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를 볼 때 선택적이어야 할 이유
“인류가 발명한 가장 무서운 통신 무기.” 유명한 ‘텔레비 도큐멘타리’ 저자의 이 말은 ‘텔레비’의 경이로움을 잘도 표현하였다! 실로 경이로운 발명품이다!
우리가 이 잡지의 한 단을 읽어 내려가는 데 눈이 좌우로 약 42회나 이동하듯이 미국에서 사용되는 ‘텔레비 카메라’는 사진 하나를 형성하기 위해 525개의 선위를 주사한다. 1초에 30개의 사진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광선이 선 하나를 주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5,000분의 1초도 못된다. 그처럼 속독(速讀)을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것만이 아니라 ‘카메라’가 처음에는 1, 3, 5, 7 등의 순서로 홀수의 선만을 전부 주사하고 그 다음에 그림의 왼쪽 윗부분 귀퉁이로 가서 2, 4, 6 등의 짝수의 선들을 주사한다. ‘텔레비 카메라’가 천연색 사진을 촬영하고 수상기가 그것을 재생(실제로 색깔을 송신하는 것은 아닌데도)하는 과정은 더욱 더 경이롭다.
미국은 930개의 ‘텔레비’ 방송국과 9천 300만대 이상의 수상기를 자랑하고 있으며, 그 중 30‘퍼센트’가 천연색 ‘텔레비’ 수상기라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천만대가 팔렸다. 전형적인 가정에서는 하루 평균 6시간 동안 ‘텔레비’를 본다고 한다.
인간은 사진과 소리로 정보를 전달하는 면에 있어서는 실로 공간을 정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단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인간은 그것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텔레비 프로’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많다
‘텔레비 프로’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불평은 상업 광고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광고의 수가 좀 더 적고 짧아야 하고, 특히 진행되는 ‘프로’ 내용을 그처럼 방해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바이다. 정부 관리들은 또 다른 점들을 불평한다. 한 관리는 ‘텔레비’ 방송국들이 편파적인 정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다른 한 관리는 방송국이 문화적 “황무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교육과 감화를 위하여 인간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수단을 받아 가지고—예수 당시의 성전과 같이—그것을 장사군들과 돈벌이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신문 지상 평론가들은 “상업 방송국의 입맛 없는 ‘프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또한 재방송 ‘프로’를 “다시 사용하는 쓰레기”라고 비방조로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또 불평한다. “방송국들이 자기들의 심각한 ‘프로’에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흥미있게 만들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국의 저명한 ‘텔레비’ 평론가였던 고(故) ‘에드와드 머로우’ 씨는 ‘텔레비 프로’가 “퇴폐풍조, 도피주의 및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로부터 절연의 증거”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비평이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나 어린이들이 많이 시청하는 ‘프로’에 대해 가해지고 있다.
왜? 왜? 왜?
‘텔레비 스크린’에 나타나는 ‘프로’에 대하여 그처럼 불평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미국에서는 그것이 심하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텔레비’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운영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보여 줄 ‘프로’를 정부가 결정한다.) 미국에서 가장 성업중인 광고 대행 회사 간부 한 사람은 그러한 이유들 중의 하나를 “‘텔레비’의 참다운 주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대답하였다. 거기서 그는 1959년에 두개의 가장 큰 ‘텔레비’ 방송국에서 ‘양질의 프로’를 방영한 결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렇게 하자 빈약한 3류에 속한 방송국이 “폭력과 유혈로 특징을 이룬 새로운 ‘프로’를 방영하기 시작하였다. 즉시 그 방송국이 2류로 육박해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두 방송국은 자구지책(自救之策)으로 자기네 ‘프로그램’의 표준을 타협하여 시청자를 확보하기로 협의하였다.”a
‘쇼’의 “질”은 무엇으로 결정하는가? 일반 대중의 반응이다. 이 광고 회사 간부에 의하면 이렇다. “관중을 동원하는 사업에 있어서는, 사치스럽게 자신의 표준이나 시청자의 표준을 결정하는 법이 없다. 그러한 표준은 경쟁회사의 상대적인 성공에 의하여 결정된다.”
