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폭풍이 강타했을 때 벌인 구호 활동!
지난해에 허리케인 미치로 인해 초래된 황폐는 세계 전역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의 폭풍의 피해자들을 위해 여호와의 증인이 많은 경우 용감하게 벌인 구호 활동에 주의를 기울인 뉴스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에 실린 보고는 심지어 최악의 상황에서도 참 그리스도교와 진정한 형제애가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때는 1998년 10월 22일, 카리브 해의 남서쪽 바다에서 한 살인마가 태어났습니다. 그 살인마는 처음에 열대성 저기압으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24시간도 채 안 되어 그 살인마는 열대성 폭풍으로 분류될 만큼 강력해졌으며,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게 할 미치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미치는 더욱더 강력해지면서 북상하였습니다. 10월 26일에 미치는 시속 290킬로미터의 지속적인 바람과 시속 32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돌풍을 일으키는 5급 허리케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미치는 자메이카와 케이맨 제도를 강타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살인마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중앙 아메리카 해안에 있는 벨리즈로 곧장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미치는 그곳을 덮치지는 않고 온두라스 북부 연안에서 위협적인 기세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살인마는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0월 30일, 미치는 온두라스에 상륙했으며, 가는 곳마다 죽음과 파괴가 뒤따랐습니다.
온두라스를 강타한 미치
미치가 오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테구시갈파에 사는 전 시간 복음 전파자인 빅토르 아벨라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0월 31일 토요일 새벽 1시경에 무시무시한 천둥소리 같은 굉음이 들렸지요. 조그만 시내가 세차게 흐르는 강이 되어 있었습니다! 물살에 집 두 채가 휩쓸려갔지요. 집 안에서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다른 지역에서는 진흙 사태가 일어나 32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에는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는 여덟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침례받은 증인 중에는 사망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온두라스의 관리들은 그러한 위급한 상황에 신속히 반응을 보여 수재민 대피소를 세웠습니다. 또한 10여 개국에서 온 국제 구호단도 재빨리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구호 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성서의 이러한 말씀을 기억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으로 친족이 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합시다.” (갈라디아 6:10) 그리하여 긴급 구호 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해안 지역에 있는 마을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게 된 증인들은 구조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에드가르도 아코스타라는 증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10월 31일 토요일에 우리는 작은 배 한 척을 구해서 홍수가 난 지역으로 갔지요. 두 명의 형제를 구조할 수 있었지만, 형제들을 전부 구해 내려면 더 큰 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a 그래서 고래잡이 배 한 척을 구해 일요일 이른 아침에 다시 갔지요. 마침내 우리는 그곳 회중의 모든 성원들은 물론 이웃 사람들도 일부 대피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부 189명이었지요.”
후안 알바라도는 라훈타 근처에서 구조 활동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도와 줘요!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지요. 그렇게 끔찍한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속수무책으로 갇혀 있었습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생존자인 마리아 보니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위는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지요.” 하지만 구조 작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생존자인 움베르토 알바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우리를 구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숙소와 음식과 옷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움베르토는 또한 이렇게 회상합니다. “구조 작업을 지켜 보던 한 남자는 우리에게 자기 교회에서는 자기를 구해 주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오직 여호와의 증인만이 그렇게 해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남자는 이제 여호와의 증인이 참 종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라리마라는 마을에서는 일단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어떤 집에 갇혀 있었습니다. 물이 차 오르자 그들은 천장에 구멍을 내고 천장 들보 위로 올라갔습니다. 가비라는 증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며칠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그 식량이 바닥나자 한 형제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물 속으로 뛰어들어 밖으로 나가더니 코코넛을 따왔지요. 우리는 불안감을 가라앉히려고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봉사의 종인 후안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가 살아 남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서 잡지인 「파수대」를 연구하기로 했지요. 모두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함께 연구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 연구 덕분에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8일 동안 버텼으며, 마침내 구조대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많은 홍수 생존자들은 안전하게 살아 남기는 했지만 고통스러운 현실에 직면해야 하였습니다. 릴리안이라는 증인은 이렇게 인정합니다. “옷이나 가구나 가족 사진 같은 개인 물품들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지요. 집 안이 온통 진흙과 쓰레기와 심지어 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니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 형제애는 매우 값진 것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릴리안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들이 와서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남편은 ‘이렇게 수고를 해 주셨는데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지?’ 하고 묻더군요. 한 자매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지요.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당신의 자매잖아요!’”
