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수반하는 유익들
1. 진화론은 개인에게 어떠한 미래를 제공해 줍니까?
진화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황량한 미래가 있읍니다. 그들은 사람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과거보다 나은 생물의 표본으로 진화 발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자 자신에 관한 한, 그 믿음이 그에게 무엇을 제공해 줍니까? 그는 자기가 늙으면 건강과 힘이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음이 닥친다는 것을 압니다. 그가 믿는 믿음은 그에게 다른 것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2. 하나님과 진화를 다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태에 처하여 있음을 알게 됩니까?
2 하나님과 진화를 다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확고한 희망이 없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지구 위에 모든 생물을 산출하는 수단으로서 진화를 사용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서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지침으로 삼지 않으므로써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의 계시가 없읍니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나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하며, 어떠한 도덕 표준이 그들을 지도해야 하는지, 어떠한 미래가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도덕이라고 옹호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뿐이며, 그러한 견해는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의하여 형성된 것입니다.—예레미야 8:9.
3. 창조주와 그의 말씀인 성서를 믿는 사람은 어떻게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읍니까?
3 이와는 반대로 창조주와 성서가 인류에 대한 그의 영감받은 계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생명에 대하여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충고를 차 버리지 않으며, 잠언 3:5, 6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일치하게 생활함으로써 오는 풍부한 축복을 즐깁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을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치에 합당한 대답
4, 5. (ㄱ) 우주 기원에 관한 성서의 해답은 왜 이치적입니까? (ㄴ) 그러나 진화론자인 ‘찰스 다아윈’은 이 제목을 어떻게 다루었읍니까?
4 만일 당신이 창조주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어두움에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주의 기원이란 결코 회피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성서 첫 마디에 있는 설명을 확신을 가지고 인용할 수 있읍니다. (창세 1:1) 그리고 당신은 압도적 증거로서 하늘과 땅을 확신있게 지적할 수 있읍니다. 그것들은 참으로 전능하신 분이 만드신 것이며, 그분은 어떤 인간의 지식과 지혜보다도 월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신 분입니다. 당신은 결코 ‘찰스 다아윈’과 같은 진화론자들의 난처한 위치에 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과 관련해서 신의 존재를 확신케하는 다른 근원이 나를 감명케 한다. ··· 이것은 먼 옛날을 돌아 볼 수 있고 먼 앞날을 바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을 포함해서 이 광대하고 경이로운 우주를 단순한 우연 혹은 필요의 결과라고 이해하기란 극히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제일 원인에게 쏠리게 된다.”
5 창조주를 지적해 주는 이러한 모든 사실과 이성의 법칙을 가지고도 그는 그러한 결론을 배척하고 자기 자신이 “불가능”이라고 인정한 견해를 받아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내가 온전히 믿는 바로 최하의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낮은 지성으로부터 발전된 사람의 지성이 그러한 웅대한 결론을 내릴 때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는가?” 누구나 이러한 식으로 추리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한 성경의 진리성을 자기 자신의 경우에서 예시하는 것입니다.—시 14:1.
6. (ㄱ) 창조를 믿는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우주를 이해하는데 왜 진화론자들보다 확실히 유리합니까? (ㄴ) 그러므로 참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 참임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6 그러나 창조주를 믿는 사람은 만족한 결과를 얻도록 그의 지성을 사용한 위치에 있읍니다. 이러한 만족한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우주가 단순히 지성 없는 진화의 산물이라면, 우주는 지성적 설계의 결과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비이성적인 것을 연구해서 이성적 지성에 호소할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읍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그리고 사실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우주는 참으로 지성을 가진 창조주의 산물이지만 창조주와 그의 목적을 고려에 넣지 않고서 우주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들은 끊임 없이 좌절감에 부닥치게 됩니다. 그들은 잘못된 전제(前提)로 출발하였고 그들이 배우는 모든 것을 완전히 근거없는 이론에 관련시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그들이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잘못 해석하는 것과 그들이 수집한 지식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환경이 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백하지 않읍니까? 그것은 성서 잠언의 말씀과 같이 참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잠언 1:7; 9:10) 누구나 참으로 여호와의 하신 일을 이해하고 현명하게 그것과 일치하게 행동하려면 여호와를 알고 그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7. (ㄱ) 진화론은 젊은이들 사이에 어떠한 좌절감을 갖게 하는데 공헌하였읍니까? (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취감을 발견할 수 있읍니까?
