16:8, 9) 우상 숭배자들이 만든 우상 신이든, 그들이 소유한 부이든, 또는 그들이 여호와 대신 숭배하는 그 어떤 것이든, 우상 숭배자들의 활동의 산물은 불을 붙이는 “불티”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불티와 삼 가닥 모두, 아무도 끌 자가 없는 불 속에서 타 없어질 것입니다. 우주 가운데 있는 어떠한 힘도 여호와의 완벽한 심판이 진행되는 것을 좌절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33. (ㄱ)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하느님의 경고는 어떤 면에서 그분의 자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현재 인류에게 무슨 기회를 주고 계시며, 그 일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33 이 마지막 소식은 18절에 언급된 자비와 용서의 소식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을 시켜 그러한 경고를 기록하고 전달하시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분은 “아무도 멸망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모두가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베드로 둘째 3:9) 회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관대한 용서로부터 유익을 얻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인류에게 하느님의 경고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은, 오늘날 모든 참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인류가 자신 앞에서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여호와는 참으로 친절하신 분입니다!
[각주]
a 유대인의 오래 된 전승에 의하면, 악한 왕 므낫세는 이사야를 처형할 때 톱질을 하여 동강이 나게 하였다. (비교 히브리 11:37) 한 자료에서 알려 주는 바에 의하면, 그러한 사형 선고를 내리게 하기 위해, 한 거짓 예언자가 이사야를 상대로 다음과 같은 고발을 하였다. “이 자는 예루살렘을 가리켜 소돔이라고 불렀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방백들을 가리켜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선언하였다.”
b “괴이한 능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유해한 것”, “괴이한 것”, “잘못된 것”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구약 신학 사전」(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에 의하면, 히브리 예언자들은 “능력의 오용으로 초래된 악”을 비난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c “내가 손을 네게 돌[리겠다]”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원하시는 일을 중단하고 이제 그들을 징벌하실 것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