엘살바도르에서도 맹위를 떨친 미치
허리케인 미치는 엘살바도르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기세가 다소 꺾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명 피해를 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하였습니다. 당시 엘살바도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지역 대회를 계획하느라 분주한 상태였습니다. 4만 명 이상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미치가 가까이 오자, 형제들 모두가 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습니다. 강들이 범람해서 농작물과 도로와 가옥이 침수되었습니다. 삼림 훼손으로 지반이 약해진 언덕들에서는 대규모 진흙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넬손 플로레스는 칠랑게라 마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의 주임 감독자였습니다. 10월 31일 토요일 아침, 그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강 건너, 이전에 칠랑게라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가옥 500채가 모조리 쓸려가 버린 것입니다! 영적 형제들의 생명이 염려된 나머지 넬손은 자신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어난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넬손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강 건너편에 이르자, 일어나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썼지요. 집집으로 전파하면서 이 지역을 날마다 지나다녔는데도, 눈에 익은 표지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칠랑게라 마을에서는 약 15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침례받은 증인 중에는 사망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구조 활동이 곧 시작되었습니다. 이 구조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던 아리스테데스 에스트라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칠랑게라로 들어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물이 계속 불어나고 있었던 거죠!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는데도 구조 대원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버려 두고 나오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마침내 형제들은 모두 무사히 대피하였습니다. 왕국회관들이 수재민 대피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증인들은 그 밖에도 병원이나 학교를 비롯하여, 부상자 명단이나 집을 잃은 사람들의 명단에서 증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장소에 배치되었습니다. 현지 회중들에서는 필요한 구호품을 신속하게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구호품을 접수 장소로 가져가는 것도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코린토라는 마을의 형제들은 자기들이 직접 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가득 싣고 출발하였는데, 산사태가 나서 길이 막혔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그들은 흙을 파서 길을 만들면서 나아갔습니다! 처음에 구경꾼들은 회의적인 눈초리로 지켜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들도 마음이 감동되어 함께 힘을 합쳐서 길을 냈습니다. 코린토의 형제들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가져온 물품을 기부하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도 구호품 접수 장소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었습니다. 구호품 접수를 도운 지부 성원인 힐베르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너무나 많은 차량이 도착했기 때문에 자원 봉사자들을 임명해서 주차장과 지부 앞 도로에서 교통 정리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구호품은 의류가 25톤, 식품이 10톤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의류를 분류하고 발송하는 데 15명의 자원 봉사자가 꼬박 일 주일이 걸렸습니다.
니카라과를 스쳐 지나간 미치
미치는 니카라과에도 파괴적인 비가 쏟아져 내릴 만큼, 니카라과 국경 가까이로 지나갔습니다.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간선 도로가 유실되었습니다. 포솔테가 마을 근처에서는 진흙 사태가 나서 마을들 전체가 2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파묻혀 버렸습니다.
니카라과의 증인들은 그 참사에 대해 듣고 대규모 구호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이 힘들고도 위험한 긴급 구조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형제들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두 팀 즉 레온(포솔테가의 남쪽에 있는 마을)에서 온 팀과 치치갈파(포솔테가의 북쪽에 있는 마을)에서 온 팀으로 이루어진 증인들이 포솔테가를 향해 떠났는데, 형제들마다 무거운 식량 꾸러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조 대원들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 거의 통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지만, 형제들의 결의는 확고하였습니다.
