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humility)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것, 자기를 낮춘 정신. 겸손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정신 상태이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겸손”이라는 말의 어근 단어(아나)는 “괴로움을 겪다, 낮추어지다, 압제받다”를 의미한다. 이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겸손”, “온유”, “괴로움”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어 있다. “겸손”과 관련된 다른 히브리어 동사로는 카나(문자적 의미는 ‘[자신을] 복종시키다’)와 샤펠(문자적 의미는 ‘낮다 혹은 낮아지다’) 두 가지가 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서 “겸손”과 “자기를 낮춘 정신”으로 번역된 단어는 타페이노프로시네이다. 이 말은 “낮추다”라는 의미인 타페이노오와 “정신”을 의미하는 프렌이라는 단어들에서 나온 말이다.
겸손한 상태에 이르려면 성서에 설명되어 있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및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추리해 보아야 하며, 그러고 나서 터득한 원칙들을 실천해야 한다. “자신을 낮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히트랍페스의 문자적 의미는 “자신을 짓밟다”이다. 그 말은 잠언의 지혜로운 필자가 묘사한 다음과 같은 행동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네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섰다면, ··· 네 입의 말로 올무에 걸렸다면, ··· 네가 이웃의 손바닥에 빠지게 된 것이니, ··· 가서 네 자신을 낮추고[네 자신을 짓밟고] 이웃에게 끈덕지게 간청하여라. ··· 너 자신을 구출하여라.” (잠 6:1-5) 달리 말하면, 자존심을 내던지고 실수를 인정하고 문제를 바로잡은 다음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하며 탁월해지려 할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하여 봉사하거나 섬겨야 한다고 예수께서는 훈계하셨다.—마 18:4; 23:12.
그러지 않으면, 비천해지거나 낮추어지는 경험을 하고서야 겸손을 배우게 될 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낮추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려는 것이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신 8:2, 3) 틀림없이 많은 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혹독한 경험을 통해 유익을 얻고 겸손을 습득하였을 것이다. (레 26:41; 대둘 7:14; 12:6, 7 비교) 낮아지지 않으려 하거나 겸손을 위한 징계를 거부하는 사람 혹은 나라는 때가 되면 굴욕을 당하게 된다.—잠 15:32, 33; 사 2:11; 5:15.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다 여호와께서는 겸손을 높이 평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으신데도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들에게는 과분한 친절로 기꺼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하거나 자신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필자 야고보와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하느님께서는 거만한 사람들을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과분한 친절을 베푸신다.”—야 4:6; 베첫 5:5.
과거에 매우 나쁜 일들을 행한 사람일지라도 여호와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낮추고 그분에게 자비를 간청한다면, 그분은 그 간청을 들어주신다. 유다의 므낫세 왕은 그 나라에 거짓 숭배를 장려함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주민을 꾀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절하신 나라들보다 더 악한 일을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므낫세를 아시리아 왕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자, 그는 “그 조상들의 하느님 때문에 자기를 크게 낮추었다. 그가 그분에게 계속 기도하니, 그분이 그의 간청을 들어주시고 은혜를 구하는 그의 청을 들어주셔서, 그를 예루살렘으로, 그의 왕권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그제야 므낫세는 여호와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런 방법으로 므낫세는 겸손을 배웠다.—대둘 33:9, 12, 13. 왕첫 21:27-29 비교.
올바른 인도를 받게 해 준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느님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에스라는 제사장과 느디님 사람들 및 여자와 아이들 이외에도 1500명 이상의 남자들이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인도하는 중책을 맡았다. 더욱이 그들의 수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한, 많은 양의 금은이 있었다. 그들이 여행하는 데에는 보호가 필요하였지만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에게 군대의 호위를 요청하여 인간의 힘에 의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 이전에 왕에게 “우리 하느님의 손은 그분을 찾는 모든 자 위에 있어 선을 베”푼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단식을 공포함으로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게 하였다. 그들이 하느님께 요청하였더니 그분은 그들의 말을 들어주셨고, 도중에 매복한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심으로 그들이 위험한 여행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셨다. (라 8:1-14, 21-32) 바빌론에서 유배 생활을 한 예언자 다니엘도 하느님 앞에서 인도와 이해력을 찾아 구하면서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큰 은혜를 받았다. 하느님이 천사를 그에게 보내셔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이다.—단 10:12.
