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된 대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다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계시 21:5.
1, 2. 많은 사람들이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하기를 주저하는 것도 당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 하고 말한 적이나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추측하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는 앞으로 있을 일을 예언할 수 있다고 성급하게 주장하는 이들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앞으로 몇 달 혹은 몇 년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히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 도무지 없습니다.
2 「포브스 ASAP」지는 한 호에서 시간에 관해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 호에서 TV 다큐멘터리 사회자인 로버트 크링글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시간은 결국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지만, 예언가들보다 시간의 손에 더 많이 농락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지는 게임이다. ··· 그런데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언을 한다.”
3, 4. (ㄱ) 일부 사람들은 새 천년에 대해 어떤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ㄴ)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어떤 현실적인 예상을 하고 있습니까?
3 당신은 새 천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한 현상을 유의해 보았을 것입니다. 「매클린스」지는 작년 초에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캐나다인들에게 2000년은 달력상의 또 하나의 해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해는 참으로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요크 대학교의 크리스 듀드니 교수는 사람들이 낙관적인 견해를 갖는 이유를 이렇게 지적하였습니다. “새 천년은 우리가 참으로 끔찍한 세기로부터 손을 씻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4 단지 희망 사항에 불과한 말로 들립니까? 캐나다에서, 한 조사 연구에 의하면 응답자의 겨우 22퍼센트만이 “2000년에 세계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거의 절반은 앞으로 50년 안에 “또 다른 세계적 분쟁” 즉 세계 대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새 천년이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모두 없애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왕립 학회 회장이었던 마이클 아티야 경은 이렇게 썼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 21세기가 우리의 문명 전체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일들을 가져올 것임을 의미한다. 인구 증가, 자원 고갈, 환경 오염, 만연한 빈곤과 같은 문제들은 이미 우리에게 닥쳐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현안에 긴급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5. 우리는 미래의 일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식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5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차피 사람이 미래를 예언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미래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게 낫지 않겠는가?’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물론 사람이 미래의 일을 정확히 예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네 개의 구체적인 예언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예언들은 가장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읽고 있는 책, 또한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간과하고 있는 책—바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성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 성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든 간에, 이 네 개의 매우 중요한 성구는 반드시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성구들은 매우 밝은 미래에 대해 예언합니다. 더욱이, 이 네 개의 중요한 예언은 당신의 미래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6, 7. 이사야는 언제 예언을 하였으며, 그의 예언은 어떻게 놀랍게 성취되었습니까?
6 첫 번째 예언은 이사야 65장에 나옵니다. 그 내용을 읽기 전에, 그 배경을—이 내용이 언제 기록되었으며 어떤 상황을 다루고 있는가를—머릿속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쓴 하느님의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 왕국이 종말을 고한 때로부터 한 세기 이상 앞서 살았습니다. 그 종말은 여호와께서 불충실한 유대인들에게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바빌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황폐시키고 그 백성을 유배하도록 허락하신 때에 닥쳤습니다. 그 일은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나서 100년 이상 지난 뒤에 일어났습니다.—역대 둘째 36:15-21.
7 그 일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해서는, 이사야가 하느님의 인도로, 마침내 바빌론을 함락시킬 페르시아인의 이름이 키루스라는 것까지, 아직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언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5:1) 키루스는 기원전 537년에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우리가 65장에서 읽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러한 회복이 있을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고토로 돌아왔을 때 누리게 될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8. 이사야는 어떤 행복한 미래를 예언하였으며, 특히 무슨 표현이 우리의 관심을 끕니까?
8 이사야 65:17-19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언을 읽게 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인하여 영원히 환희에 넘쳐 기뻐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기쁨의 이유가 되게, 그 백성으로 크게 기뻐할 이유가 되게 창조하겠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나의 백성으로 인하여 환희에 넘치리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나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이사야가 묘사한 상태는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살던 때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였습니다. 이사야는 기쁨과 즐거움을 예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구는 성서에 네 번 나오는데, 이것은 그 중 첫 번째 문구입니다. 그 네 성구는 우리의 미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미래를 예언하기까지 합니다.
9. 고대 유대인들은 이사야 65:17-19의 성취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습니까?