11월 2일 월요일 이른 아침, 레온에서 온 형제들은 식량을 트럭에 싣고 유실되어 버린 다리까지 갔습니다. 트럭에서 짐을 부린 다음, 형제들은 두 팀으로 나누어서 한 팀은 포솔테가로, 다른 한 팀은 홍수가 난 텔리카라는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떠났습니다. 형제들은 우선 기도를 하였습니다. 구조 활동에 참여한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를 마치자 우리는 크게 힘이 솟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때는 진흙탕에서 미끄러져 가면서, 또 어떤 때는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서 커다란 도랑들을 건너야 하였습니다. 나무가 쓰러져서 길을 막고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물 웅덩이에 시체들이 떠 있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도 견뎌야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자전거를 타고 간 레온과 치치갈파의 형제들은 거의 동시에 포솔테가에 도착하였습니다. 구조대의 일원이었던 네리오 로페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자전거는 타이어가 많이 닳아 있었지요. 그래서 1, 2킬로미터밖에는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자전거는 견뎌 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야 타이어 두 개에 모두 구멍이 났습니다. 어쨌든, 그 형제들은 구호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마을에 사는 일단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만났을 때 참으로 기뻤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원과 도움을 베풀어 주신 여호와와 우리 형제들이 너무나 고마워요. 형제들이 우리를 도우러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것은 홍수가 난 마을들을 향해 떠난 여러 차례의 자전거 구호 활동 중 첫 번째 경우에 불과했으며, 많은 경우 형제들은 구호팀들 중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라레이나가 마을에서는 16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자전거를 타고 도우러 오는 감동적인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을의 형제들은 이 형제들의 노고에 마음이 감동되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때때로 형제들은 20킬로그램 이상의 구호품을 등에 진 채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하였습니다. 엘구아야보 마을로 간 두 형제는 100킬로그램도 넘는 식량을 날랐습니다! 한 형제는 자전거에 짐을 최대한 잔뜩 싣고 가면서 이사야 40:29의 이러한 성구를 묵상하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느니라].”
토날라 마을에 사는 증인들은 책임 있는 형제들에게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알리기 위해 소식을 전할 형제를 보냈습니다. 그 형제는 도착해서, 구호 식량을 이미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보니 집에 이미 식품이 와 있었습니다. 치난데가 주위의 수해 지역으로 구호품을 가지고 가는 일을 도운 마를론 차바리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마을에는 증인 가족이 44가구 있었지요. 하지만 형제들이 식품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80가구가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구호 활동은 당국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왐블란 읍의 읍장은 증인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혹시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이렇게 편지합니다. ··· 우리는 여러분이 이곳 왐블란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도와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위해서도 무엇인가 해 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군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식품과 의약품과 의류를 보내 주었습니다.
과테말라에 입힌 피해
미치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과테말라를 덮쳤습니다. 과테말라 시의 남쪽에 사는 증인인 사라 아구스틴은 세차게 흐르는 물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사라가 사는 계곡은, 거세게 흐르는 강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라는 종종 이웃 사람들의 집으로 가서 성서 진리를 전해 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집집으로 다니며 그들을 깨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 후 언덕에서 엄청난 기세로 진흙이 쏟아져 내려 많은 이웃집들이 파묻혔습니다. 사라는 삽을 들고는 생존자들을 돕기 시작해서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일곱 명의 어린아이를 구해 냈습니다. 조산사인 사라는 그 중 한 아이의 출산을 도와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사라가 성서 출판물을 전해 준 적이 있는 빌마라는 십대 소녀는 사망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미치는 기세가 많이 꺾여 있기는 하였지만, 계속 비가 내려 농작물과 다리와 가옥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과테말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는 많은 양의 구호품이 답지하였으며, 따라서 그 구호품 가운데 일부는 온두라스의 형제들을 돕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많은 다리가 파괴되고 공항이 침수되었기 때문에 그 구호품은 배편으로 보내야 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는 프레데 브룬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유리 섬유로 만든 8미터 길이의 배를 빌려 약 1톤의 의약품과 식품을 싣고 출발하였습니다. 거친 바다를 힘겹게 헤치고 나아간 끝에, 마침내 흠뻑 젖은 채로 오모아 항에 도착했지요.”