7 이러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생의 의의가 없다’고 해서 흔히 볼 수 있는 좌절감을 느끼는 일이 없읍니다. 창조주를 알게 된 사람은 성서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선언에 온전히 동의합니다. “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심이 당연하옵니다.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시옵고 뜻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되어 존재하옵니다.” (계시 4:11, 새번역)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아름다운 경치나 호화찬란한 일몰을 보고 깊이 감동되었을 때, 새의 노래 소리를 듣고 정신이 고조되었을 때, 그는 그러한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그가 경험하는 창조주의 사랑의 증거는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그렇게 관대하게 마련해 주신 그분을 다른 사람들도 알고 사랑하도록 돕게 그를 움직입니다. (마태 5:45; 사도 17:26-28)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그는 인생의 진정한 성취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자기 스스로 가진 것처럼 생을 이기적으로 자기의 필요와 욕망을 중심으로 세워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생각은 하나님께로 인도됩니다. 성서의 시편 필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2-5.
8. 성서는 진화론보다도 생물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사람에게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조화함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8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들에 대하여 잊어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아픈 일이 있으며, 그들도 치솟는 범죄율의 결과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께 대하여 분격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진화하고 있고, 생물학적으로 도덕적으로 향상하고 있음을 믿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모든 증거는 그와 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성서로부터 인류는 저하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우리의 시대의 사건들은 그 사실에 동의합니다.
9. (ㄱ) 성서는 인간의 끊임 없는 저하 경향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 (ㄴ) 성서는 장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을 지적해 줍니까?
9 창조에 관하여 알려 주고 있는 성서의 같은 부분은 또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현 상태에 대한 이유도 설명해 줍니다. 먼저, 하나님의 한 영자(靈子)가 하나님께만 속해 있는 영광을 탐내어 그의 생각에 나쁜 욕망이 자리잡게 함으로써 자신을 부패시켰음을 알려 줍니다.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는 첫 여자 ‘하와’를 꾀었고, ‘하와’를 통하여 ‘아담’으로 하나님의 명백하게 언명된 법을 범하게 하였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곧게 지으셨지만 그를 ‘로보트’로 지으시지는 않았읍니다. ‘아담’은 육체의 결함이나 정신적 무능으로 말미암아 상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읍니다. (창세 2장, 3장; 신명 32:4, 5 신세) 이렇게 하여 우리 모두의 조상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으로 인도하는 병과 타락이 있게 되었읍니다. 모든 생명이 달려있는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은 다만 저하하여 갈 수 있읍니다. 또한 첫 인간에게 범죄하도록 재촉함으로 ‘사단’ 마귀가 된 자의 끊임 없는 영향은 상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로마 5:12; 계시 12:9) 이러한 성경의 설명은 매우 이치적이며, 우리 시대의 어느 곳에서든지 볼 수 있는 사실과 잘 맞습니다. 더우기 성서는 하나님께서 악을 종말시키기 위하여 사용하실 수단과 그의 뜻을 행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의로운 상태 아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기회를 열어 놓으신 것에 관하여 자세히 알려 줍니다.
인간 관계에 지침이 되는 것은 성서인가, 아니면 진화론인가?
10. 인생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건전한 지침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읍니까?
10 하지만 현재 불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읍니다. 우리는 매우 쉽게 망하게 할 수 있는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건전한 지침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읍니까? 성서는 인류의 창조주 자신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마련해 줍니다. 시편 필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하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영감을 받아 하나님께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9, 11, 105) 이 말씀을 밀접히 따르므로 오는 유익들이 그 말씀의 가르침과 진화를 중심으로 생겨난 철학의 열매들을 비교함으로써 강조됩니다.
11, 12. 진화에 대한 믿음이 양차 세계 대전에 공헌한 요인임을 어떻게 증명하였읍니까?
11 이 세대는 두개의 세계 대전을 목격하였으며, 이 두 대전으로 이끈 요인은 진화에 대한 믿음이었읍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립니까? 진화를 지지하는 ‘다아윈’의 명제의 결과를 논하면서 ‘에이치. 지. 웰즈’는 「세계 문화사 대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아윈’주의 운동이 형식적 그리스도교를 갑자기 불의에 습격하였다. ··· 새로운 생물학은 아직까지 고대의 도덕적 지주를 대치시킬 만한 아무런 건설적인 것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심한 도덕의 퇴폐가 뒤따랐다.” 그리고 나서 이 사실과 전쟁에 대한 태도의 관계를 나타내면서 그는 이렇게 계속합니다. “19세기 말엽에 우세한 사람들은 그들이 강하고 교활한 것은 약하고 의뢰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얻는다는 ‘생존 경쟁’의 덕분으로 우세하였다고 믿는다. ··· 그들은 사람이 ‘인디안’ 사냥개와 같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결정하였다. ···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의 큰 개 떼가 덤벼들어 정복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보였다.” 생존경쟁에서 적자가 생존한다는 진화개념과 온전히 일치하게 그들은 그때까지 역사에 없었던 전쟁으로 돌진하였던 것입니다.