위의 말이 단순히 한 사람의 견해만은 아니다. 최근 1970-1971년 겨울에 최고의 것이었다고 인정받은 다섯 편의 ‘텔레비 프로’를 검토 비평한 평론가는 그것들이 ‘값싸고, 무미건조하고 싫증나고, 얼빠진 것들’이라고 하였다. 흔히 ‘텔레비 프로’가 그토록 저속한 이유는 시청자들의 기호에 맞추기 대문이라는 것이 한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이유는 방송국이 현재의 문제 거리에 관한 도전적인, ‘도큐멘타리’를 방영했다가 보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펜타콘’의 진상”이라는 ‘도큐멘타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미국방성의 활동과 정책에 대하여 유리한 인상을 심기 위한 국방성의 정책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금년에 나온 1급 ‘도큐멘타리’라고 평가하였지만, 정치가들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관련된 방송국들도 별로 열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의 인가가 취소될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은행들이 흑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차별 대우를 하는가를 알리는 ‘도큐멘타리’ 때문에 그것을 방영하였던 한 방송국은 상당한 재원(財源)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지방에 공해(公害)를 일으킨 원인들을 폭로한 ‘프로’ 때문에 ‘텔레비’ 방송국과 그 지방 사업체 사이에 관계가 대단히 악화되어 결국 그 ‘프로’를 제작한 기자 한 사람을 파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및 경제적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보다 나은 ‘프로’를 더 자주 만들어내지 않는 한 가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
이상의 이유들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텔레비’ 방송국들이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미뤄버릴 수는 없다. 이것은 종종 대단히 좋은 ‘프로’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교육 방송국 혹은 “대중” 방송국이라고 하는 곳에서 그런 ‘프로’가 나온다. 그러한 훌륭한 예로 대단히 인기 있었고 높이 평가받은 ‘프로’(“Sesame Street”)가 있었다. 그 ‘프로’에 관하여 「유네스코 쿠리어」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것은 아무런 폭력이 없이 ‘위트’와 ‘유모어’의 연속이었으며, 협조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적극적인 내용이었다. 둘째로 그 ‘프로’는 어린이들에게 글자, 수자 및 간단히 셈하는 기술등을 가르친 어휘와 추리력을 증진시키도록 하고, 전체적인 세계에 눈을 뜨도록 도와 주었다.” 1971년에 시청한 한 ‘프로’는 12라는 수와 E자의 대문자와 소문자를 특집으로 하고, ‘고릴라’의 놀이를 보여 주고, 삼각형과 사각형의 차이를 알려주는 연속적인 ‘댄스’를 보여 주었다. 그것은 성인들에겐 흥미가 있었으며 아이들에게는 교육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만일 그 ‘프로’에 기술과 품격을 충분히 주입하기만 하면, 연출자들이 참으로 자기 임무에 전념하고, 돈에 대해서 그리고 노력을 기울이는 문제에 있어서 인색하지만 않다면, 교육적이고 건설적인 ‘프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더러 하루 저녁의 ‘텔레비 프로’ 가운데서 1분 동안의 광고 연극이 가장 재미있는 것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선택적이어야 할 이유
‘텔레비 프로’는 일반적인 도덕 표준의 하락을 반영해 준다. 그러나 어떻게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다른 사업보다 어떻게 ‘텔레비’ 사업만이 이상적이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익이다.
물론, 이 잡지의 일반 독자들은 ‘텔레비 프로’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시청 습관을 향상시킬 수는 있다. 어느 ‘프로’를 볼 것인가를 선택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부모라면, 자녀들이 어떤 ‘프로’를 보는가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건설적인 ‘프로’를 보고 퇴폐적인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특히 폭력에 관한 ‘프로’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프로’를 보게 되면, 아이들이 폭력에 대하여 둔감해지기 때문이다. 평균 14분에 한번씩 폭력 장면이 나오고, 45분에 한번씩 살인이 나오는 실정이므로 문제는 크다. ‘브이. 비. 클라인’ 박사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폭력 중독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폭력극은 자녀들이 자라서 실생활에서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표본이 된다.
폭력의 양을 감소시키라는 여론은 있었지만, ‘텔레비 스크린’에서 성적 부도덕을 감소시키라는 여론은 많지 않았다. 음탕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계속 보고도 도덕적으로 둔감해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폭력의 경우와 같이 음탕한 장면들도 시청자의 실생활에 영향을 준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 성서는 말한다. (고린도 전 15:33) 당신이 도덕적으로 음탕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원치 않는다면 ‘텔레비’를 통해서 그런 사람들과 사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선택적이 된다는 말은 어떤 종류의 ‘텔레비 프로’를 볼 것인가에 대해 조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택적이 된다는 말은 ‘텔레비’ 보는 시간을 조절한다는 말도 된다. ‘지. 에이. 스타이너’ 박사가 「사람들은 ‘텔레비’를 본다」라는 그의 저서에서 알려 주는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에 대해서 상극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즉 그들은 ‘텔레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너무 많이 본다고 염려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텔레비’를 봄으로써 유익과 기쁨을 맛볼 수 있기도 하지만 거기에 중독되는 수도 있다. ‘텔레비 프로’ 때문에 당신이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 수면에 지장을 받는다면, 건전한 운동과 신선한 공기를 충분히 취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선택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독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인 봉사자인 경우, ‘텔레비 프로’를 보기 위하여 봉사의 임무를 소홀히 하게 된다면, 선택적이라고 할 수 없다.
‘텔레비’는 실로 무서운 통신 무기이며, 기이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조종하고, 그것이 당신을 조종하게 하지 말라.
[각주]
a 이 방송국이 1969년에 과도하게 행동한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어느 ‘프로’를 방영하였다가 내용이 천박하다고 항의가 대단히 심하여 제1회 방송으로 중단해버렸고, 가장 비용을 많이 들였다고 하는 연속물은 몇 주일 후에 “완전한 실패”라고 하여 중단해버렸다.—The Americana, 1970 Annual, pp. 671, 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