미치가 지나간 후
미치는 멕시코 남동부에서 곧 소멸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려는 듯, 미치는 북동쪽을 향하더니 미국의 플로리다 주 남부를 강타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미치는 기세가 약해졌습니다. 미치는 대서양으로 물러나더니 급속히 소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1월 5일까지 모든 열대성 폭풍 경보는 해제되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치를, “지난 2세기 동안 서반구를 강타한 허리케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허리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최종 사망자수는 무려 1만 1000명 정도나 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실종된 상태입니다. 3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거나 그 정도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온두라스의 카를로스 플로레스 파쿠세 대통령은 “우리가 50년 동안 조금씩 건설해 놓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개탄하였습니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도 미치 때문에 집을 잃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집이 있던 부지조차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많은 형제들의 집을 수리하거나 다시 짓도록 돕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허리케인 미치와 같은 비극적인 재난들은 우리가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에 살고 있음을 생각나게 하는 무시무시한 사건들입니다. (디모데 둘째 3:1-5) 하느님의 왕국이 지구를 관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러한 재난들로부터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태 6:9, 10; 계시 21:3, 4) 그렇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형제들 중에는 미치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b 현지의 대피 명령을 잘 따르고 현지 회중들이 훌륭하게 조직된 덕택에 많은 형제 자매들이 위험 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피해를 입은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시 일상적인 영적 활동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엘살바도르에서는 미치가 지나간 지 며칠밖에 안 되어 열린 지역 대회에 폭풍 피해자들이 참석하도록 돕는 마련들을 하였습니다. 버스를 대절해서 교통편을 준비하고 숙소를 마련하였습니다. 심지어 아픈 사람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치료를 해 주는 마련까지 있었습니다! 대회는 성공적이어서, 최고 참석자수가 4만 6855명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였습니다. 미치 때문에 집과 직장을 모두 잃은 엘살바도르의 한 형제인 호세 리베라는 이렇게 시인합니다. “우리는 이번에 겪은 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지요. 하지만 형제들이 나타낸 후대를 보고 나서 우리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대회장에서 돌아왔습니다.” 이 나라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현격하게 증가했다고 보고합니다. 외부 사람들이 우리의 구호 활동을 지켜 본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아마 증인들 자신일 것입니다. 온두라스에서 일어난 홍수에서 살아 남은 카를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우리 형제들의 사랑과 애정을 직접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허리케인 미치가 입힌 피해는 언젠가 옛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증인들이 목숨을 잃거나 심한 부상을 당할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형제들을 도와 준 일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낸 사랑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각주]
a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형제”나 “자매”라고 부른다.
b 폭풍이 지나간 후, 전염병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로 니카라과에서 증인 한 명이 사망하였다.
[19면 네모와 삽화]
인근의 증인들이 베푼 도움
기상 통보관들이 허리케인 미치가 벨리즈를 강타할 것이라고 예보하자, 벨리즈에서는 그 영향에 자체적으로 대비하였다. 정부에서 모든 해안 지역과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내륙으로 8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수도 벨모판이나 고지대에 있는 다른 마을들로 피신하였다.
다행히도, 벨리즈는 미치의 맹렬한 기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온두라스와 니카라과와 과테말라의 형제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들은 벨리즈 형제들은 식품과 옷과 정수한 식수와 돈을 기부하였다.
사실, 인접한 다른 나라에 사는 형제들도 그러한 반응을 보였다. 코스타리카의 증인들은 대형 컨테이너 네 대분의 식품과 옷과 의약품을 보내 주었다. 파나마의 형제들은 네 곳에 구호품 접수 센터를 마련하여 형제들이 기부한 물품을 접수하고 분류하여 포장하였다. 며칠도 채 안 되어 2만 킬로그램 이상의 구호품이 접수되었다. 증인이 아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구호 활동을 조직하는 데는 군대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제 보니 여호와의 증인이 그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군요.” 그 후 증인들은 이 남자에게 성서 진리를 전해 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운수업을 하는 한 형제는 구호품을 니카라과로 운반할 수 있도록 세미트레일러 한 대와 (증인이 아닌) 운전 기사 한 명을 마련해 주었다. 파나마와 코스타리카의 관리들은 통관 절차를 밟지 않고 트레일러가 국경을 통과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한 주유소에서는 무료로 트레일러의 연료 탱크 두 개를 가득 채워 주었는데, 이것은 왕복 운행을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니카라과에서도 역시 세관원들이 화물을 검사하지 않았다. 세관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화물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보낸 것이라면 검사해 볼 필요도 없지요. 여호와의 증인들하고는 문제가 생기는 법이 결코 없으니까요.”