12 무신론적 진화론자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진화론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경건한 모양을 하려고 하는 자들도 그렇게 영향을 받습니다. ‘빌립 시. 포더길’은 그의 저서 「진화와 그리스도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학적 진화로부터 진화 철학이 일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비그리스도교적 도덕관을 형성할 진화론적 윤리가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이 만일 그리스도인 사고에 침투하게 되면 그리스도인 신앙을 교묘히 침식할 수 있다. ··· ‘우드 존스’는 1914년의 비극과 그 후에 ‘나치즘’ 그리고 ‘나치즘’의 과도한 악을 유발시킨 정신성의 야기는 일종의 ‘다아윈’주의 교리의 결과에서 큰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3. 진화론의 열매와 인류의 창조주의 말씀을 믿음으로부터 오는 결과가 어떻게 대조되는가 설명하십시오.
13 진화론의 이러한 폭력적 열매는 인류의 창조주의 말씀의 건설적 지침과 예리한 대조가 됩니다. 창조에 관하여 알려 주고 있는 성서에 있는 한 책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아담’의 아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느니라.” (요한 1서 3:11, 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3:34, 35) 그러한 연합으로 생활을 즐기는 유익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에 수반하는 것입니다.
14. (ㄱ) 어떠한 방법으로 진화론적 사고는 도시 거리에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까? (ㄴ) 부모가 진화론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은 어떠한 심각한 문제를 직면하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까?
14 금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두 개의 세계 대전이나 더 작은 전쟁들만이 나타난 폭력의 전부가 아니었읍니다. “적자 생존” 철학은 거리의 범죄의 특징을 짓게 한 짐승과 같은 공격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고는 바로 가정에까지 미쳐서 가족의 띠를 분쇄합니다. 만일 부모가 진화론에 찬동하고 그리하여 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추론한다면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자녀들에게 마약이나 방종한 생활로써 그들의 생애를 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읍니까? 그들은 어떻게 자녀들에게 그들이 원한다면 자살로써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읍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그들이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서에는 올바른 생활을 위한 원칙이 들어 있으며, 그들은 진화론을 승인함으로써 성서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15. 창조주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가족을 보호해 줍니까?
15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조상을 지으셨으며, 그가 가정에서의 올바른 행실의 법칙을 세워 놓으신 분이시며,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책임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잠언 15:3; 예레미야 16:17) 하나님께서는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하나님의 길로 교훈하고, 그들이 그의 “기이한 사적”을 인식하도록 세워주어야 할 책임을 주셨읍니다. (시 78:4)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며, 그 이유는 부모가 더 크고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이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6:1; 잠언 23:22) 그 결과는 가족 성원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뭉치게 하고,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이 모든 자들에 의하여 존경을 받는 권위있는 충고를 근거로써 다루어질 수 있는 가정입니다.
16. 성 도덕에 있어서 어떠한 상태에 대하여 진화론자들은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그러나 성서는 어떠한 건전한 지침을 마련해 줍니까?
16 성 도덕에 대한 개인의 견해 역시 인간 기원에 대한 믿음에 따라 영향을 받습니다. 성서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간음, 음행, 낙태를 금한다는 것을 알며, 그 법을 존경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그에게 진정한 보호가 됩니다. (히브리 13:4; 로마 13:9, 10; 출애굽 21:22, 23, 신세 비교) ‘가톨릭’ 사제 ‘레이몬드 노갈’은 자신은 세상적 진화 철학에 동조함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자들 사이에 사고 경향이 “사람의 생활 철학과 그의 도덕과 그의 종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 결과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a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화를 받아들이는 교회 회원이라 할지라도 성서를 “비과학적”으로 분류함으로써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서 첫째 책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된 사람들은 나머지 성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정부들까지도 간음과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법적 제한을 제거하고 있읍니다. 창조에 대한 믿음을 배척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정부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러한 행실이 가져오는 결과인 질병과 좌절감과 불안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단순이 짐승의 후손이라고 가르침을 받아 왔을 때 사람은 흔히 짐승과 같이 행동하게 됩니다.—로마 1:22-27.
17. 진화론은 다른 어떠한 타락적인 덫으로 인도하며, 그러나 성서는 어떻게 필요한 보호책을 마련해 줍니까?