겸손은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한다.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시 75:7) “사람의 마음이 교만함은 파멸의 앞잡이이고, 겸손은 영광의 앞잡이이다.” (잠 18:12; 22:4) 그러므로 거만함을 통해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 주제넘게도 제사장의 직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여 법을 범한 유다의 웃시야 왕의 경우가 그러하였는데, “그는 강해지자, 마음이 거만해져서 파멸을 초래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는 자기 하느님 여호와께 불충실하게 행하여,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분향 제단에 분향하려고 하였다.” 그의 잘못을 시정하려고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가 격노하자 그는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대둘 26:16-21) 웃시야는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서 몰락을 경험한 것이다.
역경을 겪을 때 도움이 된다 겸손은 역경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겸손은 재난이 닥치더라도 꿋꿋이 견뎌 내고 인내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봉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준다. 다윗 왕은 역경을 많이 겪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추방되어 쫓겨 다녔다. 그러나 그는 결코 하느님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으며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보다 자신을 더 높이지도 않았다. (삼첫 26:9, 11, 23) 밧-세바와 관계를 가지면서 여호와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예언자 나단을 통해 매우 심한 책망을 받았을 때에도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다. (삼둘 12:9-23) 훗날, 시므이라는 베냐민 사람이 다윗에게 공개적으로 악담을 하는 것을 보고 다윗의 관원 아비새가 왕을 그토록 멸시한 그 사람을 죽여 없애려 하였을 때에도, 다윗은 겸손을 나타냈다. 그는 아비새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보시오, 내 속에서 나온 내 아들도 내 영혼을 찾고 있소. 하물며 이제 베냐민 사람이야 얼마나 더 그리하겠소! ··· 어쩌면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보시고, 여호와께서 오늘 그의 저주의 말 대신에 좋은 것으로 나에게 되돌려 주실지도 모르오.” (삼둘 16:5-13) 훗날 다윗은 백성을 계수함으로 여호와의 뜻을 거스른 일도 있었다.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백성을 계수한 후에 그의 마음이 그를 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말하였다. ‘제가 한 일로 크게 죄를 지었습니다. ··· 제가 몹시 어리석은 짓을 하였습니다.’” (삼둘 24:1, 10) 다윗은 처벌을 받기는 하였지만 왕위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의 겸손은 그가 여호와의 은혜를 되찾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느님의 특성 여호와 하느님은 자신의 특성들 가운데 겸손을 포함시키신다. 이것은 그분에게 부족한 면이 있으시거나 그분이 다른 누군가에게 복종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은 그런 면으로가 아니라 비천한 죄인들에게 자비와 큰 동정심을 베푸심으로 겸손을 나타내신다. 죄인들을 상대해 주신다는 것 자체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희생으로 마련해 주셨다는 것이 그분의 겸손의 표현이다. 여호와 하느님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도 약 6000년 동안이나 악을 허락하셨고 인류가 형성되게 하셨다. 이렇게 해서 아담의 자손에게 과분한 친절을 통해 자비가 베풀어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로 8:20, 21)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의 다른 훌륭한 특성들과 더불어 그분의 겸손을 보여 준다.