9 이사야 65:17-19의 처음 성취는 고대 유대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그들은 이사야가 정확히 예언한 대로 고토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순결한 숭배를 재건하였습니다. (에스라 1:1-4; 3:1-4) 당신이 아는 것처럼, 물론, 그들은 우주 공간의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지구상에 있는 고토로 돌아왔습니다. 그 점을 아는 것은 이사야가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노스트라다무스나 그 밖의 인간 예언가들의 애매모호한 예언들을 두고 하는 것처럼 억측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사야가 무슨 의미로 그 표현을 썼는지를 성서 자체에서 분명히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10.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10 성서에서 “땅”이라는 말은 언제나 우리가 사는 지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편 96:1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이러합니다. ‘여호와께 노래하여라, 온 땅아.’ 우리는 우리가 사는 행성인 지구가—육지와 대양이—노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래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96:1은 땅의 백성 즉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a 그러나 이사야 65:17에는 “새 하늘”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땅”이 유대인들의 고토로 돌아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를 의미한다면, “새 하늘”은 무엇입니까?
11. “새 하늘”이라는 문구는 무엇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까?
11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저 「성서와 신학과 교회에 관한 문헌 백과 사전」(Cyclopæ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예언적 환상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하늘은 ··· 통치 세력의 전체 집합체를 의미한다. ··· 마치 실제 하늘이 땅 위에 있으면서 군림하는 것처럼, 신민 위에 있으면서 군림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복합 어구에 관하여 그 백과 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언적 표현으로 이 문구는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를 의미한다. 하늘은 주권자이며, 땅은 평민 즉 위에 있는 이들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다.’
12. 고대 유대인들은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12 유대인들은 고토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사물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통치 집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윗 왕의 후손인 스룹바벨이 총독이었고,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학개 1:1, 12; 2:21; 스가랴 6:11) 이들이 “새 하늘”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위에 있었습니까? 그 “새 하늘”은 “새 땅” 위에, 즉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재건하여 여호와를 숭배하기 위해서 고토로 돌아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깨끗해진 사회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실제적인 의미로, 그 당시 유대인들과 관련된 성취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었습니다.
13, 14. (ㄱ)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다른 어떤 곳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까? (ㄴ) 베드로의 예언이 우리 시대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요점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성서 해석 연습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잠시 고대 역사를 살펴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또 다른 곳으로 가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둘째 3장을 펴 보면 이 문구가 나오는데, 거기를 보면 우리의 미래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4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온 때로부터 500년 이상 지난 후에 그의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의 사도들 중 한 사람인 베드로는, 베드로 둘째 3:2에서 “주”로 언급된 분인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의 ‘약속된 임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예언은 오늘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증거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예수께서 하느님의 하늘 왕국의 통치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에서 임재해 계심을 알려 줍니다. (계시 6:1-8; 11:15, 18) 베드로가 이 장에서 예언한 또 다른 것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5. “새 하늘”에 대한 베드로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될 것입니까?
15 베드로 둘째 3:13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분의 약속대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으니, 거기에는 의가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늘에 계시는 예수께서 “새 하늘”의 중심이 되시는 통치자라는 사실을 이미 배워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가 1:32, 33) 그러나 다른 성구들에서는 그분이 혼자 통치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비롯하여 얼마의 사람들이 하늘에서 자리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자들”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하늘 왕좌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3:1; 마태 19:28; 누가 22:28-30; 요한 14:2, 3) 요점은 새 하늘의 일부로서 예수와 함께 통치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사용한 “새 땅”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6. 어떤 의미에서 “새 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까?
16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진 고대의 성취와 마찬가지로, 베드로 둘째 3:13의 현대 성취는 새 하늘의 통치권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수백만 명이 그 통치권에 기꺼이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 통치권의 교육 프로그램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으며, 성서에 나와 있는 그 법에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4:13) 그 사람들은 모든 국적과 언어와 인종으로 된 국제적 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통치하시는 왕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새 땅”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당신도 그 가운데 포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미가 4:1-4.
17, 18. 베드로 둘째 3:13에 나오는 표현은 어째서 우리가 미래를 기대할 만한 이유가 됩니까?