그런데 온두라스로는 육로를 통해 수송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온두라스 대사관에서 일하는 한 그리스도인 자매가 대사관을 통해 구호품을 무료 항공편으로 보내는 마련을 할 수 있었다! 1만 킬로그램이 넘는 물품을 이런 식으로 보냈다.
흥미롭게도, 증인이 아닌 일부 사람들은 증인들의 구호 활동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어떤 회사들에서는 판지 상자, 접착 테이프를 자르는 도구, 플라스틱 용기들을 기증하였다. 그런가 하면 돈을 기부하거나 할인해 준 회사들도 있었다. 파나마의 공항 직원들은 20여 명의 증인들이 온두라스에 보낼 구호품을 부리는 일을 자원하여 도와 주는 것을 보고 특히 감명을 받았다. 이튿날, 이 공항 직원들 중 몇 사람이 자기들끼리 모은 것을 기부하러 왔다.
[20면 네모]
멕시코에서 벌인 그와 비슷한 구호 활동
멕시코는 허리케인 미치로 인해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살인마가 중앙 아메리카를 강타하기 바로 몇 주 전에 치아파스 주에서 큰 홍수가 났다. 약 350개 마을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는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린 곳도 있었다.
당연히, 그 지역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홍수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현지 회중 장로들이 신속히 행동을 취한 것이 종종 폭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작은 마을에서는 장로들이 회중 성원 개개인을 찾아가서 비가 계속 내리면 왕국회관으로 대피하라고 경고해 주었다. 왕국회관이 그 마을에서는 가장 튼튼한 건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새벽에는 두 개의 강이 범람하여 한꺼번에 그 마을을 덮쳤다! 증인들과 몇몇 이웃 사람들은 왕국회관 옥상으로 피해서 거세게 밀어닥친 그 홍수를 살아 남았다. 목숨을 잃은 증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1000명가량의 멕시코 증인들은 정부에서 마련한 대피소로 옮겨 가야만 하였다. 증인들의 집 가운데 156채가량이 완전히 파괴되고 24채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뿐만 아니라, 7개의 왕국회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 이웃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 6개의 구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식품, 의류, 담요를 비롯한 구호품들이 신속히 분배되었다. 사실, 그 지방의 관리들은 구호 활동의 진척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군대도 그토록 빨리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오래 전부터 정직하다는 평판을 들어 왔으며, 이로 인해 그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일단의 사람들이 그 지방 당국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이 사는 마을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있다고 대답하자, 그 관리들은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데려오십시오. 그 사람한테 구호 식량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 지방 회중의 한 장로는 상황을 잘 요약하여 이렇게 편지하였다. “형제들은 이러한 재난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인근 마을의 많은 형제들이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식품과 성서 출판물을 가지고 도우러 와 우리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호와께 감사드릴 이유가 많습니다.”
[14면 지도와 삽화]
멕시코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15면 삽화]
온두라스
◼ 과세리케 강
[16면 삽화]
엘살바도르
◼ 칠랑게라의 중심가
◼ 생존자들인 호세 레무스와 그의 딸들, 폭풍을 견딘 왕국회관 앞에서
◼ 호세 산토스 에르난데스, 부서진 자기 집 앞에서
[17면 삽화]
니카라과
◼ 텔리카로 간 최초의 자전거 구호 팀
◼ 엘구아야보의 증인들이 식품 자루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
[18면 삽화]
니카라과
◼ 자원 봉사자들이 다시 지은 많은 집들 가운데 첫 번째 집
◼ 지방 회중의 증인들이 식품을 담는 일을 돕고 있는 모습
[18면 삽화]
과테말라
◼ 일곱 명의 어린아이를 진흙더미에서 구해 내는 일을 도운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