다윗 왕은 자신에게 하느님의 과분한 친절이 베풀어진 일에서 이 특성을 보고 그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든 적의 손에서 구출해 주시자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구원의 방패를 주실 것이며, 당신의 겸손은 나를 크게 만들어 주십니다.” (삼둘 22:36; 시 18:35) 여호와께서는 가장 높은 하늘에서 드높여진 자리에 큰 위엄 가운데 앉아 계신 분이지만, 그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처소를 높은 곳에 두시는 분, 우리 하느님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 그분은 스스로 낮추시어 하늘과 땅을 눈여겨보시고 낮은 자를 흙먼지에서 일으키시며, 가난한 자를 잿더미에서 높이시어 귀인들과 함께, 자신의 백성의 귀인들과 함께 앉히시는 분[이다].”—시 113:5-8.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시면서 하느님의 겸손한 종이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가장 큰 본을 세우셨다. 죽으시기 전 저녁에 예수께서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다음 12사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겨 주고 물기를 닦아 주셨다. 그 일은 관습상 하인과 종들이 하는 일이었다. (요 13:2-5, 12-17)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 (마 23:12; 누 14:11)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도 베드로의 기억 속에는 예수께서 그 말씀과 일치하게 생활함으로 보여 주신 훌륭한 본이 남아 있었다. 훗날 그는 동료 신자들에게 이렇게 훈계하였다. “여러분은 모두 서로에 대하여 자기를 낮춘 정신으로 허리를 졸라매십시오. ··· 그러므로 하느님의 위력 있는 손 아래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그분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베첫 5:5, 6.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 태도를 가지라고 격려한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기 전에 하늘에서 아버지 여호와와 함께 존재하면서 높은 지위를 누리다가 기꺼이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셨음을 지적한다. 바울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뿐 아니라,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계셨을 때에 그분[예수]은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아니, 고통의 기둥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겸손에 대한 상에 관해 예수 자신이 하신 말씀이 참되다는 것이 그분 자신의 경우에 강력하게 입증되었다. 사도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바로 이 때문에,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탁월한 위치로 높이시어, 친절하시게도 그분에게 다른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빌 2:5-11.
더욱 감탄스러운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그토록 드높여진 위치를 가지고 땅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행사하시고는(마 28:18; 6:10) 천년 통치가 끝날 때에는 여전히 동일한 겸손을 보이실 것이라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하게 된 그때에는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신 분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고첫 15:2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관하여 “나는 성품이 온화하고 마음이 겸손”하다고 말씀하셨다. (마 11:29)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들의 왕으로 나타나실 때에도 그분은 자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 예언을 성취시키셨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온다. 그는 의롭고, 과연 구원을 받으며, 겸손하여 나귀, 곧 다 자란 동물인 암나귀 새끼를 탄다.” (슥 9:9; 요 12:12-16) 하늘의 드높여진 위치에서 하느님의 적들을 치러 나아가실 때에도, 그분은 이러한 권고를 받으시는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당신의 영화 중에 나아가 성공을 거두고 진리와 겸손과 의를 위하여 타고 나아가십시오.” (시 45:4)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들은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들에게 억눌림을 당하고 학대를 받아 왔다 할지라도 기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러한 말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여호와를 찾아라, 그분의 판결을 지켜 행하는 땅의 모든 온유한 사람들아. 의를 찾고, 온유를 찾아라. 혹시 너희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습 2:3.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은 겸손한 자들에게 경고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런 일이 있더라도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동하실 것이라고 선언하는 위로의 말씀이기도 하였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에 네 가운데서 거만하여 크게 기뻐하는 자들을 내가 없애 버릴 것이다. 네가 내 거룩한 산에서 결코 다시는 거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정녕 겸손하고 낮은 백성을 네 가운데 남겨 두리니, 그들이 실제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도피할 것이다.” (습 3:11, 12) 실제로 겸손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다. “당신이 겸손한 사람들은 구원하실 것이지만, 당신의 눈은 거만한 자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낮추십니다.” (삼둘 22:28)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와 겸손과 의를 위하여 타고 나아가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과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겸손을 배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을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인간성을 입으라고 교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여러분은 하느님의 택함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들로서, 동정심 어린 부드러운 애정, 친절, 자기를 낮춘 정신, 온화, 오래 참음을 입으십시오.” (골 3:10, 12) 그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본을 예로 들면서 그들에게 ‘자기를 낮춘 정신으로 자기보다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남을 낫게 여기라’고 훈계한다. (빌 2:3) 또다시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분 자신에게 하듯이 생각하십시오. 높은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도리어 낮은 것들에 이끌리십시오.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슬기로운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로 12:16.