17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이상은 미래를 더 자세히 통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베드로 둘째 3장의 문맥을 검토해 보면, 큰 변화가 앞에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5절과 6절에서, 베드로는 노아 시대의 홍수, 곧 그 당시 악한 세상에 끝을 가져왔던 대홍수에 대해 기술합니다. 7절에서, 베드로는 “지금 있는 하늘과 땅”, 즉 통치권과 많은 수의 사람들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을 위해 보존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이라는 문구가 물질적 우주가 아니라 사람들과 그 통치권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18 그 다음에 베드로는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에 깨끗하게 하는 큰 일이 있을 것이며, 그 일은 13절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구절의 끝 부분에서 “거기에는 의가 깃들여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말에 유의하십시오. 그것은 더 나은 상태를 가져오기 위한 모종의 중대한 변화가 반드시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것은 참으로 새로운 것,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오늘날보다 더 큰 즐거움을 얻게 될 때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아닙니까? 당신이 그 점을 이해하게 된다면, 당신은 성서가 예언하는 것에 대한 통찰력,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9. 계시록에 나오는 어떤 배경을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앞으로 도래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19 하지만 좀더 고려해 보십시다. 우리는 이사야 65장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곳과 베드로 둘째 3장에서 이 문구가 나오는 또 다른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계시록 21장으로 가서, 성서에 이 표현이 나오는 또 한 곳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경우에도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장 앞인 계시록 19장에서, 우리는 전쟁에 관한 생생한 상징적 묘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적대적인 나라들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한 편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마 당신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라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요한 1:1, 14) 그분은 하늘에 계시며, 이 환상은 그분이 하늘 군대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누구를 상대로 싸웁니까? 그 장에서는 “왕들”과 “사령관들” 그리고 “작은 자이든 큰 자이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 싸움은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즉 악을 멸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1:6-10) 이어지는 계시록 20장은 “마귀요 사탄인 원래의 뱀”을 제거하는 일에 대한 묘사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계시록 21장을 고려해 보도록 하십시다.
20. 계시록 21:1에서는 앞으로 무슨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알려 줍니까?
20 사도 요한은 이러한 가슴 설레게 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졌고, 바다도 더는 있지 않다.” 이사야 65장과 베드로 둘째 3장에서 살펴본 점을 근거로 볼 때, 우리는 이 말이 문자적인 하늘과 우리가 사는 행성인 지구와 거기에 있는 깊은 물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앞의 장들에서 보여 준 것처럼, 악한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통치자인 사탄을 포함한 그들의 통치권이 제거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약속하는 것은 땅에 사는 사람들과 관련된 새로운 사물의 제도입니다.
21, 22. 요한은 우리에게 무슨 축복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며,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1 이 놀라운 예언을 좀더 살펴보면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절 끝 부분에서는 하느님께서 인류와 함께 계셔서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실 때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에스겔 43:7) 이어서 요한은 4,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여호와]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이 없고, 애통과 부르짖음과 고통도 더는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여라.’” 참으로 고무적인 예언입니다!
22 잠시 멈추어 성서가 예언하는 내용을 음미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민감한 감각 기관인 눈을 씻어 주는 정상적인 눈물을 가리키는 것일 리 없으며, 기쁨의 눈물을 가리키는 것일 리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닦아 주실 눈물은 고통, 슬픔, 실망, 상심, 괴로움으로 인한 눈물입니다. 어떻게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 놀라운 하느님의 약속에서,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은 ‘죽음, 애통, 부르짖음, 고통이 더는 없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요한 11:35.
23. 요한의 예언에서는 어떠한 상태가 끝날 것임을 보증합니까?
23 이것은 암이나 뇌졸중이나 심장 마비가,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없어지게 될 것임을 확증하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 중에 질병이나 사고나 재해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은 그때 태어나는 아이들은 자라서 늙게 되고 결국에는 죽고 말게 될 전망을 가지고 나오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또한 노년기에 아주 흔한 병인 알츠하이머병, 골다공증, 섬유종, 녹내장, 백내장까지도 더 이상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4.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축복이 될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더 고려할 것입니까?
24 죽음과 노령과 질병이 없어지면 애통과 부르짖음도 줄어들 것이라는 데는 당신도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극심한 빈곤, 어린이 학대, 배경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자행되는 압제적인 차별은 어떠합니까? 오늘날 아주 흔히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 계속된다면, 애통과 부르짖음이 없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 아래서 누리게 될 삶은 현재와 같이 슬픔을 초래하는 일들 때문에 망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문구가 나오는 네 곳 중 세 곳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검토한 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나의 성구가 더 있는데, 그 성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언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우리가 고대할 만한 이유를 강조해 줍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 예언에 대해 그리고 그 예언이 우리의 행복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각주]
a 「신 영어 성서」에서는 시편 96:1을 “주께 노래하여라, 땅 위의 모든 사람들아”로 번역한다. 「현대 영어 역본」에는 “이 땅 위의 모든 자들아, 주께 찬양의 노래를 불러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번역은 이사야가 말한 “새 땅”이 고토로 돌아온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킨다는 이해와 일치한다.
무엇을 기억하십니까?
● 성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예언하는 세 곳은 어디입니까?
● 고대 유대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예언 성취와 어떤 관련이 있었습니까?
● 베드로가 언급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 계시록 21장에서는 밝은 미래와 관련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10면 삽화]
여호와께서 예언하신 대로, 키루스는 기원전 537년에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