17 진화론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의로운 표준을 배척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신봉자들에게 성서를 믿는 사람들이 보호를 받고 있는 또 다른 덫에 치게 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다아윈’의 제자였던 ‘알프레드 알. 월레이스’는 진화론자 ‘언스트 벤즈’의 말에 의하면 영매술자였읍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사(擬似)심리학의 창설자가 ··· ‘우리를 신비주의로 이끈 것은 ‘다아윈’주의이다’ 하고 기록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또한 “‘줄리안 헉슬리’는 ··· 불교 사상과 명상에 적극적으로 기우리며, 사람의 의사심리적 역량의 증가를 기대한다.”b 이제 사람보다 좀 더 나은 것이 되려는 그들의 욕망 때문에 그들은 초인간적 영(靈)의 지배를 받기 쉽게 됩니다. 성서는 그러한 능력의 근원에 대하여 사람을 무지케 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신비주의의 근원으로서 마귀와 악귀들의 정체를 밝혀 줌으로써 신비주의에 관련되는 것을 철저히 경고합니다. (사도 16:16-18; 에베소 6:10-13)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둘러 싸고 있는 타락한 행실로부터 보호해 주기 위하여 필요한 지침을 마련해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창조주의 뜻에 온전히 조화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합니다.
미래의 전망
18. 지난 세기에 한 진화론자는 인류에 대하여 어떠한 장래를 상상하였으며, 그러나 그의 기대는 어떻게 잘못임이 증명되었읍니까?
18 진화론은 장차 세대가 경험할지도 모르는 변화로부터 현재 살고 있는 아무도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아무런 희망도 제시해 주지 못하지만 진화론의 옹호자들 중 얼마는 인류에 대한 선명한 미래를 내다 보고 있읍니다. ‘알프레드 월레이스’는 진화가 발전시킬 그의 상상적인 사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읍니다. “그의 외형은 아마 최고의 지성적 기능과 동정적 감정으로 말미암아 건강하고 잘 조직될 신체와 우아하고 고귀한 신체에서 나온 완전히 아름다운 몸으로 발전하는 것 외에는 변화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지만 그의 정신적 구성은 세계가 다시 아무도 현존하는 인류 가운데 고귀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없는 단일 인종에 의하여 거주하게 될 때까지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자는 자기 동료의 행복과 관련되게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일할 것이며, 완전한 활동의 자유가 유지될 것이다. 잘 균형잡힌 도덕 기능은 다른 사람의 동등한 자유를 아무도 침해하는 것이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이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진화의 결과로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50년 간의 발전을 회고할 때 이것이 사람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을 만한 건전한 이유를 공개해 줍니까? 여기 인용한 말을 쓴 사람은 1913년에 사망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로 그 다음 해에 세계에서 폭발한 사건을 보지 못하였읍니다. 우리 시대의 사실들은 그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19. 우리 시대의 진화론의 옹호자들은 어떠한 장래를 내다 보고 있으며, 그러한 전망은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칩니까?
19 위와 같은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뉴욕’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1969년과 1970년에 “사람은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특색으로 하였읍니다. 진화를 옹호하는 전시품으로 유명한 이 박물관은 1970년 3월 행사표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합니다. “규제받지 않은 공학의 영향과 함께 급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는 사람—과 그의 환경—을 재난의 절정으로 이끌어 왔으며, 인류의 생존을 의심케 만들었다.” 그들이 지금 장래를 내다보는 전망은 매우 희미하며, 물론 미래에 대한 굳건히 기초한 희망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즉시 정신적으로 불균형 상태에 있게 됩니다. 이것이 진화에 대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20. 미래에 대한 그들의 예측은 왜 잘못되었읍니까?
20 물론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을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을 고려에 넣지 않은 곳에 참 지식이 있을 수 없읍니다. 우리는 미래가 지성 없는 진화나 시편 10:3, 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음을 감사할 수 있읍니다.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21, 22. (ㄱ) 인류의 창조주는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선언하였읍니까? (ㄴ) 그는 어떻게 이러한 상태를 가져오실 것이며, 누가 그러한 상태에 참여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21 인류의 미래는 악한 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는 분이신 여호와에게 달려 있읍니다.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신 분으로서 그분은 땅을 헛되이 황폐하게 만드시지 않고 사람이 거하게 지으셨읍니다. (이사야 45:18) 모든 생명이 의존할 수 있는 이 분은 합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0, 11.
22 그분은 인류의 문제를 온전히 감독할 새로운 정부를 마련하셨읍니다. (에베소 1:8-10, 신세) 땅의 새로운 통치자는 땅 자체와 첫 인간 ‘아담’과 ‘하와’를 만드는 일에 아버지와 함께 하였던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친히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서 사신 일이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는 인류의 문제들을 이해하십니다. 그의 정부는 인자한 염려로써 다만 그의 천년 통치가 시작할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을 위하여도 이익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의 통치 아래서 인류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 자신의 위대한 업적의 결과나 지성없는 진화의 결과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유익을 적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교육받음으로써 오는 결과일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이사야 11:9) 이와 같은 놀라운 미래에 대한 자신있는 기대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의 영감받은 말씀인 성서와 일치하게 생활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각주]
a The Wisdom of Evolution, P. 13.
b Evolution and Christian Hope, PP. 78, 80.