바울이 고린도 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취지도 같은 것이다. “나는 비록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들을 얻으려고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느님에 대하여 율법이 없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법 아래 있지만, 율법 없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얼마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고첫 9:19-22) 참으로 겸손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
평화에 기여한다 겸손은 평화를 증진시킨다. 겸손한 사람은 개인의 “권리”로 여겨지는 것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싸우는 일이 없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자기에게 있지만 세워 주는 일들만 할 것이며, 만일 자신의 개인적 행동 때문에 형제의 양심이 괴로워하게 된다면,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로 14:19-21; 고첫 8:9-13; 10:23-33.
또한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하라는 예수의 교훈을 실천함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겸손이 요구된다. (마 6:12-15; 18:21, 22) 그리고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 사람이라면 상대방을 찾아가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그가 겸손한지에 대한 시험이 된다. (마 5:23, 24) 한편 기분이 상한 쪽에서 상대에게 다가갈 때에도 사랑과 더불어 겸손을 보여야만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즉각 행동하게 될 것이다. (마 18:15; 누 17:3. 레 6:1-7 비교) 그러나 그러한 겸손을 나타낼 때 그 사람과 조직이 평화의 길에서 누리게 되는 결과들은 굴욕스러운 감정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또한 그런 겸손한 행동은 그 사람에게 겸손이라는 훌륭한 특성을 한층 더 발전시켜 주고 강화시켜 준다.
회중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이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기쁨과 균형을 유지하게 해 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첫째 12장에서 예시한 바와 같은 그리스도인 회중의 상호 의존 관계에서 기초가 되는 것은 순종과 겸손 그리고 하느님의 조직적 마련에 대한 복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회중의 남자 성원들에게 그들이 감독자가 되기 위해 힘쓰고 있다면 훌륭한 일을 바라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 하지만, 위치나 직분, 이를테면 회중에서 가르치는 자 같은 위치를 야심적으로 탐내서는 안 된다고도 알려 준다. 왜냐하면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더 무거운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야 3:1; 디첫 3:1.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는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하며 어떤 책임을 정해 주시거나 맡기시는 것과 관련해서는 여호와를 기다려야 한다. 높이는 일은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 75:6, 7) 레위 지파인 고라의 일부 자손들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나는 악의 천막들 안에서 돌아다니기보다 내 하느님 집 문지방에 서 있기를 택하였습니다.” (시 84:10) 그처럼 참다운 겸손을 습득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성경에서는 감독자로 섬기도록 임명될 만한 사람의 자격 조건을 설명하면서 새로 개종한 사람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이것은 “교만으로 우쭐해져서, 마귀에게 내려진 심판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디첫 3:6.
거짓 겸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겸손이 그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고 있다. 누구든 거짓 겸손을 좋아하는 사람은 “육적인 생각의 틀에 의하여 적절한 근거도 없이 우쭐대”게 될 수 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왕국이나 그 왕국에 들어가는 일은 무엇을 먹거나 마시는가 혹은 무엇을 먹지 않거나 마시지 않는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서는 건강상 필요하다고 혹은 양심으로 인해 당연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특정한 것을 먹거나 마실 수도 있고 먹지 않거나 마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알려 준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은혜로운 신분을 얻는 일이 특정한 것을 먹거나 마시거나 만지느냐 그렇게 하지 않느냐 혹은 특정한 종교적 기념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 지운 숭배 방식과 거짓 겸손과 몸을 가혹하게 다루는 면에 있어서는 지혜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과 투쟁하는 데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골 2:18, 23; 로 14:17; 갈 3:10, 11.
거짓 겸손을 보이는 사람은 사실상 스스로 거만을 키우게 될 수 있다. 그는 자기 공적으로 자기가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기 쉽고, 여호와를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고 여기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만함을 키우는 사람은 때가 되면 자신이 좋아하지 않을 방식으로 낮추어지게 될 것이다. 그는 낮아질 것이며, 그리하여 그 자신의 멸망에 이르게 될 수 있다.—잠 18:12; 2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